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에서 모든 것을 쏟아내는 배우. ‘최석진’의 공연을 보았을 때 느꼈던 소감이었다. 무대 위라는 허구의 공간에서 누구보다도 생생하게 살아 날뛰며 자신의 에너지를 발산하는 모습은 눈길을 잡아끌었다.
그런 최석진이 연극 ‘킬롤로지’의 ‘데이비’ 역으로 무대에 선다. ‘킬롤로지’를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너무나도 잘 어울리기에, 또 너무나도 궁금해졌다. 얼핏 자연스럽게 그림이 그려지다가도, 금세 흐려졌다. 최석진의 ‘데이비’는 어떤 ‘데이비’일까?
다양한 궁금증을 안고 8월 말, 서울 모처의 한 스튜디오에서 최석진을 만나 인터뷰를 가졌다.
떨어진 줄 알았던 데뷔작의 오디션. 그만큼 최선을 다했기에 더 보여주고 싶었던 무대
본인이 수차례 밝혔듯이 어린 시절 그의 꿈은 작가였다. 그런 최석진이 작가로 들어갔던 고등학교 동아리에서 배우의 입장을 알기 위해 연기를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유독 흥미를 끌었다.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배우를 꿈꾸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고등학교 때 연극 동아리에 작가로 들어갔었거든요. 그때 누나가 공부를 하라고 뮤지컬 그리스를 예매해 줬었어요. 그때 처음으로 ‘나도 뭔가 무대에 서는 걸 해보고 싶다’라는 생각으로 바뀌었던 것 같아요.”
그리스를 보며 배우를 꿈꾸게 된 최석진의 데뷔작은 뮤지컬 ‘너에게 빛의 속도로 간다’의 2015년 초연. 실질적인 데뷔작은 2011년에 공연했던 뮤지컬 ‘연탄길’이지만, 두 작품 사이에 4년간의 공백기가 있기에 본인 스스로가 ‘너에게 빛의 속도로 간다’를 데뷔작으로 꼽는다. 4년 만의 오디션 합격이라니 당시의 기분을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제가 완전히 오디션을 못 봤어요. 제 기억에 월요일날 오전 9시 반인가? 비공개 오디션이었고. 당시에 제가 주말 편의점 야간 알바였거든요. 그때 집이 인천이었으니까 사장님께 1시간 일찍 퇴근하겠다 부탁드렸어요. 원래 8시에 퇴근이었는데, 1시간 빨리 퇴근해서 아침 7시에 준비하고 갔는데…, 뭐, 목도 안 나오고. 지금도 그렇지만 노래도 엄청 잘하지도 못했고. 그때 끝났다고 생각했어요.”
오디션을 망쳤으니 ‘떨어졌다’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예상과는 반대로 창작진들은 그를 점찍었다.
“다행히 크리에이티브 팀 스태프들이 좀 좋아해 주셨어요. 왜냐하면 어린 남자애가 없었거든요. 다 이제 너무 잘생기고 그런 형들이었는데, 약간 ‘애 같은 느낌의 한 명의 배우가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을 하셨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운이 좋게 됐죠. 그때 기분이 너무 좋았던 것 같아요.”
어렵게 잡은 기회이기도 했지만 최석진이 맡은 ‘창수’는 쉬운 역이 아니었다. ‘멀티’로서 밝고 코믹한 캐릭터들을 다양하게 소화하는 한편, 어두운 드라마를 지닌 데다 몸이 불편한 ‘창수’도 제대로 연기해야 했다. 게다가 4년 만의 현장은 또 어땠을까. 이 질문에 최석진은 ‘개인적인 생각’이라고 강조하며 대답했다.
“힘들고 낯선 부분들이 너무 많은데, 그래도 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더군다나 그때 당시에 저는 이게 마지막이라고 생각을 했었어요. 정말 배우가 될지 안 될지를 고민을 하고 있었던 시기였거든요. 그래서 마지막으로 한번 해보자, 대신에 내가 최선을 다해서 한번 해보자 (생각했어요). 그래서 뭐, 당연히 낯선 환경이고 그런 것보다도 어떻게 하면 최선을 다할까를 먼저 생각을 했었어서 (낯선 환경이) 눈에 잘 안 들어왔어요.”
‘너에게 빛의 속도로 간다’의 창작진들도 최선을 다하는 그를 응원해 주었다고 한다. 그랬기에 일주일의 짧은 창작산실 공연 후, 본공연까지의 4개월간의 기다림도 불안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보여주고 싶었다.
