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필요한 생각을 하지 않는 게 제 장점인 것 같아요.
예를 들어 ‘내가 1등을 해야지’, 이런 생각이요.
딱 제가 할 것만 하려고 하는 것 같아요.”
밝고, 낙천적이다. 상념이 없다. 실내 체육시설이 폐쇄되어 포항까지 내려가 훈련지를 수소문하는 상황에도, 고향과 가깝다며 ‘오히려 좋아!’를 외쳤다. 김연아 이후 최초의 피겨스케이팅 주니어 세계선수권대회 입상자, 현 주니어 세계 랭킹 1위. 신지아의 이야기다.
피겨스케이팅 선수로서는 얼음보다 단단한 마음을 가진 신지아. 훈련장 밖의 그는 사뭇 달랐다. 어린 나이 때문에 지금까지 참여하지 못한 진천선수촌 훈련에 대한 아쉬움을 드러내고, 내년을 기약하던 신지아는 ‘이제부터는 해병대 훈련이 도입된다’는 소식에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곧 다시 또박또박 신념을 이야기하는 피겨스케이팅 국가대표, 선수 신지아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쾅쾅’ 넘어져도…
그녀를 움직이게 한 ‘재미’
신지아는 7살에 부산 신세계 센텀시티 아이스링크에서 처음 빙판에 올랐다. 집 근처에 아이스링크가 개장했다는 소식을 듣고 호기심에 디딘 첫발이었다. 얼음과의 첫 만남에서, 신지아는 ‘쾅쾅 넘어졌다’고. 몇백 번은 넘어져도, 7살 신지아에게 피겨스케이팅은 두려움보다는 재미가 더 컸다. 지금도 러츠와 플립 점프를 가장 좋아한다고 꼽으며 ‘토를 찍고 올라갔을 때, 잘 뛰었을 때 쾌감이 좋다’는 신지아다운 답변이었다.
“그때는 그냥 다 재밌었어요. 항아리라든지, 크로스를 한다거나, 기초적인 기술을 배울 때니까. 어렸을 때라 무서운 게 하나도 없었어요. 점프 배울 때도 진도가 빨리 나가고 싶었어요. 많은 걸 뛰고 싶었어요. 처음 점프를 뛸 때는 하네스를 거의 안 달고 뛰었어요. 아무래도 뛰는 거니까 더 재밌었던 것 같아요.”
2학년 때 직접 유튜브에서 김연아를 찾아 보며 ‘잘 탄다. 대단하다!’라고 생각했던 신지아. 3학년 말 대구로 훈련지를 옮기고, 본격적인 선수 생활에 입문했다. 처음 대구에서 훈련할 때는, 부산에서 기차를 타고 3~4시간의 강행군을 매일 같이 왕복했다고.
“가족이 다 부산에 있으니까, 서울로 가면 많이 못 보잖아요. 더 멀어지고…. 그나마 가까운 대구에 좋은 코치님이 계신다고 해서 먼저 대구로 가게 됐어요. 일단 기차 타고 다녔을 때는 이동 시간도 많이 길어진 것 같아요. 학교생활을 거의 못 하게 됐고, 친구랑 놀 수 있는 시간도 많이 사라졌어요.”
5학년이 된 신지아는 다시 훈련지를 서울로 옮겼다. 가족은 여전히 부산에 있지만, 선수로서의 성장을 위해 내린 과감한 결단이었다.
“대구에서 계속 타다가 더 많은 경험을 하고 싶고, 서울에는 잘 타는 친구들도 많으니까 같이 경쟁하고 싶어서 (서울로 이동할) 결심하게 됐어요. 꼬리뼈에 금이 가는 부상을 입어서 3개월 정도 쉬고, 나이도 5학년이 돼서 서울로 올라가야겠다 결심했어요.”
또래들과의 경쟁 덕분이었을까. 신지아는 먼저 다가와 준 친구들 덕에 매 시즌 눈부시게 성장했다. 2021년 2월, 국가대표를 선발하는 종합선수권과 회장배 랭킹대회 주니어 부문에서 모두 우승을 차지해 상비군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반년 뒤 2021 주니어 그랑프리 6차 대회에서는 동메달을 차지했다. 당시 점수는 2월 종합선수권보다 약 36점 오른 183.41점. 괄목할 만한 성장에 특별한 비결이 있는지 질문했다.
