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4월 16일, ISU 세계 팀 트로피 갈라쇼.
전날 여자 싱글 부문에서 1위를 차지하며 대한민국 팀의 은메달을 견인한 소녀가 무대에 올랐다. 스포트라이트 아래 선 그녀가 고른 음악은 <Never Enough>. 더 높이 도약하고 싶은 마음을 담은 듯 했다. 연기가 끝난 후 쏟아지는 생일 축하와 박수. 이제 갓 만 18세가 된, 피겨스케이팅 국가대표 이해인이었다.
10대와 20대의 분기점에 선 이해인의 Nineteen’s Kitch. 자유로운 그녀가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담았다.
“‘얘가 떨리는구나’는 게 보이면 보는 사람이 같이 떨리고, 불안하잖아요. 긴장하고 스트레스받는 모습보다, 진짜 작품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선수가 되고 싶어요. 여유롭고 재미있게, 링크에 있을 때만큼은 즐기는 선수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러면서 잘하는!”
생태계 파괴자의 등장
이해인은 집 근처 롯데월드 아이스링크에서 처음 빙판을 밟았다. 생활 스포츠로 즐기던 피겨스케이팅이 일상이 된 것은 2013년, <올 댓 스케이트> 아이스 쇼를 관람하고 난 후. 방과 후 리듬체조 수업도 들었지만, 초등학교 2학년 이해인은 반짝이는 의상과 얼음판에서 미끄러지는 선수들에게 푹 빠졌다. 처음으로 대회에 나선 그에게 이전과 다른 ‘피겨스케이팅 선수’로서의 삶은 어땠을까.
“대회를 나가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2학년 때였어요. 그때부터 ‘선수 생활을 한다’고 생각했던 거 같아요. 선수로서 작품을 받았을 때, 그때 좀 신기했어요. 아직 어릴 때라 작품 외우는 것도 미숙하잖아요. 그래서 운 적도 많았어요. 작품 외우는 게 어렵기도 했고, 선생님이 알려주신 동작이 원하는 대로 안 되면 힘들었죠. 나는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영상을 보면 전혀 아닌 모습이 답답했어요. 실망감이 생겼죠.”
3년 후, 이해인은 훈련지를 과천실내빙상장으로 옮겼다. 선수로서의 삶을 열어준 롤모델 김연아가 처음으로 스케이팅을 시작했던 훈련장이며, 당해년도 종합선수권 우승자 유영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큰 선수들’과 함께한 시너지 덕분이었을까, 이해인의 실력이 날로 일취월장했다. 당시 그녀가 피겨 관계자들 사이에서 불리던 별명은 <노비스 생태계 파괴자>. 초등부 대회에서 파죽지세를 이어갔지만, 정작 당사자는 부끄럽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저는 그런 별명이 있는지 몰랐어요. ‘단기간에 (점프를) 빨리 뛴 애가 있더라’라는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그렇게만 알고 있었어요. 솔직히, 그때는 제가 잘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냥 점프를 배우면, ‘이거 성공했다.’ 그러고, 다음 점프 뛰면 ‘이것도 성공했다!’ 였어요. ‘내가 이제 좀 잘하나 봐’라는 생각은 거의 안 했던 것 같아요. 그것보다는 ‘점프를 빨리 배워서 마스터하고 싶다.’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두려움을 이겨내기
노비스 무대를 석권한 이해인의 상승세는 주니어에서도 쭉 이어졌다. 2018년 국제 주니어 데뷔 시즌, ISU 주니어 그랑프리 선발전에서 2위를 차지했다. 본선이었던 주니어 그랑프리 6차에서는 동메달까지 목에 걸었다. 완벽한 연기로 쇼트 프로그램, 프리 스케이팅 모두 ‘올 클린’을 해낸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 선수들이 주니어의 패권을 쥐었던 시기였고, 첫 단상의 1, 2위는 모두 러시아 선수들이 올랐다.
그러나 이해인은 기죽지 않았다. ‘나는 혼자서도 잘 놀아!’라며 첫 메달과 시상식을 온전히 즐겼다. 그랬던 그녀는, 1년 뒤 러시아 선수들을 모두 제치고 ISU 주니어 그랑프리에서 정상의 자리에 올랐다. 2019년 ISU 주니어 그랑프리 3차 대회와 6차 대회에서 정열적인 <Firedance>로 금메달을 딴 것이다. 이로써 이해인은 김연아 이후 한 시즌에 주니어 그랑프리 2개 대회를 모두 우승한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 이는 100년이 넘는 한국 피겨스케이팅에서도 유이한 기록.
