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이거요.”
사진 촬영을 위해 고른 꽃이 사뭇 달랐다. 김유재는 스토크를, 김유성은 미니 델피늄을. 각각 ‘사랑의 믿음’과 ‘당신을 행복하게 해줄게요’라는 의미를 가진 이 꽃처럼, 서로에 대한 믿음으로 성장해 피겨스케이팅에 행복을 주고 있는 이 자매.
비슷한 듯 다른, 김유재와 김유성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피겨스케이팅에 푹 빠지다
유재(김유재, 이하 ‘유재’): 초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 엄마가 건강해지라고 한번 해보라고 했어요. 작고 말라서, 특강으로.
148cm. 지난 시즌 나란히 4cm 성장했다는 김유재와 김유성은 여전히 작다. 6분 차이 쌍둥이 자매는 또래보다 유독 작고 말랐다. 건강을 위해 집 근처 유앤아이센터에서 처음 스케이트를 신었다. 당시 주 2, 3회 취미로 하던 피겨스케이팅이라는 종목에 푹 빠졌다. 40분 수업이 끝나도 전문 선수 반 수업을 구경하느라 나오질 않았다고. 김유성에 이어 김유재까지 꾸준하게 어머니를 조른 끝에 2019년 5월, 과천으로 훈련지를 바꾸며 정식으로 선수 반에 입문했다. 지금은 슈퍼루키로 주목받는 자매이지만, 자매의 어머니 김가영 씨는 반신반의했다.
김가영(이하 ‘모’): 저는 과천에 오면 정말 한 3개월이면 그만둘 줄 알았어요. 왜냐하면 그전에는 그냥 정말 지상도 안 하고, 일주일에 한 2~3번 대관만 탔었거든요. 너무 좋아하니까 나중에 안 시켜주면 둘이 원망할 것 같아서 일단은 해보자 싶었어요. 저는 둘 다 6개월 안에 포기 한다고 할 줄 알았어요. 처음에 최형경 선생님 팀에 왔을 때도 스케이트가 애들을 끌고 다니는 거예요. 너무 말랐었으니까요. ‘얘네가 과연 할 수 있을까?’ 그랬었어요.
엘리트 선수로서의 삶은 일반 학생들과 다르다. 취미로 시작했던 그들은 포기해야 하는 것도 많았다. 특히, 어린 나이에 꽃을 피우는 피겨스케이팅 종목 특성상 4학년 때 새로운 장이 열린 셈이다. 빡빡해진 스케줄, 달라진 훈련지는 물론이고 학교생활도 대다수 포기해야 했다. 늦게 시작한 탓에 또래보다 진도도 늦었다. 그 모든 것을 잊게 해주는 선수 생활의 원동력은 바로 즐거움이었다.
모: 처음에 저희가 4학년 5월에 (과천에) 왔는데 저도 그렇고 아이들도 너무 충격을 받았어요. 너무 잘하는 친구들이 많은 거예요. 저희는 늦게 시작해서 이제 막 더블 살코를 뛰었는데, 다른 또래 친구들 전부 더블 악셀을 뛰고 있더라구요. ‘와, 진짜 이런 세계가 있었구나. 우리가 진짜 우물 안 개구리였구나.’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그때 애들과 함께 다짐했어요. “우리 그럼 남들이 한 시간 몸 풀 때 우리는 2시간 몸을 풀자. 그러면 우리가 언젠가는 비슷해지지 않을까?”. 그래서 보통 1시간 전에 도착해서 몸을 풀면, 저희는 늘 2시간 전에 와서 달리기도 하고 스피너도 했어요. 근데 아이들이 그걸 힘들어하지는 않았어요. 늘 너무 재미있어했어요.
