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대를 관통해 또 다른 질문을 던지는 고전의 힘
– 질투·욕망·세대 갈등·인종차별 등 현재와도 맞닿은 주제 다뤄
■ 세계가 주목하는 연출가들의 눈으로 새롭게 비상하는 고전
– 끝없이 반복되는 비극에 대한 단상, 영국 NT Live 클린트 다이어의 <오셀로>
– 21세기로 건너온 메디아의 처절한 몸부림, 네덜란드 ITA Live 사이먼 스톤의 <메디아>
– 꿈을 향해 날개짓 하는 날지 못하는 새 이야기, 영국 NT Live 제이미 로이드의 <갈매기>
국립극장(극장장 박인건)은 해외 유수 공연을 영상으로 소개하는 <엔톡 라이브 플러스(NTOK Live+)>를 11월 17일(금)부터 26일(일)까지 달오름극장에서 상영한다. <엔톡 라이브 플러스>는 유럽 공연 트렌드를 선도하는 최신 화제작을 고품질 영상으로 선보이며, 생생하게 현장의 감동을 전한다. 국립극장은 2014년 영국 국립극장의 ‘엔티 라이브(NT Live)’를 시작으로, 2021년 프랑스 코메디 프랑세즈의 ‘파테 라이브(Pathé Live)’, 네덜란드 인터내셔널시어터 암스테르담의 ‘이타 라이브(ITA Live)’까지 다채로운 작품을 엄선해 선보이고 있다.
11월 상영작은 엔티 라이브 <오셀로(Othello)> <갈매기(The Seagull)>와 이타 라이브 <메디아(Medea)>다. 세 작품 모두 국내에서 최초로 상영되는 신작이다. 각각 윌리엄 셰익스피어·안톤 체호프·에우리피데스의 고전을 현재 유럽에서 가장 각광받는 연출가들이 독창적 시각으로 재해석한다. 사랑·질투·욕망 등 인간 본성과 인종차별·가정폭력 등 현대 사회와도 맞닿은 주제를 통해 고전이 지닌 통찰력과 동시대적 의미를 짚어본다.
11월 17일, 22일, 25일 – 엔티 라이브 <오셀로>
엔티 라이브 <오셀로>는 2022년 11월 영국 국립극장에서 초연한 최신작이다. 셰익스피어의 동명 희곡을 원작으로, 영국 국립극장 부예술감독 클린트 다이어가 연출을 맡아 현대적인 감각을 더했다.
영국 더 타임스가 “영국 국립극장의 비밀 병기”라고 평가한 클린트 다이어는 배우이자 작가·연출가 등 다방면으로 활동하는 예술가다. 또한 영국 국립극장에서 <오셀로>를 연출한 최초의 흑인 연출가로도 화제를 모았다.
공연은 영국 국립극장의 1965년 작품(흑인으로 분장한 백인이 오셀로를 연기했다)을 비롯한 다양한 <오셀로>를 무대에 투사하며, 과거 작품에 담긴 모순와 차별을 환기하며 막을 연다. 클린트 다이어는 당시 오셀로가 처한 인종차별 현장을 직관적으로 볼 수 있도록, 오셀로 역만 유일하게 흑인 배우로 캐스팅했다. 인종차별적인 요소를 배제한 ‘블라인드 캐스팅’이 주가 된 영국 국립극장의 타 작품들과 비교해 볼 때 그의 의도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2018년 <해밀턴>으로 올리비에 어워즈 뮤지컬부문 남우주연상을 받은 자일스 테레라가 내면의 열등감으로 비참한 최후를 향해 가는 오셀로를 탁월하게 연기하며 그 진가를 발휘한다.
한편, <오셀로>에서 주목할 점은 데스데모나에게 사회운동가의 면모를 담아 주체성을 강조한 것과 또 다른 가정폭력의 피해자이기도 한 이아고의 아내, 에멜리아의 저항적 몸부림이다. 원작이 가진 서사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작품은 이들을 통해 질투에 눈먼 남성의 이야기에 가려졌던 가정폭력으로 고통받는 여성의 모습을 강조함으로써 고전에 새로운 관점을 더했다. 영국 가디언지는 이에 대해 평점 별 4개와 함께 “클린트 다이어가 만들어 낸, 완벽히 새로운 느낌의 비극”이라 호평했다.
현대적이고 심플한 무대, 강렬한 조명은 긴장감을 자아내고, 무대 뒤 계단에 자리한 앙상블을 통해 차별과 혐오를 방관하는 우리 사회 모습을 비춘다. 영화 <말리피센트> 등에서 안무가로 활약한 루시 팽크허스트의 안무와 벤자민 그랜트의 웅장하면서도 서늘한 음악은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선명하고 독창적으로 전달한다. 광기 어린 욕망과 질투, 인간 내면의 추악한 면모를 깊이 있게 건드리는 연극 <오셀로>는 11월 17일, 22일, 25일 총 3회 상영한다.
11월 18일, 21일, 24일 – 이타 라이브 <메디아>
이타 라이브 <메디아>는 세계적 연출가 사이먼 스톤과 인터내셔널 시어터 암스테르담의 첫 협업으로 화제를 모은 작품이다. 2014년 초연 당시 “세계 정상급 연극. 일급 각색, 최상의 연출가, 최고의 연기. 절묘하고 통렬하고 대담하다”(스테이지) “완벽한 연기로 생생한 걸작을 창조했다”(가디언)와 같은 호평이 쏟아졌다. 이후 영국 바비컨센터(2019)·뉴욕 브루클린음악원(BAM)(2020) 등 세계무대에서 새로운 캐스팅과 언어로 현지 관객을 만났으며, 2024년 ITA에서 재공연을 앞두는 등 여전히 주목받고 있는 공연이다. 국립극장 <엔톡 라이브 플러스>에서는 2020년 ITA 공연 버전을 국내 최초로 상영한다.
