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팝 아이콘 테일러 스위프트가 런던에 돌아왔다. ‘The Eras Tour’의 유럽 투어를 성대한 피날레로 마무리하기 위해 런던 웸블리 스타디움을 다시 찾은 그녀의 발걸음은, 음악 팬들뿐 아니라 웨스트엔드 뮤지컬 팬들에게도 특별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그래서일까. 테일러의 감정 세계와 그녀의 노래들이 마치 뮤지컬 무대 위 캐릭터들의 서사와 맞닿아 있다는 착각마저 든다. 그리하여 탄생한 기획: 웨스트엔드 무대 위에서 테일러 스위프트의 노래를 가장 ‘현실적으로’ 소화할 수 있을 법한 캐릭터들을 엄선해본다.
Sandy (Greace) – “A Perfectly Good Heart”

산디는 언제나 사랑에 순수한 소녀였다. 하지만 대니 주코와의 관계는 마냥 로맨틱하지만은 않았고, 테일러의 “A Perfectly Good Heart”는 상처받은 마음을 꾹꾹 눌러 담은 소녀의 응답처럼 들린다. 혹은 ‘august’를 떠올려도 좋겠다. 여름의 사랑은 그렇게 흘러갔다.
Éponine (Les Misérables) – “You Belong With Me”

“내가 네 옆에 있었잖아!” 에포닌이 마리우스를 향해 외치고 싶었을 법한 말. 코제트의 그림자 속에서 사랑을 간직한 그녀에게 ‘You Belong With Me’는 절절한 심정을 대변해주는 명곡이다.
Cady Heron (Mean girls) – “Mean”

플라스틱 무리에 복수심에 불타올라 ‘평범한 소녀’에서 ‘전사’로 변한 케이디. 할로윈 파티 이후 그녀의 내면에서 흐르던 건 바로 “Mean”. “왜 그렇게 못되게 굴어야 해?” 테일러의 분노는 케이디의 분노이기도 했다.
Jenna Hunterson (Waitress) – “Everything Has Changed” (feat. Ed Sheeran)

빵 반죽 사이사이 피어나는 사랑의 감정. 닥터 포매터와의 첫 만남은 어쩐지 테일러와 에드 시런의 달달한 듀엣이 배경음악으로 깔리는 듯하다. 모든 게 달라졌다, 제나는 이제 예전의 제나가 아니다.
Bonnie Parker and Clyde Barrow (Bonnie and Clyde) – “Suburban Legends”

우리는 그들을 범죄 커플이라 부르지만, 이들도 어쩌면 평범한 동네 전설이었는지 모른다. ‘Suburban Legends’는 이 전설적인 커플이 만들어낸 시대착오적인 낭만을 노래한다.
Veronica Sawyer (Heathers) – “Look What You Made Me Do”

기존의 자신은 사라지고, 분노로 무장한 새 인물이 등장한다. 베로니카가 벌이는 피의 복수극은 “Look What You Made Me Do” 그 자체. 다 계획이 있었다.
Elphaba (Wicked) – “The Man”

타인의 기대에 맞추기를 거부한 여성. 엘파바는 “The Man”을 통해 외친다. “내가 남자였다면, 이 모든 걸 문제 삼았을까?” 반항이 아닌 자각의 선언이다.
Anne (Half A Sixpence) – “Paper Rings”

앤은 키프스를 사랑했다. 그가 부자가 되기 전에도, 아니 어쩌면 그 전이 더 좋았을지도. “우연은 싫지만, 우리가 친구에서 연인이 된 건 좋아.” – 테일러의 ‘Paper Rings’는 그런 그녀의 이야기를 닮았다.
Angelica Schuyler (Hamilton) – “mirrorball”

항상 반짝이며 주변 사람들을 배려하지만, 정작 자신의 사랑은 내면 깊숙이 감춰둔 여인. ‘mirrorball’은 안젤리카의 외로움과 희생을 감미롭게 비춰낸다.
Roxie Hart (Chicago) – “no body, no crime” (feat. HAIM)

범죄, 연기, 무대 위 허상과 진실. 록시 하트는 “no body, no crime”을 마치 생생하게 증언하는 듯한 인물이다. 팜므파탈을 위한 최고의 트랙.
Elsa (Frozen) – “ivy”

눈처럼 차가운 외피, 그러나 누군가의 온기 앞에서 피어나는 감정. “ivy”는 엘사의 감춰진 열정을 섬세하게 감싸준다. ‘눈 속에 핀 사랑’이라는 말이 있다면, 바로 이 노래가 아닐까.
Evan Hansen (Dear Evan Hansen) – “Anti-Hero”

“문제는 나야, 나야.” 스스로를 반영웅으로 인식하며 끊임없이 자책하는 에반. 그의 내면 독백은 ‘Anti-Hero’를 타고 흐른다. 고등학생의 방황을 이보다 솔직하게 표현한 노래가 또 있을까.
Franklin Shepard (Merrily We Roll Along) – “The Tortured Poets Department”

자기 파괴의 끝을 달리는 예술가. 프랭클린은 ‘The Tortured Poets Department’의 심리적 풍경을 그대로 투영한 인물이다.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혼란의 미로 속에서 그는 오늘도 길을 잃는다.
테일러 스위프트는 수많은 자아와 감정을 노래하는 아티스트다. 그리고 웨스트엔드의 무대 역시, 각기 다른 감정과 서사로 가득한 캐릭터들로 채워진 공간이다.
이번 기획은 단순한 오마주가 아니다. 음악과 극의 경계가 무너지고, 한 명의 아티스트가 세상의 수많은 이야기들과 연결될 수 있다는 가능성의 증명이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mirrorball’이며, 스스로에게는 ‘Anti-Hero’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감정의 이름은, 바로 ‘Taylor Swif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