자매는 마침내 고대하던 더블 악셀의 고지를 넘었다. 하지만 더 큰 고비가 찾아왔다. 2020년, 전 세계를 덮친 코로나 팬데믹이다. 국내 대회는 물론 승급 심사까지 줄줄이 취소에 연기를 반복했다. 특히 김유성은 2021년 11월에야 4급에 응시하여, 5급부터 출전할 수 있는 랭킹대회와 종합선수권에 나설 수 없었다. 이후 연달아 승급에 성공했지만, 이 나비효과로 국제 주니어 데뷔까지 1년이 미뤄졌다. 하지만 김유성은 위축되지 않았다. 오히려 2023년 7월에 있을 주니어 그랑프리 선발전을 위해 차근차근 목표를 세웠다.
김유성(이하 ‘유성): 유재가 더블 악셀을 먼저 뛰었을 때 저도 빨리 뛰고 싶어서 열심히 했어요. 코로나 시기에 대회가 없는 대신, 그때 트리플-트리플 콤비네이션 점프를 완벽하게 하려고 열심히 운동하고 노력했어요.
세계를 향한 첫 도전
오랜 기다림 끝에, 김유재와 김유성은 2022년 하반기 첫 국제대회에 나섰다. 김유재는 주니어 그랑프리 1차 프랑스 대회에 출전했다. 트리플 악셀에 회전수 부족 판정(q)을 받았지만 점프를 착지해내며 3위에 올랐다. 급수 제한으로 선발전에 나설 수 없었던 김유성은 10월 카자흐스탄에서 열린 데니스 텐 메모리얼 챌린지 주니어부에 출전했다. 경기에 관중이 있는 것도, 해외에서 대회를 치르는 것도 쌍둥이에게는 처음이었다.
유재: 주니어 그랑프리 프랑스 대회 때 처음이니까 정말 설렜는데 막상 가보니까 산 속에 있는 경기장이었어요. 마트도 못 가봐서 좀 실망했는데, 외국 선수들이랑 같이 나가서 재밌었어요. 생각보다 긴장이 하나도 안 되고, 처음 나갔는데도 갈라도 해서 좋았어요. 배 아팠긴 했는데, 거기 조식 크로아상 빵이 너무 맛있어요. 아침에 6시에 공식 대관 탈 때 맨날 한 개씩 들고 갔어요.
유성: 저도 거기 갔을 때 막상 외국이니까 엄청 긴장되지 않았던 것 같아요. 나현 코치님이랑 둘이 갔는데, 심심해서 밤마다 그려서 오목을 했어요. 긴장되긴 했는데 여행가는 기분이라, 되게 좋았어요.
얼굴부터 키까지, 언뜻 보면 동일 인물처럼 비슷한 자매지만 각자 가지고 있는 장점은 확연히 달랐다. 점프에서는 김유재가 앞섰고, 스핀에 있어서는 김유성이 특장점을 가지고 있다. 언니 김유재는 지난 3월 주니어 세계선수권에서 전세계 최연소(5,015일)로 트리플 악셀을 공인 성공한 여자 선수가 되었다. 동생 김유성은 이번 시즌 참여했던 모든 대회에서 딱 한 항목(종별선수권 쇼트 프로그램 레이백)을 제외하고 모든 스핀에 레벨4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놀라운 성과의 연속이지만, 본인들은 되레 발전을 위해 성찰하는 모습을 보였다.
유재: (최연소인 것은) 몰랐어요. 놀라워요. ‘드디어 랜딩했다. 완벽하게.’ 이런 기분이었어요. 답답했어요. ‘아, 왜 이게 랜딩이 안 되냐?’. 그래도 (이제 대회에서) 좀 많이 랜딩해서 자신감이 좀 오른 것 같아요. 종별선수권에서는 쇼트 프로그램에 트리플 악셀을 넣고 70점을 처음 넘겼는데, 그때 완전 신났어요. 근데 좀 축이 휘어서….
유성: 종별선수권에서 레벨3 나왔어요. 스핀 수업을 따로 하는데, 집에서 스피너도 활용해요. 재미로 늘 했던 것 같아요.