“특별한 트레이닝은 안 했고, 팀 변화가 있었어요. 새로운 코치님의 티칭과 시스템이나, 제가 팀을 변경하면 그 환경에 맞춰 타려고 더 몸을 끌어올리는 그런 게 있어서 타이밍이 좋았던 것 같아요.
(6차 대회에 대해) 너무 잘 기억나요. 처음 국제 메달 딴 거라서. 그때는 거의 놀러 간다고 생각하고, 정말 신나는 마음으로 주니어 그랑프리에 나간 거였는데 메달을 딸 수 있게 돼서 너무 행복했어요. 항상 언니 오빠들이 단상 위에 올라가 있는 것만 봤는데 저도 처음으로 해외에서 단상에 올라가서 너무 좋았어요.”
기세를 몰아 국내 대회에서도 ‘클린’(무결점 연기) 행진을 이어갔다. 상승 곡선은 끝이 없었다. 국가대표 타이틀을 따내고 주니어 세계선수권 출전권까지 획득했다. 그리고 2022년 3월, 신지아는 2006년 김연아의 금메달 이후 ISU 주니어 세계선수권에서 입상하는 첫 번째 선수가 된다. 주니어 여자 싱글에서 마의 벽으로 불리는 200점의 아성을 깼다.
“그때도 아예 메달은 기대를 안 했어요. ‘아, 5등에서 6등만 했으면 좋겠다.’ 이러고 있었어요. 왜냐면 공식연습 탈 때 보니까, 생각보다 잘 타는 선수들이 많은 거예요. 쇼트 끝났는데 점수를 너무 잘 받은 거예요. 그때도 생각지도 못하게 2등을 하게 됐는데, 그때는 그래도 프리 때 저번보다는 덜 떨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떨리다가도 노래가 들리면 연습했던 대로, 저절로 되는 것 같아요.”
‘어? 내가 두번째라고?’
주니어 세계 2위. 데뷔 첫해에 올린 성과에 한껏 자신감이 고취될 수도 있었을 터. 하지만 신지아는 ‘쿨’했다. 김연아 이후 역대 최고 성적이라는 것도 귀국 후에 알았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기록을 알고 난 후에도 흔들림 없었다. ‘어? 내가 두 번째라고?’ 그렇구나.’라는 짧은 감상 뒤, 대표 훈련에 참여하여 묵묵히 다음을 준비했다.
2022년 9월, 신지아는 주니어 그랑프리에서 드디어 첫 우승을 차지한다. 당시 쇼트 프로그램 첫 순서로 출전하여 70.41점을 받고, 최종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2019년 이후 오랜만에, 장내에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쇼트 프로그램도 처음 70점을 돌파하여 본인에게도 의미 있는 결과였다. 신지아에게 자신의 점수와 우승을 예상했는지 질문했다.
“그때는… 예상했어요(웃음). 그래서 긴장이 너무 많이 됐어요. 그전 대회(월드)를 잘했잖아요. 그러니까 ‘이번에도 잘해야 하는데’라고 좀 많이 생각했던 것 같아요. 경기 결과가 그렇게 좋지 않아서 많이 속상했는데, 그래도 처음으로 1등 해봤으니까, 애국가도 나오잖아요. ‘멋지다’라고 생각했어요. 되게 감동이었어요.”
동계 시즌이 절정에 다다르는 12월, 신지아는 눈코 뜰 새 없었다. 첫 주에 국가대표 1차 선발전인 회장배 랭킹대회를 1위로 마치고 바로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을 위해 토리노로 출국했다. 국내에서는 시니어 규칙에 맞춘 프로그램을 소화하는 신지아는 주니어를 오가며 더욱 숨 가쁘게 대회를 치러냈다.
