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에는 얌전하고 말이 적고 책 읽기를 좋아하는 소녀지만, 빙판 위에서는 아이코닉한 자기만의 이미지로 국내외 피겨스케이팅 관계자에게 본인을 각인시킨 스케이터. 김연아 이후, 데뷔 시즌에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 출전한 유일한 선수. 피겨스케이팅 국가대표 권민솔의 이야기다.
서울 강서구의 한 작은 스튜디오, 권민솔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인터뷰 중 도드라진 단어가 있었다. 바로 작품이다. 권민솔은 쇼트 프로그램, 프리 스케이팅에서 사용하는 프로그램을 작품이라고 불렀다. 국제 대회에 출전한 선수들을 선망하던 화동이 국가 대표가 되기까지, 그녀와 함께한 작품들 뒤에 숨겨진 노력과 인내의 이야기를 들었다.
피겨스케이팅의 첫 걸음
권민솔이 처음 피겨스케이팅을 시작한 것은 2014년 가을, 6살 때였다. 김연아 선수의 소치 올림픽 경기를 보고 난 후였다. 그 날을 계기로 일주일에 한 번씩 피겨스케이팅 강습을 시작했다. 목동 아이스링크 근처에 살고 있던 터라 처음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취미였다.
어머니 변주화 씨는 “처음에는 그냥 재미로 했어요. 일상적인 운동처럼. 민솔이의 운동 능력이 뛰어난 편은 아니라 운동 겸 하게 됐어요.”라고 회상했다. 권민솔은 “처음에는 얼음에 있는 것이 그냥 즐거웠어요. 예쁘기도 해서 좋았어요.”라고 미소 지으며 “링크장에서 언니들, 친구들이랑 놀면서 스케이팅 타는게 즐거웠던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피겨스케이팅과의 첫 만남처럼, 선수 생활도 자연스럽게 시작했다. 변주화 씨는 “너무 자연스럽게 대회에 나가게 되었어요. 생활체육 대회 나가고, 목동 마스터즈 대회를 나가다 보니까 이렇게 (엘리트 선수가) 된 거죠.”라고 설명했다. 정확히 선수 생활을 시작한 시점을 이야기 어려울 정도로 자연스러운 시작이었다. 권민솔은 “백설공주, 캉캉 프로그램을 탔던 그 즈음부터 스스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고 생각해요.”라고 전했다.
국제/국내 대회를 누비던 화동
권민솔은 오랫동안 피겨스케이팅을 본 팬들과 관계자들에게는 익숙한 선수였다. 노비스 시절부터 화동으로 많은 국내 및 국제 대회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화동의 사전적 의미는 결혼식에서 꽃을 뿌리거나, 이벤트에서 꽃을 전달하는 아이다. 피겨스케이팅에서 관객들은 찬사의 의미로 경기 후 꽃과 인형을 얼음 위로 던지는데, 화동은 이를 주워 선수에게 전달한다. 선수의 경기가 끝날 때마다 스케이트를 타고 빙판 곳곳을 누비며 꽃과 선물을 수집해야 하므로, 주로 10대 전후의 스케이터들이 화동을 맡는다. 이들은 팬들의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빙상 위의 마스코트이면서, 경기의 중요한 스태프이기도 하다. 빙판에 이물질이 남아있으면 경기 운영에 차질을 줄 뿐만 아니라 스케이터들의 부상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이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권민솔은 화동으로 많은 대회에 참여하며,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특히 권민솔이 화동으로 활동했던 2015년~2018년은 한국에서 그 어느 때보다 많은 피겨스케이팅 국제 대회가 열렸다. 그 대부분의 대회에서 관객들은 꼬마 화동 권민솔을 만날 수 있었다. 권민솔은 이보람 코치의 권유로 피겨스케이팅을 시작한지 3개월만에 화동을 시작했다. 그녀가 처음 화동으로 참여한 국제 대회는 2015년 목동에서 열렸던 사대륙 선수권 대회였다. 변주화 씨는 “그때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멀리 나갈 수 있는 실력이 아니었어요. 펜스보다도 키가 작았고. 아이스링크 사이드에서만 화동 일을 할 수 있었죠.”라며 권민솔의 첫 화동 경험을 회상했다.