“방금 말씀드렸다시피, 내가 배우라는 길이 맞을까 아닐까를 고민하던 시기였는데 그때 ‘너에게 빛의 속도로 간다’를 했던 모든 형들, 그리고 스태프 분들도 그렇고 저를 다 너무 예뻐해 주셨어요.
그리고 개인적으로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는 분이, 지금도 자주 연락 드리지만 당시 음악감독이셨던 김은영 연출님이 저를 되게 예뻐해 주셨어요. 저는 어쨌든 데뷔작이나 다름없었고, 몇 작품도 아니고 두 번째 작품에 4년 만에 하는 첫 작품이고, 조연이었어요. 그런 제가 혼자 고민에 빠지거나 그러면 항상 먼저 와주셔서 막 등 두드려 주시면서, ‘너 왜 이렇게 잘해.’ 이렇게 하면서, 좋은 말씀을 되게 많이 해주셨어요. ‘계속해. 나 너 계속 봤으면 좋겠어.’ 막 이런 식으로요. 되게 많이 치어업을 해주셨어요.
그래서 그때 그 기다리는 기간이, 본공연까지 올라가는 그 기간 동안 더 보여주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의욕이 생기고.”
꿈인가 싶었던 ‘트레이스 유’
데뷔작이었던 ‘너의 빛의 속도로 간다’ 이후, 최석진은 차근차근 필모를 쌓아간다. 그리고 2018년에 뮤지컬 ‘트레이스 유’에 ‘구본하’역으로 출연하게 된다. ‘트레이스 유’는 2012년 초연 이후 여러 차례 재연을 하며 탄탄한 마니아층을 보유하고 있는 작품. 그 ‘트레이스 유’에 출연이 결정되었을 때의 소감은 어땠을까.
“제가 계약을 한 순간이라거나 제의가 들어온 순간들을 보통 다 기억하거든요. ‘트레이스 유’는 유독 그 장소와 그 모든 것들이 다 기억나는 것 같아요. 이제 오디션을 본 뒤에 밤에 대표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제가 그때 해방촌에 살 때였는데 소월길을 걷고 있었거든요. 전화로 같이 작품을 하자라고 들었죠. 집에 들어가서 울고 그러지는 않았어요. 그냥 ‘어쩌면 이게 내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작품이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실제로 그걸로 인해서 인생이 바뀌었죠.”
그 말대로 최석진은 ‘트레이스 유’로 큰 사랑을 받았다. 최석진은 자신에게 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과감하게 다양한 엔딩을 선보이기도 해 공연을 본 관객들이 다시 공연장을 찾게 만들었다. 당시 시도했던 다양한 결말들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이 있냐는 질문에 최석진은 오히려 “신경을 안쓰려고 한다.”라고 대답했다.
“스스로 ‘오늘 미쳤다’라고 생각하면 다음 공연 때 자극만 있게 돼요. 그러니까 알맹이는 없고 어떻게든 자극적인 거. 속된 말로 정작 ‘트레이스 유’에서 ‘본하’라는 인물이 보여줘야 될 것, 표현해야 될 것들은 다 놓치고 그냥 자극만, 어떻게 결말만 꼬아서 이렇게 (하는 거죠). (그걸) 구분해 내는 능력이 그때 당시에 없었어요. 그래서 그날 공연이 끝나면 그냥 다 잊어버리기로 했던 것 같아요.”
당시의 무대에서 경험한 것을 살려 다음 단계로 건강하게 나아 갔어야 했다고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트레이스 유’ 이후 최석진은 많은 작품에 출연했다. 참여했던 작품들 중에 특별히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는지를 질문하자 최석진은 “다 기억에 남는다”며, “너무 사랑했으면 너무 사랑했던 만큼 기억이 나고. 힘들었으면 너무 힘들었던 만큼 기억이 나고. 아쉬웠으면 너무 아쉬웠던 만큼 다 기억에 남는 것 같아요.”고 말했다.
그렇다면 같은 작품에 다른 배역으로 출연한 경우는 어땠을지 궁금했다. 그의 다양한 필모그래피 중에 유일하게 다른 배역을 연기했던 것이 뮤지컬 ‘블랙메리포핀스’였다. 처음 출연했을 때는 막내인 ‘요나스’ 역할로, 그다음 앵콜 시즌에는 둘째인 ‘헤르만’ 역할로 공연에 참여했다. 이에 대해 최석진은 매년 자신이 세웠던 계획에 대해 이야기했다.
