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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주보지 않았기에 비로소 보이는 ‘햄릿’…연극 ‘엘시노어’의 허영손·강은빈

by 이민정
2026년 03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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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희곡 중 하나인 ‘햄릿’의 시작은 다음과 같다.

어두운 밤, 덴마크 엘시노어 성을 지키던 경비병들은 선왕의 유령을 목격하고 두려움에 떤다. 이 소식이 왕자 ‘햄릿’에게 전해지면서, 진상을 확인하기 위해 성벽을 찾은 햄릿은 마침내 선왕의 유령과 마주하고 비극의 서막이 오른다.

그리고 이 경비병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연극 ‘엘시노어’의 주인공 ‘버나르도’다. 비극의 시작을 여는 경비병을 모델로 한 연극 ‘엘시노어’가 대학로 무대에 올라 관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코믹하면서도 가볍지만은 않은 또 하나의 ‘햄릿’이다.

그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두 경비병 ‘버나르도’와 ‘프란시스코’를 맡은 허영손, 강은빈 배우를 만나 이야기를 나눠 보았다.

연극 '엘시노어'에 출연 중인 배우 허영손과 강은빈 | 사진 = 이지윤 기자
연극 '엘시노어'에 출연 중인 배우 허영손과 강은빈 | 사진 = 이지윤 기자
연극 '엘시노어'에 출연 중인 배우 허영손과 강은빈 | 사진 = 이지윤 기자
연극 '엘시노어'에 출연 중인 배우 허영손과 강은빈 | 사진 = 이지윤 기자
연극 '엘시노어'에 출연 중인 배우 허영손과 강은빈 | 사진 = 이지윤 기자
연극 '엘시노어'에 출연 중인 배우 허영손과 강은빈 | 사진 = 이지윤 기자
연극 '엘시노어'에 출연 중인 배우 허영손과 강은빈 | 사진 = 이지윤 기자
연극 '엘시노어'에 출연 중인 배우 허영손과 강은빈 | 사진 = 이지윤 기자

‘햄릿’을 비추는 두 병사의 무대

 

문화포커스(이하 ‘문’) : 연극 ‘엘시노어’에 대해서 먼저 소개해 주실 수 있을까요?

허영손(이하 ‘영손’) : 저희 ‘엘시노어’는 ‘버나르도’와 ‘프란시스코’라는 두 병사가 ‘햄릿’의 이야기를 쫓는 이야기입니다. ‘햄릿’을 다룬 이야기지만 ‘햄릿’이 주인공은 아니고, 두 병사의 추적과 선택을 따라가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은빈(이하 ‘은빈’) : 그리고 그 안에서 ‘햄릿’의 장면들도 재연하고 있기 때문에, 중간중간 원전의 재미도 살려 놓은 공연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문 : 원작을 연기한다는 점이 정말 재미있었어요. “아, 이래서 연기력이 좋은 분들이 모인 공연이구나” 싶었습니다. 각자 맡으신 역할 소개도 한마디씩 부탁드려도 될까요?

은빈 : 저는 ‘프란시스코’ 역할을 맡았는데요. ‘프란시스코’는 조금 가벼운 느낌도 있고, 자기 자신에게 조금 취해 있는 모습도 있으며, 현실적으로 머리가 빠릿빠릿 돌아가는 친구예요. 그래서 어떤 사건이 생기면 “이걸 어떻게 활용해 볼까”를 고민하는 사람입니다.

영손 : 제가 맡은 ‘버나르도’는 조금 모자라 보일 수 있지만 정의롭고, 아주 활기찬 에너지를 가진 인물입니다.

문 : 제가 ‘엘시노어’를 보면서 느꼈던 건, 원작의 장면을 잘 살리면서도 코미디적 요소를 놓치지 않는 굉장히 영리한 공연이라는 점이었어요. 다만 그 균형을 잡는 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 같은데, 이 작품을 하시면서 특별히 중점을 두고 연기한 부분이 있다면 어떤 부분일까요?