“인상 깊었던 장면만 조금씩 기억나고 그렇게 잘 기억나지는 않아요.”라고 회상을 시작한 권민솔은 “처음 화동을 하게 된 터라 제가 좀 넘어졌거든요. 그런데 누가 ‘선생님이 민솔이 한 번만 더 넘어지면 이제 (화동) 못하게 한대’라고 말해줬어요. 그래서 ‘절대 안 넘어지겠다’라고 했던 기억이 나요.”라고 말했다.
우상이었던 김연아를 처음 만난 것도 이 대회였다. 권민솔은 “연아 언니를 처음 만났던 때가 생각나요. 등에 싸인도 받았어요.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언니를 보자마자 안았어요. 지금은 못할 것 같지만, 그때는 그랬어요.”라고 말했다. 당시 권민솔은 김연아의 싸인을 받은 저지를 입고 빙판을 누볐다.
권민솔은 2018년까지 화동으로 많은 대회에 참여했다. 대부분의 국제 대회를 화동으로 참여했기에 관객으로 대회를 관람한 것은 평창 동계 올림픽이 유일했다. 권민솔은 “평창올림픽은 (화동으로) 못 갔어요. 나이가 너무 어려서 가지 못했는데, 너무 슬퍼서 펑펑 울었어요. 심판 선생님들께 (윤)서진 언니랑 같이 가서 ‘혹시 (화동) 하게 해주면 안되냐’고도 물어봤어요.”라고 당시의 아쉬움을 담아 말했다.
“대신 여자 프리 (스케이팅) 경기를 보러 갔었어요. 아무래도 메달을 땄던 선수들과 한국 대표로 출전했던 하늘이 언니랑 다빈이 언니가 기억에 많이 남는거 같아요.”라고 답하며 “대회가 끝나고 화동들이 ‘안녕’하고 링크장 한 바퀴를 돌았는데, 그때 또 울었던 것 같아요. ‘나는 저기 못갔네’하고 아쉬워서 울었어요.”라고 당시를 떠올리며 웃음지었다.
꼬마 화동을 졸업한 권민솔은 그로부터 3년이 지난 2021/2022 시즌 국내 메이저 대회에 데뷔했다. 그녀는 가장 중요한 두 개의 국내 대회에서 주니어부 우승을 했다. 선수들의 선물을 전달하던 꼬마 화동이 선수가 되어 포디움의 가장 높은 곳에 오른 것이다. 권민솔은 “제가 화동으로만 봤던 대회를 직접 나가게 되니까 뭔가 신기했고 뜻 깊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운 좋게 1등도 하게 되어서 너무 좋았어요.”라며 “제가 (화동으로) 맨날 사인 받았던 언니들과 시상대에 설 수 있고 사진도 같이 찍을 수 있어서 너무 좋았어요.”라고 덧붙였다. 경기에서 화동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냐는 질문에 ‘입장 한 명 씩 나와야 하는데’라고 생각했다며 환하게 웃던 권민솔은 ‘화동들이 너무 귀여운 것 같다.’라고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성공적인 주니어 데뷔
권민솔은 첫 주니어 시즌이었던 2022/2023년을 누구보다 바쁘게 보냈다.
코로나 여파로 국제대회 데뷔를 주니어 그랑프리에서 치르게 된 권민솔은 첫 시합부터 은메달을 획득하며 뛰어난 기량을 펼쳤다. 첫 대회에서 메달을 딸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던 그녀는 “첫 대회라 너무 떨렸어요. 너무 떨렸는데 다 클린해서 너무 좋았어요. 조금 아쉬운 게 있다면 스핀에서 약간 실수가 조금 아쉽긴 해요. 그래도 너무 잘해서 생각보다 더 좋았어요.”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뒤 이어 두 번째 대회에서도 메달을 획득한 권민솔은 6명의 주니어 선수에게 주어지는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 출전권을 획득한다. 주니어/시니어 대회가 동시에 치뤄지는 이 대회는 피겨스케이팅 왕중왕을 가르는 대회이니 만큼 많은 관중들이 몰렸다. 코로나가 만연하던 시절 국내와 해외에서 주니어 데뷔전을 치룬 권민솔은 처음으로 많은 관중들이 지켜보는 경기를 치르게 되었다.
