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데?”
처음 뮤지컬 레드북을 보았을 때 느낀 감상이다. 뮤지컬 레드북을 보고 있으면 3~40년대 뮤지컬 영화 전성기의 익숙한 향기가 느껴진다. ‘빙 크로스비’와 ‘프랭크 시나트라’가 튀어나올 것 같은 동화같은 세트와, 높은 수준의 댄스와 노래를 선보이는 앙상블들. 지극히도 뮤지컬다운 넘버들과 다소 과장되었지만 센스 넘치는 감초들까지.
게다가 스토리는 어떠한가.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을 배경으로 소설가를 꿈꾸는 타이피스트인 여자주인공과, 고지식한 상류층 신사인 남자주인공의 사랑이야기라니. 할리퀸 소설의 정석과도 같은 캐릭터 설정까지 얹어 냈다. 자신의 이력서와 작은 여행가방을 들고 등장하는 여자 주인공의 모습을 시작으로 어디서 보았던 것 같은 이미지들이 넘쳐나지만, 익숙하기 짝이 없는 클래식 덩어리의 이 뮤지컬의 핵심은 전혀 다르다.
이 뮤지컬의 중심에서 노래하는 여자주인공 ‘안나’가 그 핵심이다. ‘아가씨와 건달들’의 ‘진 시몬스’나 ‘싱잉 인 더 레인’의 ‘데비 레이놀즈’와는 조금? 아니 많이 다른 ‘안나’. ‘안나’의 당찬 모습은 그녀들과 꽤 비슷하지만, 슬픔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야한상상을 하는 별난 여인이다.
약혼자에게 옛연인과의 첫경험을 고백하고 집에 쫓겨나 도시로 나온 ‘안나’에게 야한 상상은 현실을 잊고 ‘나를 나답게’ 만들어 주는 매개체이다. ‘안나’는 여자도 남자처럼 혼자 살아갈 수 있으며, 자신의 욕망에 솔직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녀의 시대를 앞서 간 가치관과 성격 탓에 남자와 싸우다 경찰서에 갇히게 되고. 그런 그녀에게 옛날에 하녀일을 하며 자신이 모시던 귀부인 ‘바이올렛’의 손자이자 변호사인 ‘브라운’이 ‘바이올렛’이 남긴 유산을 들고 찾아온다. 그녀는 브라운에게 금세 빠져들지만, ‘브라운’은 그녀를 떼어내고 싶어하고. ‘브라운’의 의심스러운(?) 권유에 껌뻑 넘어가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는 소설가를 꿈꾸게 된 안나는 여자들만이 글을 쓰는 문학회 ‘로렐라이의 언덕’에 들어가 잡지 ‘레드북’에 자신의 야릇하지만 순수한 경험담을 소설로 써서 기고하게 된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안나’. 그녀가 구치소에서 죽은 연인과의 야릇한 추억을 떠올리며 아우우 하고 ‘올빼미’를 부를 때는 나도 모르게 그녀와 멀찍하게 거리를 두게 되지만, 발랄하고 통통 튀는 안나의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그녀의 사랑스러움에 푹 빠져 그녀를 응원하게 된다.
통상의 남자 주인공이라면 주인공을 구해주는 왕자님이어야 할 것 같은 ‘완벽한 상류층 신사 브라운’은 남다른 ‘안나’의 매력에 점점 빠져들다가도 자신이 가지고 있던 ‘보수적인’ 사고방식에 부딪쳐 반목하지만, 결국 그녀를 이해하고 지지해준다.
이렇게 현명할 수 있을까싶다. 지극히 보수적이던 빅토리아 시대, ‘욕망’을 이야기 하고, ‘욕망’이라는 자극적인 소재로 ‘나’에 대해 이야기 하는 ‘여성’의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작가와 연출은 그 기반을 보수적일정도로 클래식하게 다졌다. 그렇기에 ‘안나’가 마주한 ‘현실’이 더욱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즐거운 노래에, 재치 넘치는 연출과 훌륭한 연기. 좋은 텍스트에 취해 한없이 즐겁게 보다가도 극의 클라이막스에서 ‘안나’가 자신이 쓴 ‘레드북’을 읽기 위해 글을 익히는 거지 여인 ‘클로이’와 재회하는 장면에서는 꼭 주인공들을 행복하게 해달라는 ‘클로이’의 외침이 작가로 인정받기 위해 고군분투한 ‘안나’에게 찾아온 모두의 응원같기도 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맺힌다.
그리고 이 공연의 중심인 ‘안나’를 박진주는 뮤지컬 첫 데뷔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만큼 완벽하고 사랑스럽게 표현해 냈다. 이미 많은 예능과 영화 등에서 보여준 그녀의 노래실력은 뮤지컬 무대 위에서도 빛을 발한다. 연기는 두 말할 것도 없다. 뮤지컬 배우가 꿈이었다던 그녀는 아주 물만난 인어처럼 빅토리아 시대의 런던을 누빈다. 그런 그녀를 든든하게 뒷받침 해주는 것이 ‘브라운’역의 송원근. 이번 시즌으로 두번째 ‘브라운’을 연기하는 송원근은 고직식하면서도 어딘가 어설퍼서 더욱 귀여운 ‘브라운’이 되어 ‘안나’와의 로맨스에 푹 빠지게 만든다.
두 사람의 귀여운 로맨스부터 벅찬 변화까지 즐길 수 있는 뮤지컬 ‘레드북’은 5월 28일까지, 대학로 홍익대학교 아트 센터 대극장에서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