영손 : 아무래도 장르가 코미디다 보니까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는 것 같았어요. 인물을 우습게 그린다든가, 웃음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 인물을 만들어 가는 식의 함정이요. 그래서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조금 모자라 보일 수 있겠지만, 인물을 연기하는 마음만큼은 진지하게 가져가려고 했던 것 같아요. 유령을 보고 무서워하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울 수는 있는데, 유령을 보고 우스꽝스럽게 무서워하는 건 코미디가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그 점에서 장르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은빈 : 저도 덧붙여서 말씀드리면, 연출님께서 마음 놓고 코미디적으로 열어 주신 구간들이 몇 군데 있는데 그 외의 부분에서는 특히 조심하려고 했어요. 우리가 정확한 리딩이 안 된 상태에서 웃기려고만 한다든지 하는 건 최대한 배제하려고 했고요. 특히 저희가 고정 페어로 처음 시작했지만 중간에 다른 배우들과 함께 공연하기도 하다 보니까, 각 배우마다 호흡이 다르잖아요. 그래서 제 것만 챙기고 가면 흐트러지는 순간이 많아서, 각 배우에 맞게, 그리고 작품을 흐리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같이 갈 수 있도록 노력했던 것 같아요.

문 : 그 고민이 실제로 공연에서 느껴지는 것 같아요. 재미있지만 마냥 가볍게만 보이지는 않는 느낌이요. 그리고 작품에서 ‘햄릿’의 인물들도 연기하다 보니까, ‘햄릿’ 인물을 연기할 때는 원전 대사를 거의 그대로 사용하잖아요. 셰익스피어 대사 자체도 워낙 어렵고, ‘버나르도’와 ‘프란시스코’일 때와 ‘햄릿’의 등장인물을 연기할 때 어조가 굉장히 크게 바뀌는데, 연기할 때 어렵지는 않으셨나요?

영손 : 오히려 원전의 대사를 그대로 차용하는 부분이 더 쉬웠어요. 차라리 그건 양식이 완전히 정해져 있으니까요. ‘버나르도’와 ‘프란시스코’를 연기할 때는 배우 개인의 호흡을 섞으면서 최대한 편안하게 가야 했다면, 오히려 ‘햄릿’ 인물들은 구분이 명확하니까 그 선택 자체는 어렵지 않았거든요. 대신 그 안에서 ‘클로디어스’와 ‘레어티즈’를 구분하는 건 고민을 많이 했죠.

은빈 : 거기에 더해 연출님께서 디렉팅을 해 주실 때, 각 배우마다 어떻게 하면 더 잘 보일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더 잘 살아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계속 말씀해 주셨어요. 그래서 도움을 많이 받아서 엄청나게 어려운 부분으로 느껴지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

문 : 오히려 기준이 명확해서 더 좋았다는 말씀이시군요. 초반에 ‘버나르도’와 ‘프란시스코’가 대사를 주고받다 삼천포로 빠지는 장면이 있잖아요. 그 장면이 초반의 웃음 포인트인데, 그만큼 호흡도 굉장히 어려워 보였어요. 혹시 이 장면과 관련한 공연 중 에피소드가 있을까요?

영손 : 그런 건 있어요. 아무래도 저희가 친하다 보니까, ‘프란시스코’와 ‘버나르도’ 같은 장난을 평상시에도 많이 쳐요. 빠르게 주고받으면서요. 그러다 보니까 평상시에 우리가 장난치던 것처럼 한번 해보고 싶은 욕구가 생기는 거예요. 실제로 해보기도 했구요. 그런 것들을 실행할 수 있는 공연이어서 그게 기억에 남아요.

문 : 다음 질문이 그거였어요(웃음). 두 배우님이 절친으로 워낙 유명하시잖아요. 친하시니까 연기하기 편한 부분도 있을 테고, 반대로 어려운 점이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은빈 : 편한 부분은 정말 많고, 평소에도 저희가 장난치던 것들, 맛있는 거 먹으면서 “이거 너무 좋다” 하고 놀던 그런 감각들이 많이 묻어 나오는데요. 저 개인적으로 어려운 점을 꼽자면, 저는 무대 위에서 웃음을 되게 잘 참고 잘 안 웃는 편인데 형과 하면 그게 조금 힘들 때가 생기는 것 같아요. 매 장면마다 그런 건 아니지만, 공연마다 서로의 호흡과 목적이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거든요. 그럴 때마다 참기가 힘든 순간들이 있습니다.

