가을 시즌, 뉴욕 극장가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오프 브로드웨이의 강렬한 순간들

브로드웨이의 가을 시즌이 화려하게 개막했다. 대형 신작과 스타 캐스팅, 입소문을 타고 화제를 모은 귀환작들이 줄줄이 무대에 오르며 연극 팬들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다. 그러나 늘 그렇듯, 뉴욕에서 진짜 주목할 만한 무대는 브로드웨이 바깥, 조금 더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피어나고 있다. 매혹적이거나, 유쾌하거나, 혹은 아프도록 날카로운 이야기들이 오프 브로드웨이의 무대 위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관객을 끌어당긴다. 브로드웨이닷컴이 선정한 올가을 반드시 눈여겨봐야 할 오프 브로드웨이 추천작 여섯 편을 소개한다.
호주 시드니에서 온 서사극, <Counting and Cracking>

호주 시드니의 벨부아 스트리트 극장과 쿠린지(Kurinji)의 공동 제작작인 <Counting and Cracking>은 NYU 스커볼에서 공연 중이다. 이 작품은 19명의 남아시아 배우가 출연하며, 타밀어와 신할라어를 포함한 다언어로 3시간 이상 이어지는 서사극이다. 스리랑카와 호주를 오가며 4세대에 걸친 가족사를 풀어내는 이 연극은 거대한 정치·사회적 격변 속에서도 따뜻한 유머와 인간미를 잃지 않는다. 오히려 ‘에픽’이라는 단어가 가리키는 무게감보다 훨씬 유연하고 생기 있다. 혁신적인 무대 연출은 곳곳에서 관객의 탄성을 이끌어내며, 긴 러닝타임조차 아깝지 않게 느껴지게 만든다. 연극이 줄 수 있는 생동감과 위안을 진정으로 체험할 수 있는 무대다.
유쾌한 데이트의 민낯, <Table 17>

토니상 수상자 카라 영(Kara Young)이 돌아왔다. MCC 씨어터에서 초연 중인 더글라스 라이언스의 로맨틱 코미디 <Table 17>에서 카라 영은 이혼 직전까지 갔던 옛 연인과의 재회라는 다소 무모한 데이트를 그린다. 연출은 <Cats: The Jellicle Ball>의 자일론 레빙스턴. 관객이 배우와 소통할 수 있도록 클럽처럼 꾸며진 무대에서, 연극은 ‘현장성’이라는 감각을 극대화한다. 성적 긴장감과 스타일, 현실적인 연애의 민낯을 유머러스하게 풀어낸 <Table 17>은 ‘연극을 위한 데이트’라는 말의 의미를 다시금 정의한다. 예술성과 오락성을 동시에 갖춘 작품으로, 공연 전후의 칵테일까지 더해진다면 이보다 완벽한 가을 밤은 없을 듯하다.
친구에서 가해자로, <Our Class>

클래식 스테이지 컴퍼니에서 상연 중인 <Our Class>는 지난 겨울 BAM의 언더 더 레이더(Under the Radar) 페스티벌에서 호평을 받은 작품이다. 타데우시 스워보지아넥의 희곡을 바탕으로 한 이 연극은, 1941년 폴란드 예드바브네에서 수백 명의 유대인이 같은 마을의 폴란드인들에게 살해당한 실제 사건을 다룬다. 사건의 잔혹성과는 대조적으로, 포스터 속 인물들은 마치 고등학교 앨범을 찍는 듯 환하게 웃고 있다. 이 아이러니는 극 중 어린 시절 친구였던 이들이 어떻게 서로에게 가해자가 되는지를 더욱 잔혹하게 상기시킨다. 유대인과 가톨릭 친구들 사이의 갈등을 중심으로, 이 연극은 단순한 역사적 고발을 넘어 개인의 선택과 도덕적 책임을 예리하게 묻는다.
캠프의 진수, <The Big Gay Jamboree>

<타이타닉>을 패러디한 뮤지컬 <Titanique>로 캠프와 90년대 향수, 셀린 디온을 절묘하게 결합시켰던 말라 민델의 신작 <The Big Gay Jamboree>가 오르페움 씨어터에서 프리뷰를 시작했다. 만취 상태로 깨어나 뮤지컬 세계에 갇히는 주인공 스테이시의 이야기를 그린 이 작품은, <Schmigadoon!>과 <SNL>의 팬이라면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지닌다. 직접 창작한 오리지널 넘버와 대사, 그리고 알렉스 모팻 같은 개성파 배우들의 활약은 관객의 웃음을 끊임없이 유발한다. 아직 <Titanique>만큼의 따라 부를 수 있는 넘버는 없지만, 캠프와 뮤지컬, 퀴어 문화가 절묘하게 뒤섞인 이 ‘잼보리’는 이미 브로드웨이 밖의 뜨거운 놀이터가 되고 있다.
러시아의 초상, <Vladimir>

<Russian Transport>로 뉴욕 연극계에 데뷔한 에리카 셰퍼가 13년 만에 선보이는 신작 <Vladimir>는 오는 9월 24일 맨해튼 씨어터 클럽에서 막을 올린다. 2000년대 초 러시아 모스크바를 배경으로, 한 언론인이 블라디미르 푸틴의 첫 대통령 임기 시절 진실을 추적하는 과정을 그린다. 윤리와 저널리즘, 정치적 용기의 경계에 선 인물들을 통해 ‘올바른 선택’이라는 주제를 파고드는 셰퍼의 시선은 여전히 예리하다. 특히 토니상 2회 수상자인 노버트 레오 버츠와 연출가 다니엘 설리번의 조합은 이 작품의 무게감을 더욱 견고하게 만든다. 시대를 초월한 질문과 현재적 긴장이 교차하는 이 작품은, 한 편의 저널리즘 연극이 가지는 힘을 증명할 것이다.
브로드웨이의 자기반성, <Forbidden Broadway: Merrily We Stole a Song>

게라드 알레산드리니가 만든 <Forbidden Broadway>는 사랑과 비판을 동시에 품은 패러디 무대다. 최신판인 <Merrily We Stole a Song>은 <Hell’s Kitchen>, <The Outsiders>, <Cats: The Jellicle Ball>, <The Great Gatsby> 등 최근의 화제작들을 과감하게 풍자한다. 특히 <Cabaret>의 상징적인 캐릭터 ‘엠씨’의 변천사를 조엘 그레이에서부터 에디 레드메인까지 비틀어 보여주는 장면은 날카롭고도 유쾌하다. 브로드웨이 42번가 끝자락의 Theatre 555에서 공연 중인 이 작품은 마치 연극계 내부자의 수다를 몰래 엿듣는 듯한 쾌감을 선사한다. 때로는 비꼬고, 때로는 찬사하고, 결국은 무대를 사랑하지 않고는 만들 수 없는 진짜 ‘팬심’이 녹아 있다.
오프 브로드웨이는 늘 그랬듯 실험적이고, 독립적이며, 종종 더 솔직하다. 이곳의 무대는 때로 거칠지만, 그 안에 담긴 목소리는 날 것 그대로 관객의 마음을 두드린다. 이번 가을, 브로드웨이의 화려함 너머에 있는 이 무대들을 놓치지 말아야 할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