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남자 싱글의 자랑이라는 수식어가 부족하다. 피겨 왕자로 주목받기 시작했던 차준환(21, 고려대), 이제는 왕좌가 눈앞에 있다.
26일 아침, 갈라 준비 전 쉬는 시간에 그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전날 밤늦은 시간까지 진행된 경기와 기자회견에도 불구하고 그는 시종일관 밝은 얼굴이었다.
올림픽이 끝나고 첫 시즌, 차준환은 또 다른 사이클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번 시즌이 아무래도 올림픽 이후 첫 시즌이기도 하고, 또 새로운 올림픽 시즌을 향한 새로운 사이클이었는데…… 사실 시즌을 전체적으로 돌아보면 항상 조금 살짝씩 아쉬웠던 점들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시즌의 마지막 경기인 세계선수권에서 제가 만족할 수 있을 만한 경기를 한 것 같아서, 좋게 잘 마무리한 것 같다”고 곱씹었다.
100점 만점을 줘도 되겠냐고 묻자 차준환은 “100점 까지는 아닌 것 같다. 그러지 말라. 몇 점 정도라고 하지? 아무래도 지금까지 세계선수권에서 좀 아쉬웠던 점들이 있었는데, 그런 점들을 좀 날릴 수 있었던 것 같아서… 80점!”이라며 운동선수 특유의 투지를 보이기도 했다.
차준환의 쇼트 프로그램 <마이클 잭슨 메들리>는 쉽지 않은 한 해를 보냈다. 기대한 것 만큼의 점수를 받지 못하기도 했고, 예상과 전혀 다르게 경기 운영이 흘러가기도 했다. 빙판 문제로 경기가 지연되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세계선수권에서 차준환은 시즌 최고의 문워크를 선보였다. 아이솔레이션 안무의 비결에 관해 물었다. 차준환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평상시에도 시간은 없지만 그런 춤 배우는 걸 좋아한다. (아이솔레이션을) 배운 건 아니고, 몇 번씩 그냥 따라서 해보고 계속 연습하다 보니까 그렇게 됐다.”
차준환은 25일 저녁 프리 스케이팅에서, 두 번의 4회전 점프뿐만 아니라 모든 요소에서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경기를 펼쳤다. 가공할만한 경기력으로 받은 기술점이 무려 105.65점. 인생 최고의 점수지만 차준환은 기쁘다기보다, 되레 진지한 표정이었다.
“사실 점수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 없이 경기에 임했던 것 같다. 점수나 결과 순위에 대한 생각보다는 좀 더 저한테 집중하고 제가 연습했던 것들을 믿고 잘 풀어나가고 싶기 때문에 사실 점수는…, 어떤 점수가 나오든 예상하지 못했을 것 같다.”
차준환은 공식 연습에서도 거의 실수를 범하지 않았다. 직접 털어놓기 전까지는 문제가 있는지 지켜보는 이들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전날 기자회견에서 언급했던 부츠에 대해서도 조심스레 물었다.
“사실은 지난주 일요일에 일본의 입국을 했는데, 토요일에 부츠를 교체했다. 그러니까 첫 연습에서 새 스케이트를 신고 거의 처음 점프를 시도한 거나 다름이 없다. 과거에도 스케이트에 대한 이슈가 조금 있었던 편이긴 했고… 항상 새로운 스케이트를 맞출 때 두 켤레씩 준비한다든가, 이렇게 하면 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게 쉽지 않다. 잘 맞는 스케이트를 하나 맞추는 것도 정말 힘들기 때문에…. 스케이트를 준비는 해놓기는 했지만 신어보지는 못했던 상황이어서, 반신반의한 마음이 있었다. 그래도 경기에 임할 때 뒤는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갔던 것 같다.”
항상 베스트 드레서로 꼽히는 차준환은 이번 시즌 의상에 있어서도 독특한 선택을 했다. 007, 제임스 본드라면 전형적으로 떠오르는 정장이나 홀스터 대신, 설산이 떠오르는 검은 목폴라를 선택했다.
“많은 대화를 하기도 했지만, 창작의 영역이기 때문에 (디자이너를) 존중한다. 제임스 본드 하면 슈트 같은 의상이 먼저 떠오르지만, (디자이너 선생님이) 인물보다는 영화에 대한 내용을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 좀 색다르게 나온 것 같다.”
차준환의 선전으로 차기 세계선수권에는 세 명의 한국 남자 싱글 선수가 출전할 수 있다. 메달과 높은 기술점에도 사뭇 만족하지 못하던 차준환. ‘출전 선수가 세 명으로 늘어난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이 질문에서는 반대로 화색이 돌았다.
“사실 그 부분이 가장 기쁜 부분인 것 같다. 어제 경기 끝나고 점수 나오기 전까지는 저의 경기에 대한 만족감이 커서, 사실 점수나 그런 순위는 하나도 개의치 않았다. (끝나고 보니) 세 명의 스팟을 만들 수 있었다는 거에 대해 가장 너무 기쁘더라. 다음 시즌에는 3명의 남자 선수가 함께 갈 수 있다는 것이…(웃음)”
“저는 올림픽도 경험 해봤고, 또 세계선수권도 여러 차례 경험해봤다. 이런 큰 경기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중한 그런 경험이고 추억인지 알기 때문에 최대 인원수로 갈 수 있게 제가 만들 수 있었다는 것이 너무 감사하다.”
올림픽부터 진천선수촌 입촌까지, 차준환에게는 동료들과의 유대가 깊어지는 한 해였다. 특히 진천선수촌 훈련 당시의 스스로를 “탁구광인”이라고 불렀다. 취미로 시작한 탁구에 재미를 붙여 훈련 이외의 휴식 시간에는 광인이 되어 살았던 기억을 되새기며 웃었다. 코로나로 인해 국내에서만 훈련을 시작하게 되었고, 이제는 학업 때문에 캐나다로 출국하기 어려운 상황. 그런데도 함께한 동료들과 코치님에게 대한 마음을 잊지 않았다.
“일단 이번 시즌에 워낙 우여곡절이 많아서… 사실 연습 때도 그렇고 경기 때도 좀 힘든 일이 많았었는데, 그래도 항상 옆에서 좀 든든하게 잘 잡아주시고, 항상 응원을 해주셨다. 힘든 순간에도 제가 더 꾸준하게 연습을 할 수 있도록 항상 옆에서 든든하게 도와주셨다. 그래서 그 덕분에 제가 만족할 수 있을 만한 그런 경기를 펼친 것 같다. 그래서 감사하다.”
꽃 피는 3월, 도쿄에는 폭우 예보가 있었다. 하지만 새로 시작되는 차준환의 계절은 비구름 하나로 멈추지 않는다. 차준환의 첫 시니어 세계선수권이었던 2019년, 부침도 어려움도 많던 시기였다. 4년 만에 돌아온 사이타마 세계선수권, 이번에도 시작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연습으로, 차준환은 모든 것을 극복하고 비로소 좋은 추억으로 덧칠할 수 있었다.
경기장에 비로소 돌아온 함성에 대해, “누군가 함께 응원해주고 있다는 사실이 와닿는다. 그런 부분이 경기할 때 가장 큰 힘”이라는 차준환. 이제 갓 돋은 봉우리에서 꽃이 터지기까지, 더 많은 관심 속에서 더 오래 지켜봐야 할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