영손 : 저도 마찬가지로 편한 건 너무 많아요. 연구해서 풀어야 되는 장면도 분명 있는데, 그런 것들이 친분 덕분에 많이 빨리 넘어간 것 같아요. 반대로 어려운 점은, 은빈이랑 할 때는 자꾸 틀을 벗어나고 싶은 욕망이 생겨요. 쉽게 말하면 더 까불고 싶어져요. 근데 은빈이랑 저나 둘 다 “배우의 개인적인 욕망이 틀보다 크면 안 된다”는 걸 구분하는 편이거든요. 그래서 분장실에서도 대사를 맞춰 보고 “이건 너무 갔지, 여기까지 가면 안 되겠지” 하면서 늘 브레이크를 걸어요. 그게 어렵죠. 왜냐하면 너무 하고 싶거든요. 또 친하니까 잘 받아주고요. 그래서 오히려 은빈이랑 할 때는 브레이크를 더 많이 걸어야 돼요. 순간순간 장난을 너무 치고 싶어서요.

은빈 : 맞아요. 그래서 언제 한 번은 형이 공연 끝나고 와서 “오늘 여기까지가 리미티드인 것 같다. 여기서 더 하려고 하면 안 될 것 같다”라고 이야기한 적도 있어요.

문 : 두 분이 “여기까지만”이라고 선을 정한다는 게 인상적이네요.

영손 : 그게 정답이라기보다는 제 취향인 것 같아요. 그런 식으로 텐션을 올리는 건 제 취향은 아니어서요. 물론 그 재미가 뭔지는 저도 알죠. 다만 이 공연에는 연출님이 열어 놓으신 장면들이 있거든요. 거기서는 마음껏 합니다.

문 : 대표적으로 어떤 장면들이 있을까요?

영손 : 암호 정하는 장면이나, 연기 연습하는 장면이요.

은빈 : 분장실에서 한 30분씩 고민하면서 짜요. 큰 틀을 좋은 걸 가져가면, 그 안에서 형이 좋은 소스들을 엄청 디테일하게 채워 줘서 잘 버무려지는 것 같아요.

연극 '엘시노어'에 출연 중인 배우 허영손과 강은빈 | 사진 = 이지윤 기자
연극 '엘시노어'에 출연 중인 배우 허영손과 강은빈 | 사진 = 이지윤 기자
연극 '엘시노어'에 출연 중인 배우 허영손과 강은빈 | 사진 = 이지윤 기자
연극 '엘시노어'에 출연 중인 배우 허영손과 강은빈 | 사진 = 이지윤 기자
연극 '엘시노어'에 출연 중인 배우 허영손과 강은빈 | 사진 = 이지윤 기자
연극 '엘시노어'에 출연 중인 배우 허영손과 강은빈 | 사진 = 이지윤 기자

두 명의 배우, 아홉의 인물이 만들어 내는 이야기

연극 ‘엘시노어’의 백미를 꼽자면, 두 명의 배우가 연기하는 ‘햄릿’속의 다양한 인물들이다. 배우들은 자신이 맡은 ‘버나르도’와 ‘프란시스코’ 외에도 7명의 다른 캐릭터들을 연기한다.

방금 전 친근했던 두 경비병들이 비극을 짊어진 ‘햄릿’과, 탐욕과 불안으로 얼룩진 ‘클로디어스’로 순식간에 바뀌는 장면들은 감탄을 자아내게 만든다. 하지만 장치의 변화나, 의상의 변화도 거의 없이 오롯이 자신들의 연기력으로만 보여줘야 하는 장면. 그만큼 어려움도 많지 않을까.

 

문 : 각각 ‘햄릿’의 등장인물들을 다양하게 연기하시잖아요. 연기하는 역할 중에 가장 좋아하는 역할이 있을까요?

은빈 : 저는 ‘햄릿’이요. ‘햄릿’을 할 때가 좋고, 또 제가 셰익스피어를 이번에 처음 하기도 하다 보니까 ‘햄릿’ 관련된 부분이 특히 흥미롭게 다가왔던 것 같아요.

영손 : 저는 사실 ‘오필리어’를 좋아하는데요. 제가 어디서 ‘오필리어’를 해보겠어요? 그래서 지금도 제가 ‘오필리어’를 연기한다는 게 신기해요. 물론 극중극이라는 조건이 있긴 하지만, ‘오필리어’를 맡아 보기란 쉽지 않잖아요. 평생 만날 수 없는 역할이라고 생각했는데, 짧지만 정말 좋아하고요. 그리고 원래 ‘햄릿’이라는 인물을 제일 좋아하긴 하는데, 이번 ‘엘시노어’를 하면서는 ‘클로디어스’도 마찬가지예요. 제 나이에 절대 쉽게 시켜주지 않을 역할인데, 그걸 할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하고 재미있고, 아예 만나 보지 못한 인물들이라서 애정이 많이 가는 것 같아요.

