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겨스케이팅하면 김연아 선배님이 기억에 남잖아요.
그런 선수가 되고 싶어요.
서민규 하면 스케이팅, 점프…
그런 시그니처가 있는 선수이길 바라요.”
2023년, 한국 남자 싱글 피겨스케이팅에 돌풍을 일으킨 대구 소년. 비수도권에서 훈련하는 남자 선수 최초로 국가대표에 승선한 서민규다. 2022년 10월에는 ISU 주니어 그랑프리 데뷔에서 쇼트 프로그램 1위, 이어진 다음 대회에서는 끝내 포디움에 올랐다. 역대 한국 남자 피겨스케이팅 선수 최연소였다.
작은 키에도 빠르고 부드럽게 빙판을 누비며 세계를 놀라게 한 서민규. 대구와 서울로 오가며 힘든 여정에도 씩씩하게 웃는 그를, 훈련이 한창인 태릉실내빙상장에서 만났다.
서민규에게 피겨스케이팅은 일종의 ‘가업’이다. 어머니 김은주 코치가 대구에서 20년 넘게 피겨스케이팅 지도자로 활약하며 다수의 국가대표 상비군, 청소년 대표를 배출한 베테랑이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서민규는 5살 때부터 자연스럽게 빙판에 올랐다. 즐거움으로 시작한 피겨스케이팅. 8살 이후 그의 새로운 인생이 되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다른 선생님이랑 타면서 본격적으로 선수 생활을 시작하게 됐어요. 그때랑 지금이랑 한마음인 것 같아요. 재미있는 스포츠에요.”
서민규는 김아영 코치의 지도를 받고 있다. 올림픽 메달리스트 패트릭 챈과 작업한 <월광 소나타>를 제외하면, 김아영 코치가 서민규의 초등학교 졸업까지 안무를 도맡았다. 서민규의 프로그램 12개 중 6개가 김아영 코치의 작품이었다. 2023/2024 시즌 쇼트 프로그램 역시 코치의 추천으로 탄생했다. 현재도 작품의 섬세한 완성을 위해 힘쓰고 있다.
“<월광 소나타>는 전지훈련 하러 가서, 거기 계시는 선생님의 건너 건너 아는 인맥으로, 처음으로 패트릭 챈 선생님께 안무를 받게 되었습니다. 나머지 프로그램들(22/23, 23/24 시즌 프로그램 일체)은 모두 영상으로 받게 되었어요. 영상 통화는 아니고, 완성된 프로그램을 카카오톡으로 받았어요. 영상으로 하다 보니까 처음에 어디서 시작하는지 해석하는 데도 오래 걸렸어요. 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아영 선생님이 바꿔주셔요. 작년에 <시네마천국>은 아영 선생님이 어깨, 등 동작을 많이 고쳐 주셨어요. 이번에는 더 어렵게 왔는데 잘 살려보려고 하고 있어요. 어려움은 있지만, 어려운 것을 연습해서 제 것으로 만드는 것이 좋아요.”
서민규는 지난 2022년 7월, ISU 주니어 그랑프리 선발전에 첫 도전장을 내밀었다. 결과는 최종 1위. 당당하게 우승을 거머쥔 그였지만, 쇼트 프로그램은 3위로 시작했다. 프리 스케이팅을 무결점 연기를 펼치며 표현력, 구성, 스케이팅 스킬을 평가하는 PCS(Program Component Score) 점수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 이날의 완벽한 연기로, 전날 3위에서 1위로 대역전극을 펼쳤다.
이 기세는 쭉 이어져 ISU 주니어 그랑프리에서도 빛났다. 출국 전야에 고속버스로 인천국제공항까지 와서 다시 비행기로 환승하는 강행군에도, 데뷔전인 체코 대회에서 쇼트 프로그램 1위에 오른 것이다.
“쇼트(프로그램) 점수가 나오기 전에 선생님이 60 몇 점 나올 것 같다고 하셨는데, 점수를 보니까 74점이 나왔어요. 그때 조금 울컥했던 것 같아요. 많은 분이 2차 대회는 엄청 힘들다고 하셔서 10등 안에만 들어도 잘하는 거라고 하셨어요. 어머니도 그냥 마음 비우셨던 것 같은데, 아버지만 할 수 있다고 해 주셨어요. 쇼트 때 아버지가 우셨어요.”
쇼트 프로그램 1위에 오른 그였지만, 최종 입상은 간발의 차로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프리 스케이팅 4위로 최종 4위에 오른 서민규와 3위의 점수 차는 고작 2.87점. 마지막 점프 실수가 뼈아팠다.