“그때(2019년) 앞 차수 주니어 그랑프리에 나갔던 친구들이 다 메달을 땄어요. 긴장보다는, ‘나도 (메달을) 따고 싶다’라는 생각이 많았어요.
6차 대회가 크로아티아 자그레브에서 열렸는데, 그 전 시즌 주니어 세계선수권도 같은 곳에서 열렸어요. 그 주니어 세계선수권 쇼트 프로그램의 더블 악셀에서 실수했었는데, 똑같은 링크장, 똑같은 라인, 똑같은 트랜지션을 하니까 그 실수가 계속 생각나는 거예요. 심지어 (주니어 그랑프리 6차 대회) 당일 아침 연습에서도 실수했어요. 연습 때 계속 ‘클린’했는데, 정작 당일 연습 때 실수를 해서 엄마가 가슴이 철렁했다고 하셨어요. 6차 대회 기간에 엄마 생신도 있어서, 더 잘해서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쇼트를 잘 마치고 나서 굉장히 행복했던 기억이 나요.”
2019/2020 시즌, 이해인은 그야말로 불꽃처럼 빛났다.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 진출과 회장배 랭킹대회 · 종합선수권 준우승에, 주니어 세계선수권 출전권까지 거머쥐었다. 2020년 2월 한국에서 개최된 ISU 사대륙선수권 갈라쇼에서도 유망주로 소개되어 끼를 뽐내기도 했다. 순탄할 것만 같았던 그녀의 빙판길. 그러던 그녀에게 같은 해 3월, 슬럼프가 찾아왔다.
“주니어 세계선수권 아침 공식 대관부터 참 안 풀렸어요. 넘어지기도 하고… 자신감은 없었는데, ‘그래도 끝까지 노력해 보자’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점프들의 타이밍도 다 달랐고, 평소보다 몸에 힘도 들어가 있고, 비거리도 전혀 안 나왔어요. 클린을 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몸이 정말 말을 안 듣더라고요. 그전 시즌(2018) 주니어 월드에서도 실수가 겹치면서 악몽처럼 느껴졌어요. ‘왜 이런 일이, 왜 굳이 지금 일어났을까?’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래도 대회 끝나고 한국에 돌아왔는데, ‘주니어 월드 티켓을 많이 따와서 고마워’라고 이야기 해주시는 분이 많아서 위안이 됐어요. 그런데 그것도 한순간이었던 것 같아요. 어느 날 저녁을 먹는데, 속이 갑자기 너무 안 좋은 거예요. 그래서 약을 엄청나게 먹고 잤는데, 다음 날부터 역류성 식도염이 시작됐어요.
그때 진짜 그만둘까 생각했어요. 이틀 만에 거의 4kg이 빠졌거든요. 근육도 다 빠지고 힘이 없었어요. 토하는 게 싫어서 아예 안 먹다 보니 약도 먹을 수 없었고, 그래서 더 안 좋아진 것 같아요. 제가 스플릿 점프를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스플릿 점프를 했는데 뛰자마자 바닥으로 바로 내려오는 거예요. 그때 굉장히 큰 충격을 받았어요.”
길어지는 슬럼프. 계속되는 식도염. 설상가상으로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시니어 그랑프리마저 전면 취소되었다. 중학교 3학년 이해인은 마음처럼 따라주지 않는 몸 상태와 마음을 부단히 다잡았다.
“엄마가 큰 힘이 되는 말을 해 주셨어요. ‘뭘 해도 되니까 어쨌든 그냥 한번 해보라’는 이야기를 해 주셨어요. 그렇게 생각해 보니까 ‘그냥 넘어지더라도 자신감 있게 타는 게 낫겠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차차 좋아진 것 같아요. 그러면서 점프 뛸 때 스스로 주문 같은 것을 걸기 시작했어요. 더블 악셀을 뛸 때 ‘이거 못하면 밥 없어!’ 같은 생각을 했죠. ‘지금 이거 못 뛰면, 나중에도 계속 무서울 거야’라는 생각하면 ‘지금 바로 뛰어야겠다’라고 생각하고 뛰게 되었죠.