“저는 관중들이 막 많다고 막 떨리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관중들이 많으면 저는 더 좋은 것 같아요. 왜냐하면 더 응원도 많이 해주셔서 저는 관중이 더 있는 걸 더 좋아하긴 해요.”라며 이야기를 시작한 권민솔은 “너무 운 좋게 나가게 된 거라 떨리기 보다는 신기한 기분이었어요. 그냥 ‘내가 할 것만 하고 오자, 내가 꼴찌하러 간다.’라고 생각했는데 꼴찌도 안했고. 너무 좋은 경험이었던 것 같아요.”라고 처음 참가한 그랑프리 파이널에 대한 감상을 전했다. 시니어 선수들과 함께 했던 경기에 대해서는 “맨날 유튜브에서만 보던 선수들이 있으니까, 너무 신기하고 좋았어요.”라며 방긋 웃음지었다.
시즌의 마지막 국제 대회였던 주니어 세계 선수권은 권민솔이 큰 기대를 갖고 출전한 대회였다.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보다는 좀 더 떨렸다는 권민솔은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보다 ’더 잘 해야겠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가서인 것 같아요. 제가 나가고 싶었던 대회기도 했고 욕심도 있어서 좀 떨렸던 것 같아요.”라며 이유를 답했다. 그녀는 이 대회에서 개인 최고점을 기록하며 5위라는 좋은 성적을 얻었다. 권민솔은 “쇼트는 조금 아쉬운 감이 있긴 했는데, 프리에서 잘하기도 했고. 시즌 마지막 대회에서 정말 잘한 것 같아서 너무 좋았어요.”라고 이야기했다.
권민솔은 데뷔 시즌 주니어로서 나갈 수 있는 모든 대회에 출전했다. 국제 대회 가능 연령 중 가장 어린 선수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예였다. 높아진 국내 선수 수준과 풀에서 치열한 경쟁을 뚫고 얻어낸, 값진 성과였다. 권민솔은 “물론 힘들기는 힘들었지만, 그냥 너무 즐거웠던 것 같아요. 생각도 안 했는데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도 나갔고, 월드도 나갔고. 제가 원하는 게 다 된 시즌인 것 같았어서 너무 좋았어요.”라며 행복했던 데뷔 시즌을 총평 했다.
매년 새로운 캐릭터를 입다
주니어 데뷔 시즌, 권민솔은 좋은 성과와 함께 남다른 표현력으로 국내외 피겨스케이팅 관계자와 팬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특히 뮤지컬 ‘캣츠’ OST를 활용한 프리 프로그램으로 본인의 뛰어난 표현력을 맘껏 보여주었다. 이런 특장점을 당사자도 잘 알고 있었다. 권민솔이 꼽은 피겨스케이터로서 가장 큰 장점은 ‘작품을 잘 해석하고 표현하는 것’. 만 15세의 권민솔이 가진 ‘작품에 대한 이해’는 무엇일지 질문했다.
권민솔은 좋은 표현력을 ‘사람을 끌어당길 수 있는 매력을 갖고 음악이랑 잘 맞추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국제 대회 데뷔 전부터 캐릭터가 명확한 프로그램을 많이 연기한 그녀는 원작의 스토리와 캐릭터를 전달하는 것에 최대한 집중한다. 그래서일까. 새로운 시즌, 새로운 프로그램을 받으면 완벽하게 체화하는 것이 꼬박 한 달은 걸린다. 새 작품을 만나고 연습을 시작하면 점프는 뛸 수 있어도 음악을 완벽하게 맞추기 어렵다고. 보통 한 달은 연습해야 몸에 익은 듯이 연기할 수 있다. 하지만 음악에 맞춰 연기하는 것을 완벽히 체화하고 난 후에는 실수 또한 적다. 한 달 동안 캐릭터를 완벽하게 몸에 입는 것이다.