“프리 점수가 먼저 나오고 토탈 점수가 나오잖아요. 프리 점수가 4등인 거예요. 등수가 나오는 순간 아버지한테 죄송했어요. 어렵게 힘들게 센터도 차려주셨는데, 메달도 못 따고 만족하지 못한 경기를 해서요.”
서민규는 좌절하지 않았다. 한 달 뒤 두 번째 대회를 위해 심기일전했다. 결과는 3위. 한국 남자 싱글 역대 최연소 주니어 그랑프리 메달리스트, 그리고 역시 한국 남자 싱글 최초 주니어 데뷔 시즌 메달 획득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하지만 서민규는 오히려 열의에 불탔다. 당시 목표는 1등을 하고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에 진출하는 것이었다고.
“메달을 따긴 했는데 2차(체코 대회)보다는 점수가 많이 안 나왔잖아요. 안 넘어짐에도 불구하고. 3등 했어도 좀 아쉬웠던 결과였어요. 쇼트 때 4등을 했는데, 공식 연습 때 아무도 실수 안 해서 메달을 딸 거라고는 생각 못 했어요.”
주니어 남자 싱글은 치열한 고난도 점프 싸움으로, 성인에 가까울수록 기량이 만개한다. 갓 데뷔를 치른 서민규가 국제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은 것은 그간 노력을 쏟은 표현력과 스케이팅이 톡톡히 보답한 셈이다. 2차 체코 대회, 6차 폴란드 대회 모두 PCS 부문에서 1~2위 달하는 점수를 받았다. 과연 좋아하는 피겨스케이팅 요소로 스텝 시퀀스와 코레오그래픽 시퀀스를, 가장 좋아하는 피겨스케이팅 선수로 패트릭 챈을 꼽은 이유가 있었다.
“요즘은 점프랑 비교했을 때 점프 6, 스케이팅 4 정도로 훈련하지만, 어릴 때부터 스케이팅에 엄청 비중을 뒀던 것 같아요. 표현력은 작품이 영화라면, 계속 원작 영화를 보고 느끼려고 하는 것 같아요. 다른 분들께서 표현력이 좋다고 이야기하셨지만, 저는 시선 처리나 음악을 느끼는 게 아직은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이번 시즌에는 좀 더 보완해서 더 높은 PCS랑 기술 점수를 받고 싶어요.
서민규는 “성격은 원래 수줍은데, 친해지면 완전히 바뀐다”고 자평하며 배시시 웃었다. 지난 6월, 진천선수촌 합숙 훈련에서 이렇게 숨겨놓은 끼를 ‘형들’에게 한껏 발산했다고. 탁구도 치고 사우나도 함께하며, 남자 국가대표로서는 최연소인 그가 한 달간 ‘형들’과 부쩍 가까워진 에피소드를 쏟아냈다.
“제가 준환이 형보다 (탁구) 잘 쳐요. 약간 타입 같은 게 있어요. 트레이너 선생님께는 제가 매번 지고, 저는 준환이 형을 이기고, 준환이 형은 선생님을 매번 이겨요. 서영이 누나, 예림이 누나, 시형이 형도 하기는 해요.
훈련지가 거의 다 가까워서 엄청 편했고, 이동 시간에 시간을 뺏기지 않는 느낌이었어요. 가장 힘들었던 것은 5시 50분에 일어나는 거. 근데 막상 비실비실 가면 또 신나서 에어로빅을 추다가, 웨이트 하고 힘 빠지면 밥 먹고, 치료받고 링크장 가고, 다시 밥 먹고 링크장 가고, 와서 치료받고 다시 웨이트하고…. 마지막은 사우나 갔다 탁구 치고 숙소로 갔어요.
한번은 제가 준환이 형 휴대폰 물에 빠뜨렸어요. 며칠 가기는 했는데 괜찮아졌어요. 사우나에서 형이 뒤돌아 있을 때 놀래켰는데, 놀라서 휴대폰이 물에 빠졌어요.”
에피소드를 말하는 얼굴에 중학생 특유의 장난기가 만연했다. 인터뷰 내내, 같은 국가대표 동료인 이시형, 차준환, 김현겸 선수가 찾아와 문밖에서 장난을 치는 장면도 연출되었다. 탁구뿐만 아니라, 쉬는 시간에는 차준환, 윤아선, 김현겸을 포함한 ‘배그 스쿼드’와 함께 게임 배틀 그라운드를 하며 스트레스를 푼다고.
하지만 단순히 즐거움만 공유하는 사이는 아니다. 국내 최정상급 남자 선수들이 포진한 국가대표 선수촌인 만큼, 고난도 점프 역시 어깨너머로 보고 있다. 고향에서 또 다른 후배를 양성 중인 김아영 코치와 김은주 코치는 함께하지 못하지만, 서울에서는 최형경 코치의 지도를 받는다. 한 달에 한 번, 아버지의 자가용으로 태릉실내빙상장까지 먼 길 당일치기를 감행하는 이유가 있다.
