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자리에서 한 걸음 벗어나는 선택은 언제나 새로운 긴장을 동반한다. 데뷔 이후 약 30년 동안 드라마와 영화, 뮤지컬 무대를 오가며 탄탄한 연기 내공을 쌓아온 배우 오승윤에게도 이번 작품은 그런 의미의 도전이다. 오랜 시간 연기를 해왔지만, 연극이라는 형식은 처음이기 때문이다. 그가 선택한 첫 연극 작품은 실존 음악가들의 이야기를 다룬 연극 <슈만>이다.
<슈만>은 19세기 독일 뒤셀도르프를 배경으로 음악가들의 삶과 관계를 조명하는 작품이지만, 단순히 시대적 인물을 재현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인물의 감정과 선택, 그리고 말로 다 설명되지 않는 순간들을 따라가며 관객에게 조용한 여운을 남기는 공연이다.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무대 위에서 배우는 감정을 직접 드러내기보다 호흡과 시선, 미묘한 변화로 관객을 설득해야 한다. 오승윤 역시 이번 작품을 통해 익숙했던 연기의 방식과는 다른 결의 접근을 마주하게 됐다.
첫 연극 무대를 준비하며 느낀 변화와 고민, 인물을 이해해가는 과정에서 발견한 새로운 감정들, 그리고 무대 위에서 관객과 마주하며 체감하고 있는 순간들까지. 브람스 역으로 공연 중인 오승윤을 만나 이번 작품을 통해 그가 마주한 이야기들을 직접 들어봤다.



문화포커스 (이하 ‘문’) : 연극 <슈만>에 대해서 소개해주세요.
오승윤 (이하 ‘승윤’) : 연극 <슈만>은 1853년 독일을 배경으로 한 로베르트 슈만과 클라라 슈만, 그리고 브람스 세 인물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극으로, 클래식을 곁들인 공연이에요.
문 : 이번에 요하네스 브람스 역할을 맡으셨어요. 브람스는 어떤 인물인지 소개해주실 수 있을까요?
승윤 : 브람스는 그 시대의 천재 음악가이자 지휘자, 그리고 피아니스트이고요. 굉장히 감정에 솔직한 편이에요. 정제되지 않은 솔직함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청년입니다.
첫 연극, 새로운 언어를 만나다
30년의 연기 경력을 지닌 배우 오승윤에게도 연극은 새로운 도전이다. 익숙한 무대와는 다른 호흡 속에서 그는 또 다른 방식의 연기를 마주하게 됐다.


문 : 30년 동안 연기를 하셨는데 연극은 처음이에요. 어떻게 <슈만>에 함께하게 되셨나요?
승윤 : 작년에 <다시, 동물원>이 끝나고 뮤지컬이랑 연극을 한두 작품 정도 제안 받았었는데요. 제가 2023년에 <슈만> 초연을 봤었거든요. 그때 느낀 게 익숙한 정서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색다른 웰메이드 느낌이 있었어요. 드라마적인 측면도 강했고, 이일화 선배님이랑 박상민 선생님의 공연을 보면서 선생님들과 함께 공연하면 너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참여하게 됐습니다.
문 : 초연을 보셨었군요. 초연과 이번 시즌 공연의 다른 점이 있을까요?
승윤 : 우선 인물들이 좀 더 입체적으로 바뀌었고, 표면적으로는 브람스의 나이가 조금 더 올라갔다는 점이 다른 것 같아요. 슈만의 나이는 조금 더 내려왔고요. 내용은 거의 바뀐 게 없지만 브람스의 경우 수동적인 인물에서 조금 더 능동적인 인물로 바뀐 것 같아요. 감정이 들쑥날쑥하지만 그래서 더 매력이 있는 것 같기도 해요.
문 : 이번에 연극을 준비하면서 새롭게 발견한 부분도 있을까요?