문 : 공연을 보면 기둥을 사용해서 순식간에 다른 인물로 변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와 관련한 에피소드가 있을까요?

은빈 : 처음에 이 기둥을 활용해서 표현하기까지 고민이 정말 많았어요. 마스크를 들고 한다, 망토를 두르고 한다, 조명으로 한다 같은 선택지가 굉장히 많았거든요. 그중에서 가장 직관적이고 가장 잘 보일 수 있는 게 무엇일까를 두고 고민한 시간이 길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마지막에 연출님께서 “기둥으로 가 보자”라고 선택해 주셔서, 믿고 그렇게 하게 됐습니다.

문 : 그 기둥이 정말 사람 하나 겨우 숨을 정도로 좁은 공간인데, 빠르게 바뀌시는 게 놀라워요.

영손 : 기세죠. 무대는 정말 리얼리티한 공간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의 생태를 완벽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상황에 놓일 때가 많아요. 공간은 제약이 있고, 조명의 에어리어를 지켜야 하고, 음악 큐를 맞춰야 하고, 아무리 인물의 욕구가 올라와도 정해진 대사를 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가끔은 어떤 분석이나 연구보다 기세가 더 먹힐 때가 있는데, 저는 그게 이 기둥 장면이라고 생각해요.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이 “건너가면 ‘햄릿’”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은빈 : 그걸 배우로서 확실하게 믿고 가는 거죠.

영손 : 맞아요. 그런데 건너가기 전에 생각이 너무 많아지면, “건너갔는데 어떻게 ‘햄릿’처럼 보일까?”가 되어 버리거든요. 오히려 그게 더 어려워지게 만드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냥 믿는 거죠. 기둥을 건너가면 ‘햄릿’, 기둥을 건너가면 ‘클로디어스’.

문 : 무대의 힘을 믿는 거군요.

은빈 : 또 도와주는 것도 많고요.

영손 : 어차피 협업이기 때문에, 배우가 연기를 잘해서 그렇게 바뀌는 것처럼 보인다기보다 조명, 음향, 무대 세트가 다 같이 있는 거니까요.

문 : 2인극이지만 2인극보다 훨씬 더 풍부하고 재미있게 본 것 같습니다.

영손 : 등장인물이 많다 보니까요(웃음).

문 : 정말 많아요(웃음). 그러고 보면 강은빈 배우님은 얼마 전에 데뷔 7주년이셨죠. 축하드려요. 처음 연기해 본 셰익스피어는 어떤 느낌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은빈 : 감사합니다. 저는 매 순간, 매 작품마다 늘 새로웠거든요. 늘 도화지처럼 처음 하는 마음으로 접근하는 편이라서, 셰익스피어라고 해서 특별히 더 다르다기보다는 역시 또 다른 배움의 재미가 있었고, 플레이어로서 플레이하는 재미를 마음껏 느끼면서 행복하게 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문 : 다음에 도전해 보고 싶은 셰익스피어 작품이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은빈 : 저는 원래 늘 도전하는 걸 좋아하는데, 아직은 더 내공이 쌓이고 더 성장했을 때, 지금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햄릿’ 원작을 한번 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지금은 저희가 ‘햄릿’을 바라보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원작의 ‘햄릿’도 해 보고 싶어요.

영손 : ‘햄릿’ 잘할 것 같아요.

문 : 짧게 보여준 ‘햄릿’도 너무 멋지셨기 때문에 정말 기대가 됩니다.

은빈 : 지금 7주년이지만, 70년 동안 열심히 하다 보면 기회가 오겠죠.

영손 : 근데 너무 나이 들면 안 돼요. ‘햄릿’은 어려요. 빨리 해야 돼요.

은빈 : 그렇다고 제가 ‘햄릿’만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니고요. ‘폴로니어스’를 할 수도 있고요.

문 : 그것도 의미 있는 ‘폴로니어스’가 될 것 같아요. 그리고 이건 작품에 대해 개인적으로 궁금했던 건데요. ‘프란시스코’가  어떻게 덴마크로 오게 됐을지가 궁금했는데, 혹시 본인이 생각한 ‘프란시스코’의 전사(前事)가 있을까요?

