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웠던 무대에 불이 켜지는 순간, 작은 펭귄이 또렷하고 단단한 목소리로 외친다.
“나는 펭귄이다!”
그 한마디가 무대를 가득 채운다. 그리고 관객은 그 순간 직감한다. 이 이야기는 단지 동물들의 우화나 동심을 위한 판타지가 아니라, 누구나 마음속 깊은 곳에 품고 있는 외로움과 용기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을.

링크드림아트센터 2관에서 초연된 뮤지컬 <긴긴밤>은 루리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고립된 동물원을 탈출한 코뿔소 ‘노든’과, 그의 품에서 자라난 작은 펭귄이 함께 바다를 찾아가는 여정은 단순한 모험이 아니라 상실과 돌봄, 성장과 이별의 감정 스펙트럼을 섬세하게 펼쳐낸다.
줄거리는 단순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많은 것이 담겨 있다. “나는 펭귄이다!”라는 짧은 외침 속에는 자기 존재에 대한 명확한 선언이자, 아직은 작고 미약하지만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고자 하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다. 이 외침은 이후 이어지는 여정에 따뜻한 불빛처럼 깔리며, 극의 감정을 관통하는 선이 된다.

노든 역의 강정우 배우는 말수가 적은 코뿔소의 무게감을 절제된 감정으로 표현한다. 육중하고 무뚝뚝하지만 사실은 상처로 가득한 존재, ‘노든’은 펭귄이라는 새로운 생명과의 만남을 통해 조금씩 변화한다. 강정우의 연기는 그런 변화의 결을 섬세하게 따라가며 관객의 마음을 천천히 흔든다.
펭귄 역에는 뮤지컬 <마틸다>로 이름을 알린 설가은 배우가 청소년이 되어 처음으로 주요 배역에 참여했다. 알에서 깨어나 세상에 첫발을 내딛는 펭귄은 순수하고도 연약하지만, 뜻밖의 용기와 생명력을 지닌 존재다. 설가은은 맑고 안정된 목소리, 유연한 감정 표현으로 펭귄을 단순한 귀여운 존재를 넘어, 스스로를 증명해나가는 생명체로 그려낸다. 특히 무대 위에서 부르는 펭귄의 독백 같은 노래는 그 목소리만으로도 관객을 압도한다.

무대 표현도 돋보인다. 이 작품은 동물을 의인화하거나 인형으로 구현하지 않고, 소품을 통해 동물성을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코끼리의 코는 고무 파이프, 펭귄의 발소리는 캐스터네츠, 코뿔소는 커다란 여행 캐리어로 형상화되며, 무대 위 오브제들은 등장 동물들의 성격과 감정까지도 담아낸다. 간결한 무대 디자인과 절제된 조명, 효과음은 상상력을 극대화시키며 관객을 더욱 깊이 작품 속으로 끌어들인다.
등장인물 간의 관계도 촘촘하게 설계되어 있다. 앙가부와 윔보 역의 박근식 배우는 유연하고 생동감 있는 에너지로 무대의 흐름을 이끈다. 치쿠 역의 이규학 배우는 짧은 등장에도 불구하고 작품 전반의 정서에 깊은 흔적을 남긴다. 치쿠는 노든과 펭귄의 여정을 연결짓는 중요한 인물로, 그의 죽음은 상실의 무게를, 그가 남긴 알은 새로운 시작을 상징한다.
극이 후반으로 갈수록 감정의 깊이는 더욱 짙어진다. 특히 펭귄이 노든의 품을 떠나 바다를 향해 달려가는 장면은 그 자체로 클라이맥스다. 그 짧은 발걸음에는 두려움과 설렘, 이별과 용기가 동시에 담겨 있으며, 객석은 숨을 죽이고 지켜본다. 바다를 향해 가는 펭귄의 여정은 누군가의 품을 떠나 처음으로 세상을 마주하는 모든 존재들의 순간을 떠오르게 한다.

그리고 그 순간, 노든이 조용히 건네는 말.
“너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코뿔소야.”
이 한 문장은 단지 칭찬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절대적인 수용이며, 긴 밤을 함께 건너온 두 생명이 나누는 사랑의 완성이다. 닮지 않았지만 서로를 품었던 관계, 그 따뜻하고 단단한 연결이 관객의 마음을 조용히 두드린다.
뮤지컬 <긴긴밤>은 단지 아이들을 위한 공연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어른들에게 더 깊은 울림을 전하는 무대다. 누구나 한 번쯤은 외롭고 두려운 밤을 지나왔고, 어떤 존재와의 만남이 삶을 바꾸는 경험을 했기에, 이 작품은 관객 각자의 기억을 건드린다. 공연이 끝난 후에도 그 감정은 오래도록 마음속에 머무른다.
초연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치밀하게 구성된 극본, 배우들의 몰입도 높은 연기, 무대 위에 펼쳐지는 절제된 상상력은 <긴긴밤>을 단단하게 만든다. 관객은 그 긴 여정을 함께 건너며, 결국엔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펭귄이 바다를 향해 떠나가는 그 뒷모습에서 우리는 문득, 한 생명의 용기와 그것을 끝까지 지켜본 누군가의 사랑을 떠올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