승윤 : 인터뷰 때 많이 물어보시는 부분인데요. 뮤지컬은 노래의 힘이 굉장히 강해서 가사를 통해 인물들의 속마음을 다 표현하잖아요. 사랑한다고 하지만 사랑하지 않는 척한다든지 그런 감정들을 노래로 풀어내는데, 연극의 서브텍스트는 정말 행간으로 남아 있으니까 이걸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지 그 정도를 찾아가는 과정이 조금 어려웠던 것 같아요. 너무 많이 표현하면 사족처럼 보일 수 있고, 너무 숨겨도 비약이 될 수 있잖아요.
문 : 연극이 뮤지컬보다 좀 더 많은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것 같아요.
승윤 : 집중은 뮤지컬에서 노래할 때도 굉장히 많이 하는데, 연극은 다른 포커싱으로 집중해야 하는 것 같아요. 내면에 숨겨진 감정을 적절히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죠.
문 : 슈만의 이야기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잖아요. 처음 보시는 관객분들이 조금 더 쉽고 재미있게 볼 수 있는 관람 포인트가 있을까요?
승윤 : 일단 익숙한 배우들이 출연한다는 점이 있고요. 중장년층 이상의 관객분들은 정애연 배우님이나 김정화 배우님, 그리고 ‘장군의 아들’ 박상민 선생님을 보시면 친근함을 느끼실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내용이 처음부터 끝까지 연결되거든요. 중간중간 클래식 음악도 흘러나와서 조금 덜 지루하게 보실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랑과 헌신, 서로 다른 선택의 방식
<슈만>은 관계 속에서의 선택과 감정의 방향을 따라가는 작품이다. 인물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감정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관객마다 다른 여운을 남긴다. 오승윤 역시 작품을 통해 사랑과 헌신에 대해 다양한 시선을 마주하고 있다고 전했다.



문 : 로베르트와 클라라, 브람스 이 세 사람의 관계가 약간 복잡하게 얽혀 있잖아요. 세 사람의 관계를 어떻게 봐야 할까요?
승윤 : 이 극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이기도 한데요. 세 사람의 관계는 ‘헌신’으로 묶여 있다고 생각해요. 음악에 대한 헌신, 스승에 대한 헌신, 그리고 사랑에 대한 헌신까지… 각자의 방식으로 풀어가는 헌신이 세 사람의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같아요.
문 : 극 중에서 브람스는 클라라를 사랑하고 어떤 이유로든 그 사랑을 포기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는데 마지막에는 클라라를 떠나는 선택을 해요. 갑작스럽게 변화한 이유가 있을까요?
승윤 : 그렇지 않아도 그 변화의 포인트를 관객에게 설득하는 부분에서 치열하게 이야기를 나눴던 것 같아요. 감정적인 다툼이라기보다 극적 해석을 위한 논의였는데요. 중요한 건 절대 포기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사랑에 대한 헌신을 다른 방향으로 해석한 거죠. 브람스는 주고받는 사랑이나 받으려는 사랑이 아니라, 주는 것 자체로 만족하는 사랑을 선택한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문 : 그럼 만약 승윤님이 브람스의 입장이었다면 같은 선택을 했을 것 같아요?
승윤 : 음… 애초에 이런 상황이 오지 않았을 것 같아요.(웃음) 그래서 상상하기는 조금 힘들 것 같아요. 법적 논쟁으로 번질 수도 있는 일이라서…
문 : 특히 이 극 안에서 ‘사랑’과 ‘헌신’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것 같아요. 승윤님이 생각하는 사랑과 헌신은 어떤가요?
승윤 : 부모와 자식 간의 헌신은 분명 있다고 생각하고요. 그 외의 관계에서는 서로에게 이득이 된다면 우정이든 사랑이든 관계를 맺는다고 생각해서 저는 사랑은 주고받는 게 맞다고 느껴요. 그래서 사랑과 헌신이 조금 다르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음악이 감정을 대신하는 순간
이 작품에서 클래식 음악은 인물의 감정을 따라 흐르는 중요한 요소로 사용된다. 실제 연주 장면이 포함된 무대는 배우의 감정선과도 긴밀하게 맞물리며 극의 분위기를 완성한다.




