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말, 유미주의(Aestheticism) 문학의 선구자 오스카 와일드가 남긴 불멸의 소설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The Picture of Dorian Gray)’. 시대를 초월하여 인간의 욕망, 아름다움과 타락, 그리고 예술의 본질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담아낸 이 작품이 2026년,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새로운 뮤지컬로 관객들을 만날 준비를 하고 있다.
창작자들의 영감을 불러 일으키는 ‘도리안 그레이’와 ‘오스카 와일드’
오스카 와일드와 그의 작품, 특히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은 1세기가 훌쩍 지난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창작자들에게 끊임없는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다. 왜 창작자들은 오스카 와일드에 매료되는 것일까?
첫째, ‘예술을 위한 예술’을 표방한 유미주의 사상과 그 중심에 서 있던 오스카 와일드 자신의 드라마틱한 삶이 창작 욕구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그는 뛰어난 재치와 화려한 언변으로 19세기 말 영국 사교계의 아이콘으로 떠올랐지만, 동성애 스캔들로 인해 한순간에 명예를 잃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예술과 현실의 경계에서 자유를 갈망했던 그의 삶은 그 자체로 한 편의 비극과도 같았고, 이는 다양한 해석과 재창조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둘째,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이 담고 있는 보편적인 주제의 깊이다. 영원한 젊음과 아름다움을 향한 인간의 끝없는 욕망, 쾌락과 타락의 경계에서 고뇌하는 인간의 이중적인 모습, 그리고 예술과 도덕의 관계에 대한 철학적인 질문들은 시대와 국경을 넘어 모든 이에게 깊은 공감과 성찰을 안겨준다.
셋째, 오스카 와일드 특유의 화려하고 시적인 문체와 감각적인 표현력이다. 그의 글은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생생한 이미지를 그려내며, 독자들을 매혹적인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이러한 문학적 아름다움은 음악, 무대, 의상 등 다양한 시청각적 요소와 결합되었을 때 더욱 강력한 시너지를 발휘하며, 뮤지컬이라는 장르에 특히 매력적인 소재가 된다.
한국 뮤지컬계의 ‘도리안 그레이’와 ‘오스카 와일드’
한국에서도 오스카 와일드와 ‘도리안 그레이’를 소재로 한 창작 뮤지컬이 큰 사랑을 받았다. 뮤지컬 ‘도리안 그레이’는 원작 소설을 각색하여 영원한 아름다움을 위해 영혼을 팔아넘긴 청년 도리안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화려하고 웅장한 음악과 무대로 그려냈다. 2016년 초연에서는 김준수, 박은태 등 실력파 배우들의 열연과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해석된 캐릭터들은 관객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또한 올해 봄 각색을 거쳐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대극장에서 재공연을 올렸다. 초연에 배질 홀워드로 출연했던 최재웅이 헨리 워튼으로 배역을 변경하여 돌아왔고, 그 외에는 유현석, 윤소호, 재윤, 문유강, 김재범, 김경수, 손유동, 김지철, 김준영 등 새로 작품에 합류했다.
반면, 뮤지컬 ‘와일드 그레이’는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을 집필하던 작가 오스카 와일드의 삶에 초점을 맞춘다. 작품은 오스카 와일드와 그의 연인 알프레드 더글라스, 그리고 친구 로버트 로스, 세 사람의 관계를 통해 예술과 현실 사이에서 고뇌하는 예술가의 모습을 섬세하게 그려냈다. ‘도리안 그레이’라는 소설 속 인물이 아닌, 그 소설을 탄생시킨 작가의 삶을 조명하며 또 다른 깊이의 감동을 선사했다. 뮤지컬 ‘와일드 그레이’는 2021년 초연을 시작으로 2023년 재연을 상영했으며, 현재 대학로 링크아트센터 벅스홀에서 삼연을 공연중에 있다.
두 작품은 같은 뿌리에서 시작되었지만, 각기 다른 시선으로 원작을 재해석하며 한국 뮤지컬 팬들에게 ‘오스카 와일드’라는 인물과 그의 작품이 가진 다채로운 매력을 선보였다.
웨스트엔드와 브로드웨이의 ‘도리안 그레이’
‘도리안 그레이’는 영미권 공연계에서도 꾸준히 무대화되었다. 최근 가장 주목받았던 작품은 호주 시드니 씨어터 컴퍼니가 제작하고 킵 윌리엄스(Kip Williams)가 연출한 연극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이다. 이 작품은 2024년~2025년 영국과 미국에서 1인극 형식으로 상영됐다. HBO 드라마 ‘석세션’으로 유명한 배우 사라 스누크(Sarah Snook)가 1인 26역을 소화하는 혁신적인 연출과 라이브 비디오 기술을 활용하여 원작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는 극찬을 받으며 웨스트엔드와 브로드웨이에서 큰 성공을 거뒀다.
또한, 2024년 런던의 사우스워크 플레이하우스에서는 ‘도리안: 더 뮤지컬(DORIAN: The Musical)’이라는 제목의 새로운 뮤지컬이 공연되었다. 이 작품은 원작을 21세기로 옮겨와 소셜 미디어 시대의 명성과 젊음, 불멸에 대한 이야기를 글램록 스타일의 음악으로 풀어내며 젊은 관객들의 호응을 얻었다.
2026년 새롭게 탄생할 뮤지컬 ‘도리안 그레이’는 ‘원 나잇 인 더블린(One Night in Dublin)’과 같은 주크박스 뮤지컬로 실력을 인정받은 작곡가 겸 작사가 마크 J. 미들미스(Mark J. Middlemiss)가 극본과 음악을 맡았다. 그는 1970년대와 80년대에 유행했던 오페라 형식의 뮤지컬에서 영감을 받아, 대사 없이 노래로만 극을 이끌어가는 ‘성스루(sung-through)’ 형식으로 작품을 구성했다. 웅장하고 어두운 오페라 풍의 선율과 강력한 앙상블의 보컬, 그리고 서곡(overture)이 더해져 원작 소설이 가진 강렬하고 매혹적인 분위기를 무대 위에 완벽하게 구현해낼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제작진은 작품의 첫 번째 음원인 ‘모든 그림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Every Picture Tells a Story)’를 선공개하며 뮤지컬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높였다. 배우 토마스 휴잇(Thomas Hewitt)이 부른 이 곡은 작품의 핵심적인 주제를 암시하며, 앞으로 공개될 전체 콘셉트 앨범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낸다. 전체 앨범은 오는 9월 발매될 예정이다.
마크 J. 미들미스의 손에서 새롭게 태어날 뮤지컬 ‘도리안 그레이’는 또 어떤 새로운 해석과 연출로 탄생하게 될 것인지 추측해 보는 것도 재미날 듯 하다. 시대를 관통하는 오스카 와일드의 통찰력과 아름다움이 깃든 이 매혹적인 이야기가 런던의 무대를 넘어 전 세계 관객들의 마음을 다시 한번 사로잡을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