극본과 연출을 맡은 사이먼 스톤은 엔티 라이브 <예르마>, 이타 라이브 <입센의 집>으로 국내 관객에게도 익숙한 연출가로 고전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데 탁월하다고 평가받는다. <메디아>에서 사이먼 스톤은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이 오늘날에는 어떤 모습일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현시대로 신화 속 메디아를 소환한다.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성이 자신의 아이를 살해한다는 동명 원작의 큰 틀은 유지하되, 시대적 배경을 현대로 옮겨와 완전히 새로운 현대적 비극을 만든다. 극본은 물론 무대 연출에서도 그만의 독창성과 실험적인 면모를 뚜렷이 살펴볼 수 있다. 극 중 아들의 카메라를 통해 투영되며 확대된 인물들의 표정과 새하얀 무대를 채우며 비처럼 쏟아지는 잿가루는 극적 긴장감을 배가시킨다.
사이먼 스톤은 고전 속 메디아, 그리고 1995년 미국에서 방화로 자신의 두 아이를 살해하고 남편을 독살한 여의사 데보라 그린의 실화를 엮어 현재의 아나라는 인물을 탄생시켰다. 의사로서 성공한 삶을 살던 아나는 남편 뤼카스의 불륜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지경에 이르고, 무너져 버린 커리어와 가정에 절망해 급기야 집에 불을 지른다. 단순히 질투에 사로잡힌 한 여자의 분노가 아닌, 사회적 존재로서 한순간에 의미를 상실한 절망적 상황에 초점을 맞춰 현재와 맞닿은 여성 문제를 조명한다.
배우들의 흡입력 있는 연기도 주목할 만하다. 극 중 주인공 아나 역을 연기한 마리커 헤이빙크는 이 작품으로 2015년 네덜란드연기상(Theo D’Or)을 받았다. 신화 속 이야기를 동시대적으로 풀어내며 날카롭게 풍자하는 <메디아>는 11월 18일, 21일, 24일 총 3회 상영한다.
11월 18일, 23일, 26일 – 엔티 라이브 <갈매기>
엔티 라이브 <갈매기>는 러시아 대문호 안톤 체호프의 동명 원작을 극작가 애니아 라이스가 21세기를 배경으로 각색하고, 제이미 로이드가 연출해 2022년 초연한 작품이다. 초연 후 영국 언론사 디아이(The i)로부터 “제이미 로이드의 탁월한 재해석이 돋보인다. 배우들의 눈부신 연기력으로 완성된 작품”이라고 극찬받았다.
안톤 체호프의 4대 장막극 중 하나인 「갈매기」는 젊은 예술가들의 비극적 사랑에 대한 희곡이자 관습에 찌든 당시 연극계를 비판하는 작가의 자전적 고뇌가 담긴 고전이다. 체호프의 다른 극들처럼 일상적인 사건과 평범한 대화 속에 인물의 심리적 갈등과 긴장감으로 담아내며 담담하게 사건을 이어간다. 사실주의 연극의 교과서답게 무대·의상·소품 하나하나를 극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공연이 주를 이뤄왔던 것도 특징이다.
연출을 맡은 제이미 로이드는 전작 <시라노 드베르주라크>(2019)에서처럼 시각적 장치를 비우고 배우들이 내뱉은 대사와 감정 연기에 초점을 맞췄다. 어떠한 시대적 장치나 소품·의상 없이, 의자와 배우로만 채워진 무대에는 1부와 2부를 나누는 조명과 미미한 변화만이 존재한다. 베케트 극을 연상시킨다고 이야기될 정도로 작품은 배우의 대사만으로 관객의 몰입과 상상력을 자극한다. 배우들은 연기가 끝나도 무대 위에 그대로 남아 서로의 관객이 되어 준다. 모든 이야기를 배우의 감정 표현과 대사로만 전달함으로써 작품은 좌절된 현실을 더욱 담담하게 그려낸다.
19세기 말 러시아에서 21세기 영국의 한 시골 마을로 배경을 옮겨와 현대적 요소를 더한 각색은 극작가 애니아 라이스의 재치와 유머로 완성됐다. 애니아 라이스는 2010년, 17세의 어린 나이에 연극 <충동(Spur-of-the-moment)>으로 영국 연극계의 호평을 받으며 데뷔한 극작가다. 젊은 예술가들의 열정과 엇갈린 사랑, 현실과 꿈의 간극을 그린 작품에 우리 시대의 분열, 슬픔 그리고 희망의 메시지를 담아낸다. 미국 HBO 시리즈 <왕좌의 게임>과 영화 <미 비포 유> 등 다수의 작품에서 연기력을 인정받은 에밀리아 클라크의 웨스트엔드 데뷔작으로, 니나가 되어 섬세한 감정 표현을 선보이는 그녀의 깊은 내공이 눈길을 끈다. 비극적 사랑, 처절한 갈등을 통해 인간의 존재 이유와 삶의 가치를 찾아가는 <갈매기>는 11월 19일, 23일, 26일 총 3회 상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