문 : 실제 음악가들의 이야기이기도 한데 클래식 음악이 연기에 영향을 많이 줬나요?
승윤 : 많이 줬죠.
문 : 어떤 부분에서요?
승윤 : 브람스의 실제 연주곡인 헝가리 무곡을 클라라와 포핸드로 치는 장면이 있어요. 또 클라라를 위해 자장가를 연주하기도 하는데, 그때 음악을 통해 순간적으로 뜨거워지는 사랑의 감정과 이 여성을 위해 무언가 해주고 싶은 몽글몽글한 감정이 생기거든요. 음악이 절대적으로 영향을 주는 것 같아요.
문 : 극 중에서 클래식 음악이 굉장히 많이 사용돼요. 클래식 음악이 나오는 장면들 중 꼭 주목해서 봐야 할 장면이 있을까요?
승윤 : 헝가리 무곡을 다시 이야기하게 되는데요. 그냥 들었을 때는 잘 모르실 수 있지만 제가 혼자 연주할 때랑 클라라와 함께 연주할 때, 그리고 클라라가 혼자 연주할 때도 있거든요. 그 세 번의 연주가 다 달라요. 그래서 헝가리 무곡을 연주할 때마다 다른 감정이 들기도 하고, 특히 포핸드로 연주할 때는 조금 더 쌓여 있는 감정을 음악을 통해 느끼실 수 있어요.
문 : 그러면 승윤님 개인적으로 애착이 가는 장면이 있을까요?
승윤 : 브람스가 클라라를 위해 자장가를 연주해주는 장면이요. 그 장면이 개인적으로 보기에도 너무 예쁘고, 그때가 클라라를 향한 브람스의 마음이 가장 절정에 이르는 변곡점인 것 같아요.
문 : 그러고 보니 <너에게 빛의 속도로 간다>, <다시, 동물원>, 그리고 <슈만>도 모두 실제 인물을 모티브로 한 극이에요. 실제 인물을 무대로 가져올 때 고민이 있었을 것 같은데 어떤 방식으로 표현하고자 하셨을까요?
승윤 : ‘나 때문에 이분들의 명성을 해치면 안 되는데…’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드는 것 같아요. 그 고민이 실제로도 엄청 크고요. 편향적으로 보이지 않도록 열린 캐릭터로 만들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브람스 같은 경우는 다른 작품의 인물들에 비해 비교적 편했던 부분도 있었어요. 시대적으로도 오래된 인물이고 나라적으로도 멀리 있고, 브람스에 대한 정보가 생각보다 많지 않거든요. 그래서 오히려 조금 더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부분도 있었던 것 같아요.



문 : 이번 연극에는 박상민 배우가 원캐스트로 참여하고, 클라라 역에는 정애연·김정화 배우가 더블 캐스트로, 브람스 역에도 승윤 배우님과 김이담 배우님이 더블로 참여해 회차가 많은데요. 체력적으로나 연기적으로 부담은 없으신가요?
승윤 : 체력적으로 걱정이 될 법할 때 원캐스트인 박상민 선생님을 보면서 감히 제가 체력적으로 엄살을 부릴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고요.(웃음) 부담이 없진 않지만 부담을 느껴도 안 되는 상황인 것 같아요.
연기적으로는 브람스가 혼자 극의 분위기를 환기시켜야 하는 장면들이 있는데, 애드리브로 채워야 하는 부분도 있어서 매번 조금씩 다르게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어요. 여러 번 보시는 관객분들께 다른 재미를 드리고 싶어서 계속 고민하고 있습니다.
문 : 애드리브는 미리 생각해 오시는 편인가요, 아니면 즉흥적으로 나오는 편인가요?
승윤 : 무대 뒤에서 정말 많이 생각하긴 하는데 상황이나 분위기에 따라 순간적으로 바뀌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문 : 다른 배우분들은 전혀 모르시는 거 아닌가요?
승윤 : 전혀 모르죠.(웃음)
문 : 더블 캐스트인 김이담 배우님과는 두 번째 작품이에요. 연습 과정에서 도움이 많이 되었을 것 같은데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을까요?