백설공주, 신데렐라, 찰리 채플린. 이미지가 뚜렷한 수많은 캐릭터를 연기한 권민솔이었지만, 2022/2023 시즌 ‘캣츠’를 연습하며 하나의 캐릭터를 표현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된 것 같다고. 권민솔은 “처음에는 진짜 이상하다고 피드백 받았는데…,”라며 웃었다.
“많이 하니까 좋아진 것 같아요. 지금은 캐릭터가 있는 게 가장 표현하기가 쉬운 것 같아요. (‘캣츠’의 경우) 고양이 움직임을 더 표현하기 위해 움직임에 웨이브를 더 넣고, 고개 돌리는 것, 시선 등에 신경 썼어요. 오프아이스에서도 (안무 연습을) 정말 많이 연습했고, 디테일도 많이 신경 쓴 것 같아요. 그런데 하도 그렇게 많이 했더니, 다음 작품을 새로 짤 때도 (‘캣츠’의 웨이브 같은) 그런 움직임이 좀 나오더라고요. 발레 선생님께서 자꾸 고양이가 나온다며 ‘그거 하지 말라’면서 농담하셨어요.”
몸의 움직임 외에도, 캐릭터를 표현하기 위한 시각적 디테일도 돋보였다. ‘캣츠’ 프로그램에서 고양이 귀를 형상화한 머리 장식은 권민솔의 시그니처였다. 시즌 후반부에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땋아 귀를 구현하기도 했다. 권민솔은 해당 머리 장식에 대해 “처음에는 고양이 귀를 안 하려고 했었거든요. 너무 어려 보이지 않을까 싶었죠. 그런데 막상 사용하니 너무 괜찮았어요. 그런데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에서 ‘다음부터는 감점될 수 있다’라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어요. 안 된다니까 뭐 어쩔 수 없죠. 그래서 ‘머리띠를 빼고 뭐를 하면 좋을까?’ 하다가, 머리카락으로 고양이 귀를 만들었어요.”라며 독특한 아이디어에 대한 후일담을 전했다.
성실함과 긍정적이고 강한 의지
변주화 씨는 딸 권민솔에 대해 “부지런하고 남들보다 노력을 많이 하는 편”이라고 운을 뗐다.
“국가대표 선수들을 보면 운동 능력을 타고난 애들이 많아요. 힘이나 유연성 같은 부분이요. 하지만 민솔이는 다른 애들에 비해서 신체적인 능력이 굉장히 부족해요. 피겨스케이팅을 타기 위해 기본적으로 필요한 능력들이 타고난 편은 아니라, 남들보다 훈련을 많이 하고 노력도 많이 해요.”
노력을 외면하는 결과는 없다고 했던가. 권민솔은 성실함과 노력이라는 무기로, 국가대표 타이틀과 국제대회 메달을 따며 자신의 입지를 다지고 있다. 시즌 중이나 비시즌의 훈련 강도가 늘 같을 정도로, 꾸준하고 성실하다. 빙상 훈련이 40%라면, 60%의 지상 훈련으로 부족한 점을 부지런히 채우고 있다. 고된 국가대표 훈련과 팀 훈련이 끝난 후에는 PT, 하네스, 안무, 리듬체조 훈련으로 달려간다. 자신이 가장 부족하다고 꼽은 유연성과 근력, 지구력 향상을 위해서다. 특히 리듬체조 훈련을 할 때는, ‘진짜 이거 너무 힘들다’고 생각한 적도 많다고.