또 뭔가 변화를 줘야 할 것 같아서 팀을 한 번 바꿨어요. 새로운 선생님(신혜숙 코치)에게 갔다고 해서 갑자기 나은 것은 아니에요. 그래도 계속 뭔가 나아지려고 노력했고, 새로운 선수들이 좋은 에너지를 준 것 같아요.”
‘Perfection’을 위하여
이해인의 말대로, 마법처럼 순식간에 모든 문제가 타개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끝없이 스스로를 다독이고 끌어올린 덕분이었을까? 이해인은 2021년 종합선수권에서 쟁쟁한 선수들 사이에서 당당하게 첫 시니어 세계선수권 출전권을 따냈다. 긴 슬럼프 끝에 얻은 값진 성취였다. 우여곡절 끝에 나선 시니어 데뷔에서 이해인은 최종 10위에 올랐다. 그때의 프리 프로그램은 영화 <블랙 스완>. 직접 고른 프로그램과 <Perfection>이라는 음악에 본인의 상황과 마음을 담아 연기했다고 회상했다.
“<블랙 스완>의 주인공 니나에게 두 자아가 있는 것 같이 비춰지잖아요. 저도 약간 그랬거든요. ‘점프가 무섭고 그냥 다 버리고 도망치고 싶은 나’가 있었고, 또 다른 면은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열심히 하고 싶고, 더 잘하고 싶은 나’가 있었어요. 그 마음을 담아서 제가 즉흥적으로 만든 동작이 한 개 있었어요. 살코 점프를 뛰러 가기 전에 배를 찌르는 것 같은 안무요. ‘두려워하는 나를 없애고, 다시 새롭게 태어난다’는 느낌으로 만들었어요.”
이해인은 2021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ISU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놀라운 연기를 펼쳤다. 세계 각국의 해설자들이 ‘장래가 촉망된다’, ‘스킬이 우수하다’는 찬사를 쏟아냈다. 함께 출전한 김예림과 함께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의 대한민국 여자 싱글 출전권 두 장을 사수했다.
하지만 주니어 때부터 꿈에 그리던 올림픽 출전은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올림픽 1차 선발전이었던 2021 전국남녀 회장배 회장대회의 프리 스케이팅에서 넘어지는 실수를 범했다. 이 나비효과로 최종 선발전에서 선전했지만, 15점의 점수 차를 뒤집기는 어려웠다.
“랭킹대회 다음 날, 엄청 많이 울었어요. 다리를 질질 끌면서 거리를 걸었던 기억이 나요. 올림픽도 올림픽이지만, 중요한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클린을 하지 못 했다는게 아쉬웠어요. 당당하게 국가대표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거든요. 그런데 실수했다는 생각이 드니까 좀 슬프기도 했고, 연습 때는 클린을 잘했는데 대회 때 실수하니까 ‘왜 또 이렇게 될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도 베이징 올림픽을 언니들이 나갔는데, 진짜 열심히 해서 나갔잖아요. 같은 선수로서 그걸 아니까, 진짜 손에 땀이 나도록 응원했어요. TV로 보면서 ‘얼마나 떨렸을까?’라고 생각했어요.
와신상담, 절치부심
2022/2023 시즌, 이해인을 요약하는 단어는 ‘와신상담’이었다. 시즌 초 독감과 몸살로 쉽지 않은 시간을 보냈던 그녀는 후반으로 다다르며 활짝 만개했다. 사대륙선수권, 세계선수권, 팀 트로피 모두 210점을 돌파하는 대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특히, 프리 스케이팅은 줄곧 140점대를 기록했다. 이해인의 강한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후문이었다.
스케이트 아메리카 직전 발현한 독감의 여파가 아직 가시지 않았던 프랑스 그랑프리. 이해인은 이 대회 때 처음으로 ‘즐거움’이라는 마인드셋을 가지게 된다. 프리 스케이팅에서도 당초 트리플 악셀을 위해 짜 두었던 동선을 되살렸다. 꼬여 있던 라인이 정돈되었고, 부담을 덜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계기는 함께하는 지현정 코치의 조언이었다.
“프랑스 그랑프리 쇼트 경기에서 진짜 많이 떨었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떨어봤자 되는 게 없구나 라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또 그랑프리 대회에 출전한다는 것 자체가 그래도 잘하는 선수라 초청받은 거잖아요. ‘감사한 거니까,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좀 더 즐겁게 하자’라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이렇게 사람들 앞에 설 기회가 많이 없잖아요. 특별한 순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요새는 (경기 때 빙판에) 빨리 들어가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선생님 본인은 케어를 한다고 생각하시지는 않는데, 오히려 그게 더 많이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제가 랭킹 때 시즌 처음으로 클린을 했어요. 그때 선생님(지현정 코치)에게서 메시지가 왔는데, ‘즐기면서 하는 모습이 너무 좋았어. 앞으로도 그런 모습 많이 보여줘’라고 말씀하시는데 진짜 그렇게 해야겠다, 지금부터 즐겁게 해야겠다는 생각도 많이 들었어요.”