“파이널 때 큰 대회였지만, 긴장이 되지는 않았어요. 왜냐면 랭킹 다음 날 바로 파이널 출국이어서 아직 랭킹 끝난 지 얼마 안 됐고, 정신도 없었고…. 그러다가 또 시니어 프로그램에서 주니어 프로그램으로 바꿔야 하니까, 그것도 정신없어서 긴장할 틈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공식 때 갑자기 시니어 프로그램을…, 저도 모르게 시니어 스텝을 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맞다. 이거 하면 안 되지!’ 다시 주니어 프로그램으로 들어갔어요.”
신지아는 주니어와 시니어가 같은 주에 진행되는 그랑프리 파이널을 십분 즐겼다. 바쁜 일정 속에서도 시니어 경기를 관람했고, 선배 선수들을 보며 받은 특별한 감상도 들을 수 있었다.
“주니어 대회 끝나고 시니어 경기를 보는데 너무 멋있더라고요. 다들 나와서 막 이렇게 자기소개 할 때, 주니어 친구들은 ‘어, 어떡하지?’ 하고 서 있는데, 시니어는 자연스럽게 딱, 딱 하는 거예요.”
Grow together,
Shine forever
두번째 주니어 세계선수권 은메달을 차지한 2023년, 신지아에게 변화가 찾아왔다. 일본의 MF 아카데미에서 보낸 전지훈련이다.
2023년 4월 신지아는 2018 평창기념재단의 2024 강원 동계 청소년 올림픽대회 대비 특별 전지훈련에 발탁되어 일본 지바현의 MF 아카데미로 떠났다. 첫 해외 전지훈련이었다. 같은 종목의 윤아선과 권민솔은 캐나다로 함께 출국했지만, 신지아는 홀로 일본을 택했다. 처음 MF 아카데미를 선택하고 훈련 계약을 연장한 배경에는 선수 자신의 의견이 반영되었다고.
“지난 시즌 3차, 6차 대회 모두 MF 아카데미 친구랑 같이 출전하게 돼서 볼 수 있는 기회가 좀 많이 생겼는데, 그때 코치님과 선수들이 소통하는 커뮤니케이션이 되게 좋아 보여서 MF 아카데미로 가게 됐어요. 저도 그렇지만, 같이 봐주신 엄마도 ‘여기 괜찮은 것 같은데’라고 느끼셨어요.
다른 친구들이랑 타면서 저도 굉장히 발전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던 것 같아요. 그리고 고난도 때문에 일본에 간 건 맞지만, 훈련 초기에 부상이 좀 잦아져서 연습은 못 하게 됐어요. 대신 점프 랜딩이나 스핀, 프로그램의 완성도를 높이는 훈련을 했어요.”
프로그램의 전반적인 퀄리티를 높인 신지아는 파죽지세였다. 2023 주니어 그랑프리 2차, 5차 대회에서 압도적인 점수로 금메달을 차지했다. 특히 2차 오스트리아 대회에서는 2위 선수보다 33점 이상 앞서는 대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큰 점수 차에 관해 묻자 ‘점수 차이를 신경 쓰진 않았다’고 답하며, 차분하게 대회를 회상했다.
“처음으로 해외 코치님이랑 가는 해외 대외여서 좀 더 떨렸던 것 같고, 그래서 그런지 긴장이 안 풀리더라고요. 쇼트 때는 그래도 괜찮았는데, 프리 하는 날 너무 긴장이 되는 거예요. 들어가기 전에 대기하면서 통역해 주시는 니나 선생님이 많이 말 걸어주시면서 풀어주시려고 했었는데, 하나도 안 풀렸어요(웃음). 긴장한 상태로 들어갔었는데 그래도 음악 나오니까 역시 잘 풀리더라고요.”
나카니와 켄스케 코치, 타케노 니나 코치와의 협업으로 시즌의 1막을 성공적으로 내렸지만, 입시 문제와 부상으로 인해 일본 현지 훈련을 접어야 했다. MF아카데미에서 한국어, 일어, 영어로 소통하며 친해진 동료 선수들도 “우리 나중에 꼭 다시 봐야 돼!” 라며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고.
“한국으로 돌아와서 좋은 점은 일단 부상 관리가 잘 될 수 있다는 점이에요. 소통도 선생님이랑 더 잘 할 수 있기 때문에 훨씬 편해요. 그리고 개인적인 지상이나 이런 것들도 할 수 있다는 게 좋은 점인 것 같아요.