“저는 늘 매년 계획을 세워놨거든요. 20년도의 목표와 21년도의 목표가 달랐어요. 20년도에 세웠던 목표는 한 작품이라도 더 출연하자였다면 21년도에 세웠던 목표는 ‘어리게 표현될 수 있는 캐릭터를 조금 피해 보자. 소년에서 청년으로 넘어가는 그 과도기의 캐릭터를 해보자’가 목표였어요. 그렇게 고민을 하던 중에 연출님이랑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데 연출님이 ‘헤르만’도 그런 지점에서 충분히 네가 표현을 할 수 있지 않겠냐라는 얘기를 해주셔서 했던 것 같아요. “
하지만 첫 무대에서는 살짝 후회하기도 했다고.
“제가 무대에 처음 등장하는 순간에 보통 아무 생각을 안 하거든요. 근데 ‘블랙메리포핀스’가 유일했던 것 같아요. 처음 딱 무대에 올라가자마자 ‘내가 이걸 왜 한다고 했지’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캐릭터로서 연기하기 버거운 그런 느낌은 아니었어요. 런 돌고 했을 때는 문제가 전혀 없었으니까. 근데 이제 무대에 올라서 객석을 딱 쳐다보는데 ‘내 욕심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이게 ‘내가 원한 걸까. 이 사람들(관객들)이 원한 걸까’. ‘내 욕심 때문에 이 사람들(관객들)이 어쩌면 보기 싫은 걸 억지로 봐야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그때 딱 들었던 것 같아요.”
최석진은 그만큼 열심히 연기했다. 그런 그에게 혹시 참여했던 공연 중에서 본인이 연기했던 배역 외에 도전해 보고 싶은 다른 배역이 있는지 물어보자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나이 먹은 다음에 ‘몰리나’를 해보고 싶어요. ‘거미여인의 키스’. 나이가 좀 중후하게 먹은 다음에요. 지금의 제가 하기에는 그런 깊이들을 잘 표현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 좀 더 나이가 먹고 사람 자체에 깊이가 생긴 다음에, 좀 깊이 있게 표현해 보고 싶다라는 생각은 있는 것 같아요. “
팬들에게 가장 먼저 들려주고 싶었던 ‘노래’
얼마 전 그의 팬들에게는 반가운 소식이 있었다. 최석진이 오랜만에 콘서트에 참여한다는 것. 지난 23년, 갑작스러운 건강 악화로 잠시 무대를 떠났던 그는 복귀 후에도 연극작품에만 참여했었다. 오랜만에 팬들 앞에 노래를 선보이는 자리. 스스로도 설레고 떨린다고.
“너무 설레기도 하고 떨리기도 하고. 그리고, 쓰러졌었을 때 세워둔 계획이기도 했어요. 내가 복귀를 할 때, 그러니까 노래를 할 기회가 있다면 (뮤지컬) 공연도 좋지만 공연보다 먼저 팬분들께 들려드리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뮤지컬에 복귀할 기회도 여러 차례 있었지만, 팬들에게 먼저 노래를 들려주고 싶었다. 그 콘서트 무대에 함께하는 친구들도 최석진의 마음을 든든하게 만들어 주었다. 팬들 사이에선 일명 ‘일로 만난 사이’로 유명한 ‘박정원’과 ‘유현석’이다.
“아무래도 얘기하는 게 좀 더 편하기도 하고, 마음에 안 드는 게 있더라도 그냥 서로 말하고 깨끗하게 다 지워버리는 것 같아요.”
세 사람이 같이 콘서트를 하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 게다가 오랜만에 팬들과 만나는 콘서트다. 특별히 준비하고 있는 것이 있을까 물어보자 예상과 달리 반성의 목소리가 먼저 돌아왔다.
“저번에 콘서트를 했을 때 물론 너무 좋아해 주시는 분들이 많으셨어요. 물론 아쉽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셨을 텐데, 저희 셋은 반성을 좀 많이 했거든요. 너무 저희가 하고 싶은 걸 하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좀 들었어요.”
당시에는 세 사람이 함께 콘서트를 하는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기약이 있거나 그런 게 아니라. 이번에 하고 다시 못 만나겠지 하고 일회성 콘서트들처럼 생각했어요. 그래서 안일한 생각으로 준비했었어요.”
