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산한 눈발과 하얀 자작나무가 뒤덮은 무대 위, 인간과 뱀파이어의 애틋한 사랑이 되살아났다.
7월 8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열린 연극 <렛미인>의 프레스콜 기자간담회 현장. 2016년 국내 초연 이후 9년 만에 돌아온 이 작품은, 스코틀랜드 국립극단의 오리지널 프로덕션을 그대로 재현한 ‘레플리카 프로덕션’으로 국내 관객들을 다시 만난다. <렛미인>은 생존을 위해 피를 마셔야 하는 뱀파이어 소녀 ‘일라이’와, 학교 폭력에 시달리는 외로운 소년 ‘오스카’의 기이하면서도 애틋한 사랑을 그린다.
코로나19로 2020년 재공연이 무산되며 아쉬움을 남긴 바 있는 이 작품은, 약 1,200여 명이 몰린 오디션 끝에 일라이 역에 권슬아·백승연, 오스카 역에 안승균·천우진이 캐스팅됐다. 하칸 역에는 조정근, 지현준이 출연한다. 신시컴퍼니와 국립극장이 손잡은 이번 시즌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8월 16일까지 이어진다.




이지영 연출가는 “9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올리게 되어 감격스럽다”며 “이번 시즌은 특히 움직임이 뛰어난 배우들이 함께 해 무대의 감정과 리듬이 더욱 풍부해졌다”고 말했다. 무브먼트 디렉터 김준태는 “프리뷰 공연부터 배우들이 땀을 쏟으며 준비했다. 10년 전 초연보다 더 섬세하고 밀도 있는 작품이 될 것”이라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570:1의 경쟁률을 뚫고 일라이 역에 발탁된 신예 백승연 배우는 “16살 때 이 공연을 보고 연극 배우를 꿈꿨다. 10년 뒤 그 무대에 서게 돼 매일 꿈꾸는 기분”이라며 벅찬 소감을 전했다. 그는 “사실 지난 2020년 시즌에 최종까지 갔다가 탈락한 경험이 있다. 이후 신시컴퍼니 홈페이지를 매일같이 들여다보며 오디션 공고를 기다렸다”며 웃음을 자아냈다. “이 작품과 인연이 있다면 언젠가 만나겠지”라는 간절함이 결국 무대에 닿은 셈이다.
함께 일라이 역을 맡은 권슬아 배우는 “5년 전 팬데믹으로 무산됐던 무대가 다시 올려져 감회가 깊다”고 말했다. 두 배우는 ‘인간이 아닌 존재’의 비인간적인 움직임과 말투를 구현하는 데 집중했다고 설명하며, 무대 위에서 점차 감정에 물들어가는 일라이의 변화가 관전 포인트라고 전했다. 이지영 연출은 “두 배우가 오디션장에 들어오는 순간, 연출진 모두가 동시에 ‘일라이들 왔다’고 적었다”고 회상하며 웃음을 더했다.


마찬가지로 310:1이라는 치열한 경쟁을 뚫고 캐스팅 된 오스카 역의 천우진은 “소년이 가진 희망과 사랑, 기대를 섬세하게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했으며, 초연 당시 같은 역할을 맡았던 안승균은 “10년 만에 다시 만난 오스카는 더욱 사랑스러운 인물이었다”며 연기적 접근에 대한 성숙한 고민을 나눴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배우들의 움직임이다. 춤을 추듯 절제되고 유려한 몸짓은 언어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이들의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흩날리는 눈발, 하얀 자작나무로 꾸며진 무대는 고독과 차가움을 상징하며, 각기 다른 연령대의 인물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외로움과 마주하고, 구원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극 전반에 걸쳐 피가 직접적으로 묘사되는 장면이 포함되어 있어, 잔혹한 이미지에 민감한 관객이라면 관람 전 유의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설정 또한 캐릭터 내면과 서사의 감정 곡선을 끌어올리는 장치로, 단순한 자극보다는 뱀파이어인 일라이의 고독을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프레스콜에서 공개된 1막 일부만으로도 일라이가 인간의 감정을 배우고, 그로 인해 좌절하며 변화하는 여정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소녀의 모습 아래 수백 년의 세월을 품은 존재와, 일라이의 ‘내가 남자여도 좋냐’는 질문에도 긍정하는 오스카의 사랑은 어쩌면 ‘구원은 어디서 오는가’에 대한 질문일지도 모른다.
연극 <렛미인>은 단순한 뱀파이어 로맨스를 넘어, 외로움과 사랑, 구원과 욕망에 대해 날카롭게 파고든다. 특히 각자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인간 군상이 그려내는 감정선은, 무대라는 공간이 줄 수 있는 가장 근원적인 감동을 선사한다. 두 일라이, 두 오스카,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어른들의 이야기. 2막이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