아쉬웠던 점은 나카니와 선생님이랑 니나 선생님이랑 많이 정들었는데, 떠나게 돼서 많이 아쉬웠던 것 같아요. 너무 잘해주셨어요.”
신지아의 특별전지훈련은 빛을 발했다. 지난 10월 김해에서 개최된 2024 강원 동계 청소년 올림픽 대회 선발전 여자 싱글 부문에서 1위를 차지하며 출전권을 획득했다.
2018 평창 동계 올림픽 남자 싱글 쇼트 프로그램을 직접 관람하며 많은 관중에 놀라던 신지아. 당시 만 10세였던 그 순간부터 올림픽의 꿈을 꾸며 ‘나도 저 자리에 있고 싶다.’고 생각하던 그는 2024년 1월, 평창 올림픽의 영광이 남은 경기장에서 연기를 펼칠 예정이다.
“지금 나이밖에 못 나가는 올림픽이잖아요. 딱 한 번 나갈 수 있는 올림픽이니까. 그게 제일 좀 특별한 것 같아요. 좀 긴장될 것 같기도 하고 설렐 것 같기도 해요. 개막식이나 폐막식 같은 이벤트나, 다 같이 지내는 선수촌도 기대돼요. 저 혼자 지내는 건 또 처음이라, 모든 준비를 저 혼자 해야 되니까 걱정도 좀 되는 것 같아요.”
신지아는 12월 국가대표 1차 선발전인 회장배 랭킹대회를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주니어에는 없는 프리 스케이팅 스텝 시퀀스 역시 함께 연습하고 있다. 가장 좋아하는 비점프 항목으로 ‘스텝 시퀀스’를 꼽은 신지아는 ‘음악에 맞춰 엣지를 쓰며 표현하는 것이 매력적’이라며 웃었다. 최근에는 김연아의 지도를 받으며 안무를 더욱 풍부하게 표현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저는 연아 언니의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스케이팅 스킬이 가장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저도 연습을 해보니까, 굉장히 어려운 거더라고요.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것. 근데 연아 언니는 해낸 거니까, 그게 가장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저도 해내야 된다고 생각해요. 표현력은 연아 언니의 표정 연기나, 애절한 연기가 너무 좋아요. 다 잘하셔서…(웃음). 강한 연기나, 카리스마도 좋아요.
요즘 연아 언니한테도 안무 수업을 조금씩 받고 있어서, 많이 배우고 있어요. 연아 선생님한테(웃음). 저도 기회가 된다면 좀 더 강렬한 것도 해보고 싶어요. 탱고도 해보고 싶고 죽음의 무도처럼 휘몰아치는, 그런 프로그램도 해보고 싶어요.”
세계 랭킹 1위의
특별한 성장 비법
“저는 제 자신하고 타협하지 않으려고 많이 노력하는 것 같아요. ‘이 정도만 하면 됐다’, 이런 생각을 잘 안 하려고 하는 것 같아요.”
수줍게 웃는 모습이 영락없이 천진한 중학생이구나 싶다가도, 스치듯이 발견한 신지아의 철학은 깊었다. 신지아는 런스루를 할 때도 ‘쇼트는 다 하고, 프리는 스핀 하나만 쉰다’는 원칙으로 모든 요소를 꼼꼼히 점검한다. 2023년 주니어 세계선수권에서도 화가 난 대상은 메달의 색보다 ‘실수하고 싶지 않았는데, 실수한’ 자신이었다.
“제 목표는 항상 같아요. 최선을 다해서 제가 만족할 만한, 원하는 경기를 하는 게 목표예요. 클린 경기나, 제가 원했던 점수를 받는 거요.”
주니어 세계 1위 신지아의 성장법은 ‘자신과 타협하지 않는 것,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 스스로와 싸워 이겨낸 신지아에게 더 이상의 라이벌이 의미가 있을까? 남은 4개월, 한결 같은 신지아의 목표가 이루어질 수 있기를 응원을 보낸다.
기획 김현진 박지민
인터뷰 진행 김현진
촬영 및 사진 편집 박지민
영상 편집 이민정
검수 이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