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의 흐름을 뒤집은 인천상륙작전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세기의 작전으로 꼽힌다. 그러나 화려한 승리의 이면에는 이름도 군번도 없이 적지에 잠입해 첩보를 수행했던 이들의 희생이 있었다. 바로 미 극동군사령부 산하 비공식 정보부대 KLO(Korea Liaison Office), 일명 ‘켈로부대’다.

특히 여성 켈로부대원들은 ‘래빗(Rabbit)’이라는 코드명으로 불리며, 무기도 없이 적진을 넘나들며 정보를 수집했다. 생사의 기로에서 임무를 수행했지만, 전쟁 이후 오랫동안 역사 속에서 잊혔고 국가의 공식 기록에도 남지 못했다. 뒤늦게 참전유공자로 인정받았지만 그들의 존재는 여전히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인천 무대에 오른 창작뮤지컬 ‘켈로’
이 잊힌 소녀 첩보원들의 이야기가 창작뮤지컬 ‘켈로’로 무대에 올랐다. 인천중구문화재단(이사장 김정헌)이 제작하고, 콘티(Con.T)가 집필·연출을 맡은 작품으로, 2023년 시놉시스 공모와 2024년 비공개 쇼케이스 경연 등 엄정한 심사를 거쳐 3년여 제작 과정을 통해 탄생했다. 인천상륙작전 75주년을 앞둔 9월 5일부터 7일까지 인천중구문화회관에서 공연돼 관객을 만났다.
뮤지컬은 2024년, 한 독립 방송국의 인터뷰로 시작한다. 한 노인이 조심스레 입을 열며 이야기의 시간은 1950년 여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강화도 출신 소녀 용주와 여섯 명의 소녀들이 켈로부대에 자원하면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평범한 소녀들, ‘래빗’으로 불리다
무전기 다루는 법도, 지도 읽는 법도 서툰 소녀들에게 주어진 이름은 단 하나, ‘래빗’. 그들은 낯선 미군 요원 제임스와 부딪히며 티격태격하는 과정에서 점차 전우애를 쌓아간다. 낙하산 훈련에서 피어나는 소박한 꿈, 작전 속에서 빛나는 용기, 그리고 돌아오지 못한 이름들까지. 작품은 영웅담보다는 평범한 소녀들이 성장하고 소멸해 가는 순간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무대 위 소녀들은 단순히 전쟁의 도구가 아니다. “어느 날 갑자기 우리 마을 하늘을 뒤덮은 비행기 부대, 떨어지는 폭탄”이라는 가사로 전쟁의 참혹함을 증언하고, “가만히 있다 죽을 바엔 내 손으로 싸우다 죽자”라며 첩보 임무에 뛰어든다. 그리고 “내가 진짜 영웅이란 걸 보여줄 거야”라고 노래하며 전쟁의 또 다른 얼굴을 관객에게 각인시킨다.

전쟁과 인간, 두 얼굴을 담아낸 무대
‘켈로’의 무대는 전투를 직접적으로 재현하기보다는 상징적 장치를 통해 긴박한 분위기를 구현한다. 어둠 속에서 번쩍이는 불빛은 인천상륙작전의 숨은 활약을 상징하며, 무대 뒤편에서 울려 퍼지는 포성·낙하산 낙하음·무전음은 당시 상황을 사실감 있게 살려낸다.
그러나 작품이 궁극적으로 전하려는 것은 전쟁의 영광이 아니다. 관객은 무대 위에서 웃고, 겁내고, 그리워하고, 사랑했던 평범한 소녀들의 감정을 마주한다. 이 순간 ‘첩보’라는 긴박한 소재가 인간적인 이야기로 전환되며, 영웅과 피해자가 공존하는 전쟁의 복잡한 현실이 드러난다.
인천, 기억의 공간에서 울린 노래
작품은 인천이라는 공간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인천은 승리의 도시인 동시에 폭격으로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된 장소다. 특히 월미도는 작전 성공을 위한 전략적 요충지였으나, 주민들이 삶의 터전을 잃은 비극의 현장이기도 했다. ‘켈로’는 이 양면성을 무대에 담아내며, 승리를 기념하는 동시에 피해자의 목소리를 환기시킨다.

배우들의 호연, 관객의 공감
이번 무대에는 뮤지컬 ‘마틸다’에서 주목받은 아역배우 임하윤과 하신비가 소녀 첩보원으로 출연해 순수하면서도 강인한 에너지를 전달했다.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로 유명한 존 아이젠은 미군 요원 제임스를 맡아 낯선 언어와 문화 속에서 소녀들과 유대감을 쌓아가는 인물을 진중하게 그려냈다. 신현묵, 박가람, 박찬양 등 실력파 배우들이 합류해 무대의 밀도를 높였다.
공연 내내 객석은 숨죽인 긴장과 따뜻한 공감이 교차했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돌아오지 못한 소녀들의 빈자리와 남겨진 이들의 슬픔이 교차하는 순간, 관객은 긴 박수로 응답하며 잊혀진 이들의 존재를 함께 기억했다.
기억을 새기는 창작뮤지컬
뮤지컬 ‘켈로’는 단순한 전쟁 드라마가 아니다. 탄탄한 자료조사와 창작진의 상상력이 어우러져 관객에게 ‘첩보전’의 긴장감 속에서도 인간적인 순간을 전달한다. 우리는 그들을 영웅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그들은 웃고 싶고, 두려움에 떨고, 가족을 그리워했던 평범한 소녀들이었다.
인천상륙작전 75주년을 앞두고 무대에 오른 ‘켈로’는 과거의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불러내며, 오늘의 우리가 기억해야 할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누구를 기억해야 하는가?” 그 답은 무대 위 소녀들의 노래 속에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