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연극은 결국 프린지에서 시작된다.” 매해 8월,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는 세계 최대 규모의 예술 축제인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이 열린다. 수천 명의 공연자들이 자신만의 포스터를 들고 직접 거리로 나와 관객을 만나고,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실험적인 작품들을 무대에 올린다. 이곳은 무명의 창작자들에게는 기회의 장이고, 신진 예술가들에게는 무대 경험의 시작이자 새로운 커리어의 발판이 된다.
하지만 프린지는 단순한 ‘등용문’ 그 이상이다. 이 축제는 세계적인 히트작의 산실이기도 하다.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아는 TV 시리즈나 영화들이 사실 이 작은 무대에서 시작됐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이번 기사에서는 스크린에서 대성공을 거둔, 프린지 출신 대표 작품들을 되짚어본다. 이 리스트를 읽고 나면, 아마도 당신은 이미 프린지 공연을 여러 편 본 셈이 될지도 모른다.
<Baby Reindeer> – 리처드 개드의 고백에서 시작된 충격과 위로

2024년 전 세계 넷플릭스 시청자들을 열광시킨 『베이비 레인디어』는 사실 2019년 에든버러 프린지에서 초연된 리처드 개드(Richard Gadd)의 1인극에서 시작되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공연은 그가 실제로 경험한 스토킹 사건을 정면으로 다루며 깊은 반향을 일으켰다.
프린지에서 큰 주목을 받은 이 작품은 이후 런던으로 무대를 옮기고, 웨스트엔드 진출을 앞두고 있었지만 코로나 팬데믹으로 무산되었다. 그러나 이 불운은 예상치 못한 행운이 되었다. 넷플릭스가 TV 시리즈로 제작을 결정했고, 리처드 개드 본인이 각본과 주연을 맡아 더욱 진정성 있는 작품으로 재탄생했다.
공개 직후, ‘마사’ 역의 제시카 거닝(Jessica Gunning)과 나바 마우(Nava Mau) 등 배우들의 열연도 화제가 되며, 바클레이 은행은 넷플릭스 구독 결제 건수가 급증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Fleabag> – 연극이 한 여배우를 스타로 만든 전설

피비 월러 브리지(Phoebe Waller-Bridge)의 이름은 이제 세계적인 스타 반열에 올랐지만, 그 출발은 2013년 프린지 무대에서였다. 그녀는 친구와의 ‘장난 같은 내기’로 1인극 『플리백』을 썼고, 이 작품은 그녀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BBC가 드라마로 제작하면서, <플리백>은 ‘TV 역사상 가장 독창적인 여성 캐릭터’로 평가받았다. 특히 시즌 2에서는 앤드류 스콧(Andrew Scott)이 연기한 ‘핫 프리스트’의 등장으로 전 세계적인 ‘밈’ 열풍을 낳았고, 올리비아 콜맨, 시안 클리포드 등 쟁쟁한 배우들이 가세해 예술성과 대중성을 모두 잡았다.
<Flight of the Conchords> – 프린지에서 HBO까지
2000년대 초, 브렛 맥켄지(Bret McKenzie)와 제메인 클레멘트(Jemaine Clement)는 뮤지컬 코미디 듀오로 프린지에 등장했다. 유쾌하고 기묘한 이들의 음악은 BBC 라디오 시리즈로 이어졌고, 결국 HBO에서 시트콤으로 제작되어 전 세계 팬을 사로잡았다.
그들은 실제의 자신을 희화화한 캐릭터로 뉴욕에서의 음악 인생을 그렸고, 해당 시리즈는 에미상에 노미네이트되는 성과까지 올렸다.
<The League of Gentlemen> – 공포와 코미디의 절묘한 조합
마크 게티스(Mark Gatiss), 스티브 펨버튼(Steve Pemberton), 리스 시어스미스(Reece Shearsmith), 제레미 다이슨(Jeremy Dyson)으로 구성된 이 팀은 런던에서 결성됐지만, 프린지 무대에서 본격적으로 꽃을 피웠다.
그들의 블랙코미디는 관객과 평단 모두에게 호평을 받았고, 이후 라디오, 그리고 TV 시리즈로 확장됐다. 이후 『셜록』과 『인사이드 넘버 9』 등에서 보여주는 그들의 유머는 여전히 강력하다.
<The Mighty Boosh> – 초현실적 코미디의 시작
90년대 말, 노엘 필딩(Noel Fielding)과 줄리언 바라트(Julian Barratt)는 프린지 무대에서 ‘마이티 부시’라는 작품을 선보였다. 두 편의 연속된 프린지 공연과 런던 레지던시 이후, 라디오 시리즈로 발전했고, 이내 TV 시리즈로 자리 잡았다.
최근 몇 년간 넷플릭스에서는 인종차별적 요소로 인해 해당 프로그램이 삭제되기도 했지만, 프린지 출신 코미디의 영향력은 여전히 막강하다.
<SIX> – 여섯 여왕이 만든 뮤지컬 혁명