그 생각을 바꾸게 만든 것은 무대 위에서 만난 관객들의 관심과 사랑이었다.
“관객분들을 실제로 만나보니까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많은 관심과 사랑을 주셔서, 저희 셋이서 끝나고 나서 그런 얘기를 했었거든요. 무조건 다시 하자. 다시 해서 그때는 정말로 열과 성을 다해서, 보고 싶어 하시는 걸 좀 더 많이 해보자. 우리가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하자.
그러니까 ‘뭘 좋아할지 몰라서 이것저것 다 준비해봤어’ 라는 느낌으로. 지금 최대한 그런 식으로 준비하려고 하고 있어요.”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진심이 오롯이 느껴졌다. 팬분들이 좋아하시겠다고 말하니 “그래 주셨으면 좋겠다.”라고 대답하는 목소리도 마찬가지였다.
콘서트가 아닌 뮤지컬 무대 위에서 노래하는 최석진은 조금 더 기다려야할 것 같다.
“뮤지컬을 피하려고 했던 건 아닌데, 연극을 하다 보니까 좀 더 연극에 대해 좀 더 알아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있었어요.”
한번 시작을 하니 제대로 해보고 싶었다고 한다. 앞서 말했다시피 뮤지컬 복귀를 고민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뭔가 한두 걸음 가보고 ‘아 이거구나’하고 다시 돌아오기보다는 그냥 한번 가보고 (싶었어요). 물론 제안이 안 들어왔던 건 아니에요. 감사하게도 찾아주시는 분들이 그래도 좀 계셨어요.”
하지만 팬들에게 노래를 먼저 들려주고 싶은 생각에 조금씩 미루게 됐다.
“고민을 많이 했는데 그래도 노래는 무대에서 갑자기 빡 부르는 것보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팬분들 앞에서 먼저 들려드리고 싶다라는 생각이 있어서 조금 아껴뒀던 것 같아요.”
팬들과의 유대관계가 끈끈한 것 같다는 말에 최석진은 고개를 저었다. 팬들에 대한 감사함을 표현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고민한 적이 있다고 한다.
“제가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그러니까 저는 SNS도 안 하고, 퇴근길도 안 하고. 그렇다고 뭐 셀카나 이런 걸 자주 올리는 것도 아니고, 소통을 많이 하는 것도 아니고. 이게 사실 그 딱히 좋아할 만한 구석이 없거든요. 그래도 이런 부족한 저를 응원해주시는 분들에게 늘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어요. 표현을 잘 못하지만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해요. 지금까지 늘 감사함을 마음으로 품었다면, 이제는 정말 감사하다는 걸 입 밖으로도 많이 표현 해야겠다고 생각이 들고 있는 것 같아요.”
설명하기엔 힘든 연극 ‘킬롤로지’. 공연장에서 직접 봐주시길
연극 ‘킬롤로지’에 대한 소개를 요청하자. “킬롤로지가 무슨 작품인지 물어보는 게 제일 힘들다.”면서도, 작품의 시놉시스를 이야기해 주었다.
“일단 말씀드리자면 아빠와 아들과 게임개발자, 세 인물이 나와요. ‘킬롤로지’의 뜻이 살해학인데 게임 개발자가 이 ‘킬롤로지’라는 게임을 만들어요. 어떻게 사람을 잔인하게 죽이느냐에 따라서 점수가 올라가는 게임인데 그 방식으로 아들이 살해를 당하거든요. 그래서 아빠가 그 게임 개발자를 찾아가게 되고 그 셋이 얽히고설키는 그런 이야기죠.”
연극 ‘킬롤로지’에서 최석진이 맡은 역할은 ‘데이비’. 10대 소년으로 아빠 ‘알란’의 아들이자, 게임개발자 ‘폴’이 만든 게임 ‘킬롤로지’의 게임 내용 그대로 동네 불량배들에게 끔찍하게 고문당해 사망하는 피해자다.
“’데이비’ 같은 경우 대본을 보면서 많이 안타깝다라고 생각되는 지점들이 굉장히 많은 캐릭터예요. 제가 알기로도 많은 분들이 ‘데이비’라는 인물을 되게 엄마 마음으로 봐주시는 분들이 많은 걸로 알고 있어요.”
그렇게 말을 다듬은 최석진은 ‘데이비’를 설명하며 ‘있어야 할 것의 부재’와 ‘결핍’을 이야기했다.