은빈 : 완전히 개인적인 상상이긴 한데요. 대본에 나와 있는 건 없어서, 저는 ‘프란시스코’가 원래는 연극을 하던 사람이었고, 글도 쓰고 예술을 하던 사람이었다고 생각했어요. 영국에서 극단에 소속돼 있었는데, 극 중 대사 중에 “돈과 권력은 악당들이 다 가져가는 세상, 싹 다 바꿔 놓을 거야”라는 말이 있거든요. 그걸 보고 이 사람이 극단에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악당들에게 당해서, 거의 쫓겨나듯이 덴마크로 도망친 뒤 완전히 반대인 군인을 선택해서 지금 이 일을 하고 있다고 상상했어요. 그러면서도 그 안에서 계속 예전 세계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을 갖고 있지 않았을까 생각했습니다.

연극 '엘시노어'에 출연 중인 배우 강은빈 | 사진 = 이지윤 기자
연극 '엘시노어'에 출연 중인 배우 강은빈 | 사진 = 이지윤 기자
연극 '엘시노어'에 출연 중인 배우 허영손 | 사진 = 이지윤 기자
연극 '엘시노어'에 출연 중인 배우 허영손 | 사진 = 이지윤 기자

문 : 허영손 배우님은 이번이 셰익스피어를 재해석한 작품 출연이 벌써 세 번째잖아요. ‘줄리엣과 줄리엣’, ‘플레이 위드 ‘햄릿’, 그리고 이번 ‘엘시노어’까지요. 고전의 재해석이라는 점에서 늘 어려움도 있었을 것 같은데, 그럼에도 이번 작품에 참여하게 된 계기나 매력을 느낀 부분이 있다면요?

영손 : 사실 ‘줄리엣과 줄리엣’도 그렇고 ‘플레이 위드 햄릿’도 그렇고, 작업할 때 저는 “재해석”이라는 타이틀을 빼고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원작과 비교하기보다, 지금 내가 맡은 인물을 본연의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연기하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원작의 로미오는 이랬는데”라고 비교할 필요가 없는 거죠. 저는 그 작품 속 인물을 연기하는 거니까요. ‘플레이 위드 햄릿’도 마찬가지였어요. ‘햄릿’을 연기할 때도 있지만, 결국 ‘햄릿’ 안에 있는 조각들 중 하나이기 때문에 제가 맡은 조각에 충실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제 해석을 앞세우기보다, 연출님과 창작진이 만든 타임라인과 흐름 안에서 이게 본연의 작품이고 이전의 다른 역할은 없다고 생각하면서 작업했습니다.

문 : 그렇다면 이번에도 “이것은 오리지널이다”라는 마음으로 접근하신 거군요.

영손 : 그렇죠. 그리고 ‘줄리엣과 줄리엣’이나 ‘플레이 위드 햄릿’과 달리, ‘엘시노어’는 실제로 등장하는 두 병사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재해석이라기보다는 시선을 튼 작품 같았어요. 말씀하신 대로 스핀오프에 가깝죠. 그래서 더 흥미롭게 작업했던 것 같습니다.

문 : 맞아요. ‘엘시노어’의 ‘프란시스코’와 ‘버나르도’는 원작 ‘햄릿’ 첫 장면에 나오는 병사들이니까요. 오리지널에 가깝긴 하지만 ‘플레이 위드 ‘햄릿’에서도 ‘햄릿’을 연기해 보셨잖아요. ‘햄릿’ 선배로서 강은빈 배우의 ‘햄릿’을 평가해 본다면요?(웃음)

영손 : 제가 하나 꼴랑 더 했다고 선배라고 말하긴 그렇지만요(웃음). 은빈이 ‘햄릿’은 훌륭하죠. 일단 제가 본 ‘햄릿’ 중에서 가장 길고, 가장 잘생겼고요. 그리고 은빈이 연기 중에 제가 좋아하는 모먼트가 하나 있는데, 은빈이가 소리를 지르거나 감정적으로 많이 올라갔을 때 되게 연약한 톤이 나와요. 곧 부러질 듯한 톤이요. 그런데 그게 저한테는 “부러지지 않기 위해 발악하는 사람”처럼 들릴 때가 있어요. 그래서 그게 은빈이가 연기하는 ‘햄릿’, 그리고 ‘햄릿’이라는 인물과 너무 잘 맞는다고 느꼈어요.

문 : 맞아요. 저도 그 장면에서 정말 매력적인 ‘햄릿’이라고 느꼈어요.