헨리 8세의 여섯 왕비들이 마이크를 잡고 현대 팝 콘서트 형식으로 인생을 노래하는 뮤지컬 <식스>는 2017년 프린지에서 처음 선보였다. 루시 모스(Lucy Moss)와 토비 말로(Toby Marlow)가 공동 창작한 이 작품은 이후 세계적인 흥행을 거듭했다.
최근에는 원년 멤버들이 출연한 공연 실황이 극장판으로 개봉되었고, 이 영상은 영국 박스오피스 기록을 새로 쓸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Rosencrantz and Guildenstern Are Dead> – 셰익스피어의 변주가 영화로

톰 스토파드(Tom Stoppard)의 명작 <Rosencrantz and Guildenstern Are Dead>는 셰익스피어 <햄릿>의 조연 두 명을 주인공으로 삼아 존재와 운명을 탐구하는 작품이다. 프린지에서 초연된 이후 런던, 뉴욕, 시드니를 거쳐 1990년 영화로도 제작되었고, 게리 올드만과 팀 로스가 주연을 맡았다.
이 작품은 스토파드의 유일한 영화 연출작으로도 기록된다.
Taskmaster – 게임처럼 웃긴 예능의 시작
2010년, 알렉스 혼(Alex Horne)은 20명의 코미디언에게 1년 동안 매달 과제를 이메일로 전송하고, 이를 실황 공연으로 풀어낸 ‘태스크마스터’를 프린지에서 처음 공개했다. 이후 이 콘셉트는 채널 Dave에서 방송을 시작, 지금까지 19개의 시즌이 방영되었고, 세계 각국으로 포맷 수출까지 이어졌다.
Weather Girl – 넥스트 넷플릭스 히트작?

아직 ‘히트작’이라고 부르기엔 이르지만, <베이비 레인디어>와 <플리백>을 만든 제작자 프란체스카 무디(Francesca Moody)가 제작한 또 하나의 프린지 작품 『웨더 걸』이 차세대 기대작으로 주목받고 있다. 줄리아 맥더못(Julia McDermott)이 미국 캘리포니아의 일기예보 캐스터 ‘스테이시’를 연기한 이 작품은 넷플릭스가 이미 한정 시리즈로 제작을 확정지었다.
‘프린지’는 무대 그 이상이다
이처럼 에든버러 프린지는 단순한 신인 예술가의 놀이터를 넘어, 스크린의 흥행작과 세계적 스타들의 출발점이 되어왔다. 한정된 무대, 작은 조명, 낮은 예산 속에서도 최고의 이야기가 탄생하고, 그 이야기는 수백만 관객을 향해 뻗어나간다.
올해 프린지도 곧 막을 올린다. 어쩌면 다음 ‘베이비 레인디어’는 이미 포스터를 붙이고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