“있어야 할 것에 대한 부재들로 인해서, 또 그런 부재들로 인해서 오는 결핍. 그리고 그 결핍으로 인해서 생기는 결과가 어떠한 과정이 되죠. 결과적으로 이 인물이 왜 이렇게 되게 됐는지는… 공연장 오시면 알 수 있을 겁니다.”
마지막은 너스레를 떨며 말했지만, 어쩌면 가장 적절한 설명이지 않을까 싶었다. 최석진이 연기하는 ‘킬롤로지’는 3인극이지만 등장하는 배우 세명이 각자의 독백으로만 이야기를 진행해 나간다. 관객은 세개의 1인극을 동시에 보는 것과 마찬가지. 자연스럽게 생기는 독백과 독백 사이를 채우고 연결하는 것은 공연을 보는 관객의 몫이다. 최석진이 ‘킬롤로지’와 ‘데이비’를 설명하는 것에 고민한 것은 ‘킬롤로지’의 내용도 그랬지만 독특한 전개방식이 한몫하지 않을까 싶었다.
독백으로만 공연을 진행하는 것에 대해 어려움은 없을까.
“아무래도 많이 해보지 않았던 작업이기 때문에 좀 힘든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내가 약간 흔들리거나 그럴 때 늘 상대방 눈을 보면서 중심을 잡는 게 익숙한데. 이건 어쨌든 흐름을 잃더라도 무대 위에서 온전히 제 스스로 페이스를 되찾아야 해서. 그런 부분들을 머릿속으로도 이미지 트레이닝을 계속해요. 그래도 매 순간 연습실에서 할 때도 계속 떨리는 것 같아요.”
혼자서 중심을 잡는 것도 그렇지만 긴 독백의 양도 부담이 되었다.
“처음에 대본을 보고 말도 안 된다라고 생각했던 부분이, 제가 정말 수많은 대본들을 읽었거든요. 근데 중간에 잠깐 말하는 거 빼고 한 번 입을 뗐을 때 10페이지를 말해요. 처음에 대본을 보고 이거를 어떻게 외우지라는 생각을 했었어요.”
결국 반복된 암기와 연습이 방법이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차분히 외우고, 또 외우고 하다 보니까 이제 조금 입에 달라붙기 시작하는 것 같아요.”
독백으로만 이어지는 것도 그렇지만, 각 인물들은 저마다 다른 시간대에서 각자의 이야기를 한다. 그만큼 관객들의 집중력을 잡아끄는 배우들의 흡입력이 중요하다. 이에 대해 최석진은 “위트를 중점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당연히 캐릭터가 갖고 있는 어떤 특유의 분위기라든가 감정이라든가 이런 건 기저에 깔려 있어야 돼요. 그다음으로 저는 위트를 좀 중점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이 공연에서 제 분량이 40분 정도일 텐데, 40분 내내 제가 울면서 말하면 딱히 들리지가 않잖아요. 내(데이비) 이야기에서 재미있게 설명을 해줄 수 있는 부분은 재밌게 설명하자. 그리고 슬픈 부분도 내 서사를 정확히 전달해서, 내 얘기를 잘 들을 수 있게, 재미있게 이야기를 들려주자라는 쪽으로 생각을 많이 한 것 같아요.”
이번 시즌만의 매력은
2019년 재연 이후 5년 만에 돌아오는 ‘킬롤로지’는, 초연부터 함께했던 알란 역의 ‘김수현’ 배우 외에는 전원이 처음으로 ‘킬롤로지’에 참여하는 배우들이다. 그렇다면 최석진이 생각하는 이번 시즌만의 매력은 무엇일까?
“그 전 시즌에는 뭔가 자신의 에어리어에서 자기 얘기를 계속 털어 놓았다면 이번 시즌엔 이제 서로 자리를 바꾸기도 하고 서로 마주치기도 하고. (대사를) 주고받진 않더라도 서로 교류는 하는 부분들이 많이 생겼어요. 독백이지만 혼자 힘으로 뭔가 끌고 가는 것에 더해, 연출님이 도움받을 수 있는 장치들을 많이 넣으셨어요.
그리고 관객분들이 보셨을 때 지금 저 친구가 얘기를 하고 있지만 저 사람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는 거구나. 아니면 지금 저 상황이지만 실제로는 어떤 상황이구나라는 게 좀 더 표현이 됐으면 좋겠다라고 생각을 하시더라고요.”