도전자에서 다크호스로
김유재와 김유성 곁에는 조언을 해주는 훌륭한 어른이 많다. 어머니인 김가영 씨부터 최형경 메인 코치, 그리고 훌륭한 프로그램을 탄생시킨 신예지 안무가까지. 지난 시즌 김유재의 쇼트 프로그램 <사계>는 최형경 코치의 아이디어로, 프리 프로그램인 뮤지컬 <아이다>는 신예지 안무가의 제안으로 만들어졌다. 이들은 눈꽃 모양 비즈부터 벨트까지, 의상에도 완벽한 캐릭터가 탄생할 수 있도록 의견을 아끼지 않는다.
쌍둥이 자매는 이렇듯 최선을 다하는 코치진과 함께 새로운 시즌을 부지런히 준비하고 있다. 다가오는 2023/2024 시즌 김유재의 쇼트 프로그램은 플라멩코, 프리 프로그램은 영화 <아바타> OST이다. 영화를 본 신예지 안무가가 김유재 선수를 떠올리며 강한 영감을 받았다고. 한편, 김유재는 쇼트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걱정이 가득했다. 매번 OST를 통해 캐릭터가 있는 프로그램을 소화했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새로운 장르’에 도전한다고 밝혔다.
유재: 쇼트 프로그램, 프리 프로그램 다 신예지 선생님이 정말 열정적으로 짜 주셔서 열심히 연습하고 있어요. 플라멩코 음악은 앞에는 클래식 기타곡이고, 플라멩코는 후반부에 잠깐 나와요. 새로운 장르여서 걱정을 많이 하고 있어요. 요즘에는 스케이트도 바꾸면서 작품 연습을 더 많이 하고, 쿼드러플은 안 하고 있어요. 오히려 트리플 악셀이랑 작품에 더 집중하고 있어요. 이번 시즌에 프리에서 트리플 악셀을 두 개 넣고 클린해서 파이널 나가보고 싶어요.
김유재가 새로운 프로그램에 적응하는 한편, 김유성은 굳히기에 들어갔다. 지난 시즌 사용했던 <Fly Me to the Moon>과 <종달새의 비상>을 모두 그대로 사용하기로 한 것. 특히 직접 골랐다는 프리 프로그램 <종달새의 비상>에 대한 애정은 각별했다. 본인이 가장 잘 소화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완벽한 해석이 들어있었다. 김유성은 좋아하는 이 작품으로 주니어 그랑프리 무대에 서고 싶다는 강한 의지를 보였다.
유성: 저는 쇼트 프로그램, 프리 프로그램 모두 그대로 가요. (프리 프로그램은) 부드러운 걸 해보고 싶었어요. 연아 언니 것도 많이 봤어요. 팔 동작과 스케이팅을 더 잘 보여주고, 엄청 부드럽게 하려고 많이 연습했어요. 주니어 그랑프리 무대에서 꼭 완벽하게 해보고 싶어요. 프리에 (트리플 악셀이) 하나 있어서 대회 때 뛸 수 있도록 연습하고 있어요. 주니어 그랑프리 선발전 5등 안에 들어서 두 번 나가고, 주니어 그랑프리에서 멋지게 악셀도 뛰고, 보여주고 싶어요.
모: 일단 올해 프로그램을 그대로 가는 것도, 유성이는 부족한 걸 더 채워서 점프만 ‘클린’이 아니라 다른 안무도 노련하게 ‘이거 진짜 잘했다.’ 이렇게 인정받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점프도 그렇고, 안무를 채우고 있어요.
두 아이를 선수로 키운다는 것
김유재와 김유성은 매 순간을 함께했다. 경기를 위해 떨어져 있을 때도 경기 전 영상통화를 통해 서로를 모니터링해줄 만큼 일거수일투족을 함께했다. 그런 쌍둥이는 훈련지가 달라지며 각자 훈련 시간을 가지게 됐다. 김유재가 2023년 국가대표로 선발되며 태릉빙상장에서 훈련하고 있고, 김유성은 팀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선수들은 ‘괜찮다’고 말하지만, 쌍둥이의 어머니 김가영 씨는 정신 없는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다.