승윤 : 연습이 끝나면 거의 매일 같이 밥을 먹거나 맥주 한잔하면서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서로를 잘 알다 보니까 캐릭터 분석이나 이야기들이 잘 통했던 것 같아요. 스스럼없이 의견을 나눌 수 있어서 오히려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문 : 두 분이 표현하는 브람스의 해석 차이도 있을까요?
승윤 : 개연성을 찾아가는 과정은 함께 고민했는데, 초반의 밝은 브람스와 후반의 감정 농도에서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김이담 배우 특유의 러블리함이 초반에 잘 드러나고, 후반으로 갈수록 또 다른 묵직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것 같아요. 무대에서 저와 이담 배우의 전혀 다른 매력을 보실 수 있을 거예요.


문 : 피아노 연주 장면도 인상적이었는데 표현적으로 고민했던 부분이 있었을까요?
승윤 : 연습 전에 한두 시간씩 피아노를 치는 시간을 가졌고요. 실제 피아니스트들의 영상을 보면서 많이 연구했어요. 손 위치나 각도 같은 세밀한 부분을 계속 연습하다 보니 점점 자연스러워졌던 것 같아요.
문 : 원래 피아노를 칠 줄 아셨어요?
승윤 : 아니요. 한두 달 정도 배워본 게 전부예요.
문 : 한두 달 배운 것 치고는 싱크가 잘 맞던데요?
승윤 : 그 공부를 계속 했거든요.
문 : 극 중에서 클라라에게 뺨을 맞는 장면도 있어요. 굉장히 아파 보이던데요.
승윤 : 아파요.(웃음) 진짜 맞았네 싶을 정도로 아픈데, 연습 때는 한 번도 맞아본 적이 없거든요. 보통 점점 덜 아파져야 하는데 오히려 점점 힘이 실리는 이유는 뭘까요?
문 : 감정이 올라와서 그런 거 아닐까요?
승윤 : 그런 것도 있는 것 같긴 한데… 언젠가는 덜 아픈 순간이 오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습니다.(웃음)
문 : 승윤님이 생각하기에 작품 속에서 기억에 남는 대사나 브람스라는 인물을 보여주는 대사가 있는지 궁금해요.
승윤 : 브람스의 대사보다 클라라의 대사가 기억에 남아요.
“브람스는 죽을 때까지 헌신하겠다던 그의 말에 책임졌다. 그는 내가 죽는 날까지 그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았다.”
이 대사가 브람스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가장 잘 설명해주는 것 같아요.
문 : 마지막으로 이 시대에 <슈만>을 통해서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을까요?
승윤 :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으로서의 헌신이라고 생각해요.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 각자의 꿈이나 사랑, 가족에게 모두 다르다는 점이요. 관객분들도 공감하실 수 있는 부분이 많을 거예요.
신기했던 건 남성 관객분들과 여성 관객분들이 보고 느끼는 감정이 전혀 다르다는 점이었어요. 눈물이 터지는 포인트도 꽤 다르다는 게 신기하고 재미있는 것 같아요.
연극 <슈만> 속 브람스가 선택한 사랑은 소유가 아닌 머무름과 떠남 사이 어딘가에 놓인 헌신에 가깝다. 오승윤 역시 인물을 연기하며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체감했다고 말했다. 같은 장면을 바라보면서도 관객마다 눈물이 터지는 순간이 서로 다르다는 점은, 이 작품이 각자의 삶과 감정에 맞닿아 있음을 보여준다.
첫 연극이라는 수식어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새로운 방식의 감정을 받아들이려는 배우의 태도다. 음악과 침묵, 그리고 말해지지 않은 마음들이 교차하는 무대 위에서 그는 지금도 브람스라는 인물을 통해 또 다른 감정을 발견해가고 있다.
연기 인생 30년의 시간 끝에서 시작된 또 하나의 ‘첫 무대’. <슈만>은 배우 오승윤에게 익숙함을 벗어나 다시 배우로 서는 순간이자, 앞으로의 무대를 향한 새로운 가능성으로 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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