‘너무 힘들다’고 말하는 권민솔이지만, 만면에는 즐거움이 가득했다. 이렇게 남들보다 많은 노력을 해야 하는 상황임에도 권민솔은 늘 행복하게 훈련에 임한다.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마음은 권민솔의 또 다른 원동력. 변주화 씨는 “민솔이의 멘탈이 저보다 좋아요.”라고 웃음 지었다. “힘든 훈련들을 잘 견디고, 스트레스를 별로 받지 않아요. 항상 ‘해피’하고. (종목 특성상) 친구들이 결국 경쟁 상대가 될 수밖에 없어요. 다른 친구가 먼저 점프를 뛰거나 스케이팅이 더 좋으면 보통 시기, 질투를 하는 경우가 많아요. 아무래도 개인 종목이니까요. 어떤 애들은 주변 친구들이 자기보다 잘하면 더 스트레스를 받는데, 민솔이는 그런 거가 전혀 없어요.”라며 딸에 대한 존경을 표했다. 권민솔은 “제 것만 신경 써요. 복잡한 생각이 없으니까, 대회에서도 더 잘 집중할 수 있는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그런 노력과 강한 마음 덕분에, 권민솔은 지난 두 시즌 출전한 대회에서 늘 한결같고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실제로 연습 때도 큰 차이가 없어 연습에서도 대부분의 기술 요소에서 실수가 없다는 권민솔은 본인 스스로도 ‘기복이 없는 편’이라고 말했다. 권민솔의 훈련 생활을 꾸준히 지켜본 변주화 씨는 “민솔이의 컨시스턴시(Consistency: 점프 안정성)는 꾸준히 노력하기 때문에 있는 거에요. 타고난 것이 아니라 성실로 만들어낸 거죠.”라고 답했다.
그런 권민솔에게, 지난 시즌 주니어 그랑프리 오스트리아 대회의 실수는 일종의 ‘사건’이었다. 권민솔은 쇼트 프로그램의 트리플 플립-트리플 토룹 컴비네이션 점프에서 넘어지며 8위를 기록했다. 보기 드문 실수였다. 본인도 ‘진짜로 넘어진 게 맞나?’라고 생각했다.
“타면서도 계속, ‘정말 (넘어진 게) 맞나?’ 싶었어요. 정말 거의 없는 일이니까. 생각하다가 ‘진짜 미쳤나 보다. 이거 진짜 어떡하지?’ 이러면서 경기를 끝냈어요. 처음으로 너무 크게 실수해서 철렁했어요.”
하지만 다음 날의 권민솔은 달랐다. 프리 스케이팅에서 권민솔은 모든 점프를 성공하는 데 이어, 몰입도 높은 코레오그래픽 시퀀스로 2위를 기록했다. 전날의 실수를 완벽히 지우는 하루였다. 마인드 컨트롤의 비결을 묻자, 권민솔은 “그래도 해외 대회에 왔는데, 아무것도 안 들고 가면 너무 슬플 것 같아서…” 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너무 속상하기는 했는데, 슬퍼하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원래 하던 대로 최선을 다했던 것 같아요. 프리 (경기)를 들어가려고 하는데 딱 메달이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제발 꼭 (메달을) 땄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경기에 임했어요.” 그 결과 권민솔은 최종 순위 3위로 동메달을 획득한다. 바람이 꼭 이루어진 셈이다.
권민솔은 국제 무대 데뷔 시즌에 ‘왕중왕전’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에 진출했다. 김연아를 잇는 유일무이한 기록이다. 2023/2024 시즌도 절치부심하여 2년 연속으로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에 출전하는 성과에도 불구를 올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민솔이 스스로에게 주는 지난 시즌 점수는 ‘60점’이었다.