은빈 : 감사합니다.

영손 : 사실 배움이라는 게 사람을 가두게 할 때도 있거든요. 그런데 은빈이 같은 경우는 연기를 제도 안에서 배워서 접한 게 아니라 본인이 스스로 뚫어낸 장르이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학습에 오래 노출된 사람은 잘 하지 못하는 선택들을 하게 되는 것 같고, 저는 그런 ‘햄릿’을 처음 봐서 더 매력적이었습니다.

문 : 그러면 이것도 아까 은빈 배우님께 드린 질문과 비슷한데, 셰익스피어 연극에 출연한다면 어떤 역할을 해 보고 싶으신가요?

영손 : 저는 어릴 때부터, 언젠가 나이가 좀 들고 계속 좋은 배우로 평가받으면서 잘 성장해 나간다면, ‘리어왕’을 꼭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문 : 저도 지금 ‘리어왕’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너무 잘 어울리실 것 같아요.

영손 : 제가 정말 좋아하는 공연 중 하나가 ‘마방진의 리어외전’인데요. 하성광 배우님을 보고 처음으로 리어왕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조씨고아’도 보고, ‘리어외전’도 여러 번 봤거든요. 아마 한 10년 전쯤부터 그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문 : 언젠가 꼭 하실 수 있으면 좋겠네요.

영손 : 그러니까 한 15년 뒤쯤이요.(웃음)

연극 '엘시노어'에 출연 중인 배우 허영손과 강은빈 | 사진 = 이지윤 기자
연극 '엘시노어'에 출연 중인 배우 허영손과 강은빈 | 사진 = 이지윤 기자
연극 '엘시노어'에 출연 중인 배우 허영손과 강은빈 | 사진 = 이지윤 기자
연극 '엘시노어'에 출연 중인 배우 허영손과 강은빈 | 사진 = 이지윤 기자

문 :  “혜화로운 공연생활”에서 강은빈 배우님께서 배역과 닮은 사람으로 허영손 배우님을 꼽으셨어요. 본인이 ‘버나르도’와 닮았다고 생각하시는지, 닮은 부분이 있다면 어떤 부분일지 궁금합니다.

영손 : 사실 리딩한 지 얼마 안 됐을 때도 은빈이가 형이랑 비슷한 게 많다고 얘기했었어요. 그런데 “닮았냐”는 질문은 조금 애매한 게, 제가 닮게 만들어 놓은 거지, 처음부터 그 인물이 저와 닮았다고 생각하며 작업한 건 아니었던 것 같아요. 다만 어떤 인물을 볼 때 나의 것을 녹일 수 있는 부분이 있고 없는 부분이 있는데, ‘버나르도’는 그런 지점이 좀 많았던 것 같아요. 하다 보면 “나 이런 적 있는데” 싶은 순간도 많고, 말투도 “얘처럼 말할 때가 있는데” 싶은 때가 많아요. 그래서 제가 만났던 역할들 중에서는 꽤 가까운 편이라고 생각해요.

문 : 그렇다면 ‘버나르도’와 나는 이건 정말 다르다고 느끼는 부분도 있을까요?

영손 : ‘버나르도’는 용기가 있어요. 예전에 인터뷰에서도 비슷한 질문을 받은 적이 있는데, 저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을 때 ‘버나르도’처럼 선택할 거라는 확신을 못 하겠어요. 왜냐하면 그건 무서운 일이고, 목숨이 걸린 일이기도 하니까요. 저는 그 정도 용기는 없는 사람인 것 같아요. 다만 ‘프란시스코’ 같은 동료가 있다면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반대로 ‘버나르도’ 같은 동료가 있어도 저는 선택할 수 있을 것 같고요. 오히려 그런 선택의 측면에서는 제가 ‘프란시스코’에 더 가까운 것 같아요.

문 : 그러면 은빈 배우님은 본인이 ‘프란시스코’와 닮았다고 생각해 보신 적 있으세요?

은빈 : 솔직히 말하면 많이 닮아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어요. 외적인 부분은 조금 닮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고요. 다만 취하는 제스처라든지, 제가 조금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부분들이 많이 담겨 있기는 했어요. 몸을 이용해서 허세를 떤다든지, 어떤 추리하는 모션 같은 것들이요. 그런 부분은 녹여 낼 수 있었는데, 사람 자체가 많이 닮았다고 느끼진 않았던 것 같아요.