모: 유성이가 많이 고생 했어요. 혼자 지하철 타고, 학교도 가고 그래서 유성이가 많이 희생하고 있거든요. 애들이 너무 열심히 해요. 애들도 열심히, 정말 스스로 즐기고 있거든요. 그래서 지금까지는 힘든 줄 몰랐었는데. 이제 유재가 태릉을 가고, 유성이가 팀 대관을 타니까 막 계속 왔다 갔다 해야 돼서 지금 고민이 많아요. 이걸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하는 이유는 아이들이 포기하지 않는다고 하니까요. 사실 금전적인 문제도 있고. 고등학교 1학년 언니도 있는데, 언니는 거의 제가 많이 케어를 못해주고 있고. 애들한테도 지금까지 여기까지 한 것만으로도 괜찮다고 얘기하는데 이제 애들이 또 포기할 수 없다고 하니까. ‘일단 하는 데까지는 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있어요.
김유재는 오는 6월 집중 훈련을 위해 진천선수촌에 입촌한다. 처음 접해보는 합숙 훈련에 대한 기대감에 가득 차 있다. 김유성은 한 달간 떨어지는 심정에 대해 ‘좀 아쉽다. 그래도 엄마가 좀 잘 챙겨줄 것 같다’며, ‘내년에는 같이 국가대표 돼서 같이 태릉 들어가고 싶다’고 배시시 웃었다. 먼저 국가대표에 입성한 언니를 아낌없이 배려하면서도, 자기 자신 역시 부단히 노력하는 모습이 중학생이라고는 믿기 어려웠다. 사람 속은 천 길 물속이라 했던가, 진급 상황도, 진도도 달랐던 자매가 자칫 서먹한 사이가 될 수 있었을 터. 돈독한 쌍둥이의 우애에 대해 질문하자 오히려 ‘특별한 노하우는 없다’며 운을 뗐다.
모: 서로 없을 때 칭찬을 많이 해 줘요. 있을 때 칭찬 하면 서로 자존심 상하더라고요. 제가 유재 칭찬하면 유성이는 유재가 국가대표고, 주목받으니까 칭찬한다고 생각할 수 있어서 이제 없을 때 칭찬해 주려고 하는 그러는데. 저도 아직 부족한 것 같아요.
또 둘이 비슷비슷하게 진도가 나가서 조금 감사하기도 한데, 트리플 점프부터는 유재가 먼저 뛰고 유성이가 3~4개월 뒤에 쫓아가는 식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유재가 트리플 악셀을 뛰었을 때도 유성이는 이제 조금 좌절감이 없지 않아 있었을 텐데, 그때 ‘너는 이제 무조건 3개월 뒤에 뛸 거다. 엄마가 보니까 네가 이제 몇 분 늦게 태어나서 그런지, 모든 게 한 3개월 텀으로 똑같이 가더라. 아마 트리플 악셀도 3개월 뒤에는 너도 나올 거야’라고 말했어요. 그렇게 얘기를 해줬는데, 진짜 그렇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이제 애들한테도 ‘너희가 진짜 말하는 대로, 꿈꾸는 대로 다 이루어지니까, 우리 포기하지 말고 여기까지 왔으니까 그렇게 해보자’고 하고 있어요.
Don’t stop them now.
They fall down and get up.
음악을 크게 따라 부르며 스트레스를 푼다는 피겨스케이팅 쌍둥이는 평소 어떤 음악을 들을까? 영국의 록밴드 Queen의 음악을 즐겨 듣는다는 김유재는 <Don’t Stop Me Now>를, 김유성은 영화 주토피아 OST인 <Try Everything>을 골랐다.
<Try Everything>의 ‘다시 시작해(I’ll just start again).’라는 가사가 꼭 멈추지 않고 도전하는 그들과 닮았다. 갈바람처럼 나타난 이들의 성장은 우연이 아니라, 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노력에서 싹튼 필연이 아니었을까.
인터뷰 진행 김현진
촬영 및 사진 편집 박지민
영상 편집 이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