권민솔은 “아쉬운 경기가 좀 많았어요.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많이 남기도 해요.”라며 특히 동계 청소년 올림픽과 주니어 세계 선수권에 출전하지 못한 점을 아쉬워했다. 권민솔은 “특히 청소년 올림픽은 지금 밖에 못 나가는 대회이기도 했고, 선발전에서 약간 실수가 있어서 더 아쉬웠어요.”라며 “주니어 세계 선수권도 못 나가서 조금 아쉽긴 해도, 아직 주니어 시즌 많이 남았으니까. 내년에 더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어요.”라며 다음 시즌을 향한 또 다른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학업과 운동의 줄다리기
경기가 없던 이번 2~6월. 권민솔은 누구보다 바빴다. 학업과 운동의 중심을 찾기 위해 유독 더 분주했다. 교육부 주도로 올해 3월부터 ‘학생선수 최저학력제’가 시행되기 때문이다. ‘학생선수 최저학력제’는 2011년 3월 개정된 학교체육진흥법에 따라 학생선수가 일정 수준의 최저학력에 도달하지 못한 경우 경기대회 출전을 제한하는 제도이다. 초(4~6학년)/중/고교 학생선수가 모두 적용대상이며, 목동중학교 3학년 재학 중인 권민솔 역시 적용 대상이다. 중학생의 경우 국어/영어/수학/사회/과학 과목에서 학년 평균의 40%를 넘어야 하며, 한 과목이라도 해당 점수를 충족하지 못할 경우 대회 참가가 불가능하다.
1학기 성적에 따라 다음 시즌 경기 출전이 불가능할 수도 있기에 권민솔은 학업에도 힘을 쏟고 있다. 변주화 씨는 “민솔이가 (공부를) 엄청 열심히 하거든요. 그런데 평균이 너무 높으니까 힘들어요. 민솔이네 학교는 평균이 85점 이상이거든요.”라며 어려움을 토로했다.
모든 엘리트 스포츠 선수가 운동과 학업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어렵지만, 특히 피겨스케이팅은 아이스링크 대관 스케줄로 인해 어려움이 더 많다. 한정된 얼음을 여러 종목과 팀이 공유하니, 사정에 따라 빙상 훈련 일정이 특히 유동적이기 때문이다. 권민솔은 7살 때 선수로 전환하게 되면서 유치원을 그만두고 책을 읽으며 소양을 넓혔다. 초등학교에 입학 후에는 새벽 대관 후 등교하는 생활을 국가대표가 선발 직전까지 병행하며 선생님들이 좋아하는 ‘착실한 학생’이었다.
“새벽 4시에 일어나서 대관을 타고, 집에 돌아와서 학교를 갔어요.”라며 “민솔이는 피곤할 텐데도 졸지도 않고 열심히 (수업을) 들었죠. 민솔이가 굉장히 열심히 수업을 들었대요. 선생님들이 굉장히 좋아했어요. 열심히 듣고 착실하니까요.”
학교 수업 시간과 국가대표 훈련 시간이 겹치며 학교를 많이 갈 수 없는 상황이지만, 권민솔은 최선을 다해 학업과 운동 모두 소화하고 있다. 훈련 후에는 집에서 4시간씩 공부를 개별적으로 하고 있다. 변주화 씨는 “민솔이가 굉장히 묵묵하고 성실한 스타일이에요. 숙제도 굉장히 열심히 하요.”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 한편 “최저 학점이 되지 않으면 대회를 못 나가다 보니, 쉬는 시간이 많이 줄었어요.”라며 안타까움을 숨길 수 없었다.
다음 시즌을 위한 도약
“성적, 점수 같은 목표보다 스케이팅 스킬을 좀 더 향상시키고 싶어요. 그게 이번 시즌 가장 큰 목표예요.”
요즘 권민솔의 가장 큰 관심사는 스케이팅 스킬이다. 인터뷰 내내 스케이팅 스킬에 대한 그녀의 관심을 느낄 수 있었다. 2023년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에 대한 소감으로 우노 쇼마와 카기야마 유마의 스텝 시퀀스를 가장 먼저 언급할 정도였다. 현역 선수들에게도 어려운 종목인 아이스 댄스에 최근 푹 빠져있는 이유도 특별했다. ‘풍성한 표현력과 스케이팅 스킬’ 때문이었다.
권민솔은 스케이팅 스킬을 향상하기 위해, 국가대표를 위한 스케이팅 스킬 세션을 활용 중이다. 지난 4월 새로 도입한 이 훈련은 태릉 아이스링크에서 추가 대관 시간 동안 국가대표 선수들이 자유롭게 스케이팅 연습을 하는 세션이다. 권민솔은 지현정 코치의 지도 아래 동료 선수들과 스케이팅 스킬을 연마 중이다. 링크장에 3개의 턴을 그리며 크로스(*두 다리를 X 모양으로 교차하며 활주하는 피겨 스케이팅 기본 기술) 연습을 주로 하고 있다고 전했다.