영손 : 오늘은 약간 ‘프란시스코’라기보다는 ‘프란나르도’ 정도였어요. ‘버나르도’가 조금 더 많았어요.

은빈 : 맞아요. 솔직히 말하면 한 7대 3 정도였던 것 같아요.

문 : 두 분 다 약간 ‘버나르도’ 쪽이신 거네요.

영손 : 제가 오히려 ‘프란시스코’가 조금 더 많아요. 한 6대 4 정도요.

은빈 : 그러면 형은 ‘버나시스코’, 저는 ‘프라나르도’라고 하면 되겠네요.

 

연극 '엘시노어'에 출연 중인 배우 허영손과 강은빈 | 사진 = 이지윤 기자
연극 '엘시노어'에 출연 중인 배우 허영손과 강은빈 | 사진 = 이지윤 기자

‘버나르도’와 ‘프란시스코’가 남긴 ‘선택’의 의미

※이 이후부터는 연극 ‘엘시노어’의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관람 예정이신 분들은 참고 부탁드립니다.

연극 ‘엘시노어’는 기본적으로 ‘햄릿’의 이야기를 그대로 따라가지만, 오리지널 장면이 조금씩 숨어 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장면을 꼽자면, 진실과 다르게 알려진 ‘햄릿’의 죽음을 ‘버나르도’와 ‘프란시스코’가 그동안 자신들이 수집했던 정보를 바탕으로 사실관계를 재구성해 ‘햄릿’의 결말을 만들어 내는 장면이다.

 

문 : ‘햄릿’의 마지막 장면을 ‘버나르도’와 ‘프란시스코’가 만들어 가잖아요. 아무도 모르는 ‘햄릿’의 마지막을 ‘햄릿’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두 사람이 만들어 낸다는 점이 인상적인데, 그 장면에서 두 사람은 어떤 ‘햄릿’을 만들고 싶었는지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실까요?

영손 : 일단 ‘프란시스코’의 대사에도 나오는데, 둘의 대화 안에 “우리가 바라는 건 그게 아니었잖아. 억울하게 죽은 왕, 반역한 ‘레어티즈’, 이걸 우리가 바란 게 아니었다”라는 감정이 있어요. 그리고 우리는 진실을 알고 있으니까, 그 진실을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장치로 연극을 선택했다면 우리가 원하는 대로 왕의 악행을 알리고, 그에 맞는 합당한 평가를 받도록 하는 것이 중요했을 것 같아요.

은빈 : 그 인물들은 그들의 바람대로 그렇게 쓰이는 게 마지막이 아닌가 싶어요.

영손 : 또 재미있는 건, 우리는 ‘햄릿’이라는 공연이 얼마나 유명한지 알잖아요. 하지만 ‘프란시스코’와 ‘버나르도’는 이 공연이 그렇게 유명해질 거라는 확신은 없었겠죠. 그 지점이 상충되면서 보는 관객 입장에서는 더 재미있어지는 것 같아요.

문 : 저는 이 작품을 보면서 그 장면이 좀 생각이 많아진 것 같아요. ‘버나르도’와 ‘프란시스코’는 사실 진실을 알고 있는 거의 유일한 사람들이잖아요. 그래서 지금 시대에 더 어울린다는 느낌도 들고요. 전체적으로 코믹하지만 그 장면까지 보고 나면 “이 공연은 가볍기만 한 건 아니다”라는 느낌을 받거든요. 이 공연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영손 : 어쨌든 선택해야 한다는 대사들이 있어요. ‘버나르도’가 ‘프란시스코’를 설득할 때 하는 말처럼요. 어떤 선택이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라기보다,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며 살아가야 하느냐에 대한 메시지가 담겨 있지 않을까요. 원작을 봐도 ‘햄릿’의 우유부단한 선택들 때문에 점점 더 파국으로 가게 되잖아요. 그런데 ‘엘시노어’의 이들은 원작의 ‘햄릿’과는 다르게 선택을 너무 잘해요. 그 점에서 ‘햄릿’의 메시지와 ‘엘시노어’의 메시지가 서로 반대이면서도 공존하는 것 같고, 결국은 “어떤 선택을 하며 살아갈 것인가”를 스스로 생각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문 : ‘햄릿’도 선택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이 작품의 의미가 더 와 닿는 것 같네요. ‘버나르도’와 ‘프란시스코’를 따라가면 ‘햄릿’을 더 자세하고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도 큰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햄릿’의 등장인물들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두 사람이기에 그런 결말을 만들 수 있었잖아요. 혹시 반대로 다른 결말을 상상해 보신 적은 없으실까요?