전 시즌에 비해 친절해진 만큼 고민도 뒤따랐다.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 배우들도 그렇고 연출님이랑 같이 많이 고민했던 게. ‘킬롤로지’가 갖고 있는 그 형식 자체가, 불친절해서 오는 재미의 형식이 있다고 생각을 하는데. 이 형식이 너무 파괴되지 않을까? 너무 좀 설명적이 되지 않을까? 라는 고민을 했어요. 그래서 그 지점들을 많이 타협해 가고 있는 것 같아요. 형식은 잃지 않으면서 관객분들께 좀 더 재미있게 설명을 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에요.)”
함께 공연을 준비하고 있는 ‘데이비’ 역의 다른 배우들의 매력을 알려달라는 질문에 최석진은 이번으로 두 번째 같은 역을 연기하게 된 ‘안지환’에 대해 먼저 이야기했다.
“지환이 같은 경우는 같은 역할이 두 번째거든요. ‘비더슈탄트’도 했었고, 이번에도 같이하게 됐는데 지환이가 데뷔했을 때 어떤 스태프분들이 저한테 굉장히 닮은 친구가 있다고 했었어요. 근데 그게 지환이였더라고요. 그리고 지환이를 보면서 참 나랑 닮은 구석이 많다는 생각들을 하게 됐어요. 지환이도 저랑 (서로) 닮은 것 같다고 생각한대요.”
서로가 인정할만큼 닮은 두사람이지만 연기는 다르다고.
“근데 정말 서로 다르다고 인정하는 부분이, 저는 반항적인 부분이 좀 뿜어져 나오는 케이스고 지환이 같은 경우는 반항기가 있어 보이는데 굉장히 정리 정돈이 잘 된 친구예요. 그래서 데이비를 연기할 때도 정제돼서 자기의 호흡대로 하다 보니까 그 캐릭터가 더 쓸쓸해 보이고 더 고독해 보이는 느낌이 좀 있는 것 같아요.”
처음으로 같이 하게 된 ‘안동구’에 대해서는 ‘데이비’와 제일 잘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고.
“오늘도 제가 동구한테 말했는데, 어쩌면 ‘데이비’랑 제일 잘 맞는 스타일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었어요. 저는 성악설을 믿는 편인데, 제 기본 가치관을 흔들리게 하는 친구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굉장히 나이스하고 신사다운 느낌이 있는데, 그리고 되게 착해 보이거든요. 모범생같이. (그런 점들이) ‘데이비가’ 갖고 있는 서사들로 인해서 본인은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인생을 살아야 되는 것처럼 표현되는게 있어요. 그래서 그런 부분들이 어쩌면 ‘킬롤로지’에서 ‘데이비’가 말하고자 하는 부분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
그렇다면 최석진의 ‘데이비’가 ‘킬롤로지’를 통해 전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연극 ‘킬롤로지’가 던지는 화두는 다양하지만, 그 중심에 있는 것은 폭력에 노출된 아이들이 결국 피해자에서 가해자가 되는 비극이 아닐까. 그렇기에 최석진은 ‘데이비’가 입은 피해가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 정확히 전달해야 된다고 말했다.
“’킬롤로지’라는 작품에서 이제 캐릭터들의 고유성이나 목표해야 하는 지점은 명확해요. 그 중에서 ‘데이비’는 그런 시스템으로 인해서 피해를 받은 피해자이기 때문에, 관객분들께 그런 안타까움들을 느끼셨으면 좋겠다라고 생각은 하지만, 저 스스로는 결과를 생각하고 연기하는 편은 아니에요. 판단, 느끼는 것 모두 관객분들의 자유니까요.
다만 ‘킬롤로지’ 내에서 ‘데이비‘는, ‘데이비’가 겪은 일이 앞으로도 있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그 피해가 어떤 식으로 작용이 된다는 걸 정확하게 전달을 해야 된다는 목표가 있는 거죠. 그거마저 없으면 너무 무책임하잖아요.”
그런 부분에서 최석진은 ‘데이비’의 ‘서사’에 집중하려고 한다고.
“저는 ‘감당할 수 없는 힘듦’을 좀 표현하려고 하는 게 있어요. 데이비가 그 나이에 그 한 아이에게 감당할 수 없는 시련들이 왔을 때. (‘데이비’에게) 주어지는 인생들을 좀 표현하려고 하는 편인 것 같아요. “
힘듦을 표현한다니. 체력적으로나 멘탈적으로 힘들지는 않은지 질문하자 담백한 대답이 돌아왔다.