“태릉에 와서 형들이랑 같이 타면서 많이 보고, 또 배우고 하는 게 좋아서 오는 것 같아요. 형들 포즈나 뛰는 것을 보면서, 어떤 타이밍에 뛰어야 되나 하는 것을 보면서 많이 느는 것 같아요. 시형이 형은 타노 점프. 제가 연습해 본 적이 없어서 뺏어오고 싶어요. 현겸이 형은 점프력, 높이. 준환이 형은 표현력이요. 이번 시즌 작품이 정말 좋아요. 특히 프리가요.”
진천선수촌과 태릉 국가대표 훈련에서 얻은 자양분으로, 서민규는 또 새로운 시즌을 준비하고 있다. 7월 22일부터 23일까지 태릉실내빙상장에서 개최되는 ISU 주니어 그랑프리 시리즈 파견선수 선발전에 출전한다. 스스로 ‘관중이 없는 것보다 많은 게 훨씬 좋고, 더 잘 타는 것 같다. 무대 체질인 것 같다’는 서민규에게는 아쉽게도, 금번 대회는 무관중으로 진행된다. 하지만 절치부심하여 준비한 새 프로그램 모두 서민규의 특장점인 스케이팅과 표현력을 극대화하는 작품이 될 전망이다.
“쇼트 프로그램 <Flower Dance>는 김아영 선생님이 제게 가장 잘 맞는 곡이라고 추천해 주셨어요. 스텝이 가장 좋아요. 스텝 중반에 음악이 팡 터지면서 그것에 맞춰서 동작하는 게 포인트인 것 같아요. 프리 프로그램 <노트르담 드 파리>는 영상으로 뮤지컬을 본 적이 있어서, 제가 꼭 해보고 싶은 작품 중 하나였어요. 콰지모도를 연기하려고 했어요. 콰지모도는 등이 불편하고, 안쓰러운 사람이잖아요. 안타깝고 절망적인 모습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초등학생 시절 유독 작고 동그랗던 아이. 서민규는 중학생이 되며 성장통과 함께 키가 부쩍 자랐다. ‘지금 포기하면 너무 이르고, 나중에 후회가 클 것 같다’며 더 열심히 달린 덕이었을까. 오랫동안 정체되던 실력 역시 일취월장했다. 지난 12월 회장배 랭킹대회 이후로도 3~4cm가 컸다는 그의 희망 신장은 178cm. 부쩍 자란 키와 목표만큼, 선수로서 내다보는 비전 역시 한층 높아졌다. 다가오는 새 시즌, 서민규는 “금메달”을 향한 의지를 태우고 있다.
“이번 시즌 목표가 많아요. 우선, 주니어 그랑프리 선발전에서 1등 해서 티켓 2개 받고, 주니어 그랑프리 나가서 1, 2등 하고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 나가서 메달 따고 싶어요. 또 유스 올림픽에 선발돼서, 나가서 메달 따는 게 목표에요. 그리고 랭킹, 종합에서 2등 하고 싶어요. 또 트리플 악셀을 랭킹 대회나 그 전에 무조건 넣는 게 목표예요. 쿼드러플(4회전) 살코를 하네스로 연습하기 시작했어요. 기회가 되면, 이번 시즌에 연습해서 다음 시즌 구성에 넣고 싶어요”
“피겨스케이팅 없으면, 저도 못 살아요.
계속 함께 해야 하는, 제 몸과 같은 운동이에요.”
한 발 한 발 얼음을 지치는 서민규의 뒤에 보석 같은 얼음 조각이 선명하다. 또래보다도 작은 어린 선수의 어깨에서 훨씬 단단한 심지를 느꼈다.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피겨스케이팅과 ‘한 몸’이 된 서민규에게는 얼음도 이미 그 일부인 것만 같았다.
서민규는 이제 막 두 번째 여정을 시작하려 한다. 그 모든 발자취가 빙판에 남긴 자신의 궤적처럼 빛나기를. 얼음과 한평생 함께한 그의 미래를 기대해 본다.
인터뷰 진행 김현진
포토 디렉터 박지민
영상 디렉터 이민정
정성스런 기사 넘 감사합니다!
서민규 선수의 노력과 목표를 잘 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응원합니다!
늘 피겨 선수들 좋은 기사와 영상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민규 선수 언제나 늘 응원합니다~~
항상 부상 조심히 훈련하고 민규 선수의 목표를 이루는 그날까지 열심히 응원할게요^^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