영손 : 없었던 것 같아요.

은빈 : 저도 깊게 생각해 보진 않았는데, 제가 애정이 있어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햄릿’을 살려 두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은 해봤어요.

영손 : 완전히 원작을 트는 결말이네요. 원작을 완전히 틀어서.

은빈 : ‘프란시스코’로서 쓴다고 한다면, ‘햄릿’을 살리고 광기에 미친 왕자가 아닌 정말 왕자로서의 삶을 그려낼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 적은 있습니다.

영손 : (그럼) ‘오필리어’도 살려야 돼요.

문 : 그러게요. ‘오필리어’를 먼저 살렸어야 되는데요.

영손 : ‘버나르도’랑 ‘오필리어’가 만났어야 돼요.

연극 '엘시노어'에 출연 중인 배우 허영손과 강은빈 | 사진 = 이지윤 기자
연극 '엘시노어'에 출연 중인 배우 허영손과 강은빈 | 사진 = 이지윤 기자
연극 '엘시노어'에 출연 중인 배우 허영손과 강은빈 | 사진 = 이지윤 기자
연극 '엘시노어'에 출연 중인 배우 허영손과 강은빈 | 사진 = 이지윤 기자

문 : 이제 공연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았어요. 앞으로의 목표나 마음가짐이 있다면요?

영손 : 끝까지 틀을 벗어나지 않고, 저희의 임무를 지키면서 작품을 지키고, 관객들께 더 큰 재미를 드리고 싶어요. 그렇다고 해서 보수적으로 연기하겠다는 뜻은 아니고, 열어 주신 장면에서는 마음껏 기쁨을 드리고, 저희가 말하는 메시지도 가볍게 끝나지 않게 잘 전하고 싶습니다.

은빈 : 그러면서도 새로운 감각을 느낄 수 있게끔 늘 고민하고 생각하면서 임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문 : 마지막으로 이 기사를 보고 공연을 보러 와주실 관객 여러분께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영손 : 우울하신가요? 스트레스가 많으신가요? 누군가가 미우신가요? 90분 동안은 싹 잊게 해 드리겠습니다.

은빈 : 저도 그 말이 정말 맞는 것 같아요. 요즘 사람들 생각 많잖아요. 저도 그렇고요. 아무 생각 없이, 아무 근심 걱정 고민 없이, 행복하든 아니든 우울하든 아니든 그냥 편안하게 오셔서 그 순간을 온전히 즐기다가 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영손 : 자극적인 도파민이 아니라 건강한 도파민을 드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엘시노어’의 두 주인공, ‘버나르도’와 ‘프란시스코’는 ‘햄릿’의 1막 초반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뒤이어 몰아치는 복수의 소용돌이 속에서 두 사람의 존재는 금세 흐려지지만, ‘버나르도’의 첫 대사인 “거기 누구요?(Who’s there?)”와 이에 맞받아치는 ‘프란시스코’의 “아니, 당신이 누구인지 말하시오(Nay, answer me. Stand and unfold yourself.)”는 작품의 어둡고 불안한 기조를 여는 장면으로 자주 언급된다. 원작에서 두 병사는 비극의 시작을 알리는 역할을 완수한 뒤 무대 밖으로 사라진다.

셰익스피어가 이들에게 부여한 작지만 중대한 역할을 ‘엘시노어’는 과감하게 해석하고 또 비틀었다. 단순히 웃을 수 있는 장면이 많다거나 주변 인물이 주인공이 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연극 ‘엘시노어’는 ‘햄릿’을 지켜보던 두 병사의 눈으로 ‘햄릿’을 찬찬히 들여다보게 만든다.

과거 거대한 비극의 주변에 서 있던 인물들이 진실을 기록하고 또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순간, 관객은 비로소 익숙한 ‘햄릿’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게 된다.

때로는 마주 보지 않았기에 더 선명하게 보이는 이야기들도 있다. 연극 ‘엘시노어’는 JS아트홀에서 3월 29일까지 공연한다.

기획 김현진 이민정 이지윤
인터뷰 진행 이민정
촬영 및 사진 편집 이지윤

Tags: 기획기사연극인터뷰타이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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