“저는 괜찮은 것 같아요. 체력적으로도 그렇고 멘탈적으로도. 별거 아니다라는 말은 아니지만, 저는 ‘스위치’를 좀 잘 키고 끄는 편이어서. 연습이 끝나면 굉장히 빠른 시간 내로 최석진으로 돌아오는 것 같아요.”
걱정이 지워지는 건강한 대답이었다.
※이 이후부터는 연극 ‘킬롤로지’의 주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공연의 후반, ‘데이비’는 ‘알란’의 상상 속에서 새로운 삶을 이어간다. 위기에서 벗어나 목숨을 구하고, 애정과 간호 속에 몸을 회복한다. 그 과정에서 꿈을 찾고 일을 하며,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최석진은 그런 ‘상상 속 데이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무엇보다도 ‘상상 속 데이비’가 실제 ‘데이비’와 연속성이 있는지, 아니면 개별적인 존재로 연기하고 있는지가 궁금했다.
“저는 연장선이라고 생각을 하고 연기를 하는 편인 것 같아요. 그러니까 어떤 한 인물의 바램으로 의해서 재창조된 캐릭터라기보다, (극이) 진행이 되면서 이 순간에 아빠의 영향이 들어오면, 내(데이비)가 이렇게도 될 수 있었겠다라는 식으로 연구를 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최석진의 ‘데이비’가 ‘알란’의 상상처럼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면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
“이번 시즌에 새롭게 추가된 소품들이 있는데, ‘데이비’들끼리 서로 얘기를 해서 히어로물 만화책을 자주 보거든요. 연출님과도 상의를 했어요. 이게 궁극적으로 데이비가 꿈꾸는 모습이었으면 좋겠다. 나라를 구하는 히어로의 느낌보다는, 약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그런 마음이 어렸을 때부터 마음 한켠에 좀 자라났으면 좋겠다라는 의미로 그런 소품들을 쓰기 시작했어요.”
‘데이비’가 꿈꾸는 모습은 ‘상상 속 데이비’가 간호사가 되는 것과 궤를 같이한다고.
“(데이비가 죽지 않았다면) 그렇게 자라날 거 같아요. 약한 사람들을 위해서 내가 용기를 내고 뭘 할 수 있고 뭔가 남에게 도움을 주는 그런 모습들이 아버지가 생각했을 때 데이비가 잘 자랐구나라고 생각되는 지점이 아닐까요.”
마지막으로 연극 ‘킬롤로지’를 보러 오는 관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부탁했다.
“재밌게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그 재미가 웃음이든, 슬픔이든, 어떤 힘듦이든, 공감이든. 무엇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좀 재밌게 공연을 봐주셨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드네요.”
인터뷰 말미에 최석진은 ‘관객들에게 재미를 주고 싶다’라는 말을 강조했다. 그는 다양한 감정과 감각의 스펙트럼을 ‘재미’라고 표현했다. 그것은 공연이 불러일으키는 다양한 감정의 형태일 수도 있고, 무언가를 깨달음에서 오는 카타르시스일 때도 있고, 자극에 의한 도파민일 때도 있다. 실제로 관객들은 괴롭고 힘든 감정의 파도가 휩쓸고 난 다음에 실컷 눈물을 흘리고선 ‘재밌었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가 참여하는 연극 ‘킬롤로지’도 마찬가지다. 다양한 감정과 감각의 스펙트럼이 극대화되어 있다. 롤러코스터처럼 오르락 내리락하는 사건과 감정들 사이에서, 관객은 받아들이고, 공감하다 추론하고 분석하게 된다. 최석진과 창작진은 새로운 시즌에서 여러가지 변주를 통해 그 스펙트럼을 더욱 발전시킬 요량인 것 같다.
스펙트럼을 만들어 내는 삼각의 프리즘처럼 연극 ‘킬롤로지’ 역시 그들만의 삼각 프리즘을 만들 예정이다. 배우, 창작진. 관객. 셋이 모여 만들어 내는 ‘킬롤로지’의 프리즘이 어떤 새로운 스펙트럼을 보여줄지. 인터뷰를 마친 지금, 관객의 입장으로 기다려 본다.
기획 김현진, 이민정
인터뷰 진행 김현진, 이민정
촬영 및 사진 편집 김현진, 전민영
촬영 및 영상 편집 이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