새로운 시즌 프로그램도 그녀의 그러한 노력에 박차를 더하고 있다. 권민솔은 쇼트 프로그램으로 ‘제임스 본드’(안무: 미샤 지), 프리 프로그램으로 ‘로미오와 줄리엣’(안무: 신예지)을 선택했다.
쇼트 프로그램에서는 ‘제임스 본드’를 통해 강렬한 이미지를 표현한다. 지현정 코치의 추천으로 선곡한 ‘제임스 본드’ 프로그램에서 권민솔은 빠르고 강렬한 느낌을 전달하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영화 ‘007 시리즈’의 사운드트랙은 피겨스케이팅에서 김연아와 차준환이 사용하며 이미 많은 사랑을 받은 바가 있다. 두 선배의 프로그램과의 비슷한 점과 차이점을 묻는 말에, 변주화 씨는 “앞부분은 차준환 선수의 007 프로그램과, 뒷부분은 김연아 선수의 007 프로그램과 비슷한 느낌”이라고 답하며, “그렇지만 주니어이기 때문에 007 캐릭터의 느낌이 더 강한 작품”이라고 전했다.
휘몰아치는 쇼트 프로그램과 달리 프리 프로그램은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2013)’ OST인 ‘A Thousand Times Good Night’의 서정적인 선율을 메인 테마로 한다. 지난 2022년부터 추천 받았지만, 아직 부족한 스케이팅과 로미오와 줄리엣을 연기하기에는 아직 어린 나이를 이유로 한차례 정중히 고사한 바 있었다. 주니어 3년 차가 된 올해, 마침내 새로운 도전을 하기로 했다고. “서정적인 분위기로 음악이 좋아 기대가 많이 된다”라며 “시니어 버전에서는 스텝과 함께 섬세한 감정 연기를 선보일 예정”이라고 기대감을 드러냈다.
“2018년 종합선수권이 기억나요. 다들 많이 좋아하기도 했고, 우는 선수들도 많았어요. 그때는 어려서 그 상황들이 신기하고 ‘왜 울지?’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잘 알 것 같아요.”
피겨스케이팅 선수보다 화동으로 더 관중에게 익숙했던 권민솔. 당시 ‘화동’ 권민솔에게 가장 기억에 남은 대회는 2018년 목동에서 열린 종합선수권이었다.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 최종 선발전을 겸했던 종합선수권의 희비가 교차하는 상황들은 어린 화동에게 놀라우면서 의아한 기억이었다. 어쩌면 피겨 선수로서 본인이 앞으로 마주할 상황들을 미리 엿본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꼬마 화동은 이제 ‘피겨스케이팅 국가대표’가 되어, 그들을 이해할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얼음에 서 있는 것도, 예쁜 것도 좋아서 피겨스케이팅을 시작했다는 작은 아이. 얼음에 던진 고운 마음을 줍던 꼬마 화동. 그 권민솔은 이제 ‘정말 정말 좋지만 때로는 너무 힘들게 하는, 너무 힘들지만 떼려야 뗄 수 없는’ 피겨스케이팅을 마음에 품었다. ‘피겨스케이팅이 너무 좋아서, 피겨스케이팅을 더 잘하기 위해서’ 오늘도 링크장 안팎을 달리고 있는 권민솔은 앞으로도 자신의 노력을 바탕으로 피겨스케이팅에서 더 높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 나아갈 것이다. 팬들의 사랑을 전하던 권민솔에게 자신을 향한 사랑을 품기를 기원하며, 그녀가 만들어 나갈 새로운 성취와 성장의 이야기들을 고대한다.
기획 김현진 박지민
인터뷰 진행 김현진 박지민
촬영 및 사진 편집 박지민
촬영 및 영상 편집 이민정
검수 박지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