즐거움으로는 이번 월드 팀 트로피 역시 빼놓을 수 없었다. 이해인은 쇼트 프로그램, 프리 스케이팅 모두 세계적인 선수들 사이에서 1위를 차지했다. 개인의 기쁨이기도 했지만, 팀 코리아 모두의 호재였다. 이를 통해 메달 가시권으로 껑충 뛰어올랐기 때문이다. 차준환의 프리 스케이팅 1위로, 팀 코리아는 처음 출전한 대회에서 2위라는 쾌거를 안았다.
‘목표는 응원상’이라던 팀 코리아였기에, 중계 카메라를 뚫고 이해인의 응원 소리가 전파를 탔다.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팀 코리아가 뽑은 최고의 응원가로 이해인이 꼽히기도 했다. 완벽한 팀워크와 소통을 보여준 이해인과 대표팀의 훈훈한 에피소드를 들을 수 있었다.
“그때 정말 너무 재미있었어요. 가기 전에도 재밌었고, 가서도 재밌었고, 지내는 동안 재밌었고, 오기 전에도 재밌었고, 그냥 다 재밌었어요. 예림이 언니나 시형이 오빠랑은 원래도 친했는데, 좀 더 가족 같은 느낌이 된 것 같아서 좋았어요. 혜진이랑도 많이 친해졌어요. 그리고 해나 언니 <죽음의 무도>를 너무 좋아해서, 파이널 때 영상을 진짜 많이 봤거든요. 맨날 따라 하고. 그런데 친해져서 너무 좋았어요. 가기 전에 준환 오빠가 선글라스 있냐고 물어보더라고요. 그러더니 가져오라는 거예요. 그래서 방켓 때 선글라스 끼고 사진도 같이 찍고. (웃음)”
시즌 마지막 대회인 세계선수권이 끝난 후에야 확정된 월드 팀 트로피. 특히나 피겨스케이팅 시즌이 마무리된 4월에 열리는 대회였기 때문에, 체력에 대한 어려움 역시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또다시 완벽한 무결점 연기. 쇼트 프로그램과 프리 스케이팅 모두 개인 최고점을 경신했다. 하지만 이해인이 돌파한 것은 점수뿐만이 아니었다. 심리적인 징크스, 즉 자신의 벽이었다.
“솔직히 체력이 다 떨어졌을 때였거든요. 그래도 마지막 대회니까 좀 마음 편하게 하자라고 하고 딱 섰는데, 팀 코리아가 너무 초롱초롱하게 ‘너 잘할 수 있어’ 이런 표정으로 보는 거예요. 그러는 걸 보고 있으니까 ‘잘하자’ 생각했어요.
또 제가 시즌 초에 입었던 의상을 입었는데, ‘이 옷을 입고 또 못하면 어떡하지?’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이 시즌이 가면 이겨낼 기회가 없어지는 거잖아요. 그래서 ‘반드시 클린해야겠다’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제 안에서 ‘너 실수할 거야, 이거 입으면 잘 안될 거야’하고 속삭이는 애한테 본때를 보여줘야지 했어요.”
프로그램에
나만의 이야기를 담아
이해인은 쉴 틈 없는 비시즌을 보냈다. 4월까지 ISU 세계 팀 트로피로 대회를 치렀고, 5월 초에는 안무를 받기 위해 미국에 다녀왔다. 이후에는 일본 아이스 쇼에 참여했다. 해외에서 진행된 아이스 쇼에 참가한 것은 처음이었다. 늘 직접 짠 K-POP 프로그램을 선보였지만, 새로운 이미지에 도전하기 위해 전문 안무가인 미샤 지로부터 <핑크 베놈>을 받았다. 안무가 조이 러셀에게 <Gravity>도 추가로 받아 단단히 준비했다.
“쇼로 일본에 가는 것은 처음이었어요. 해외 아이스쇼는 처음이었는데, 거기서 화장도 받고 그냥 너무 좋았어요. 연습하는데 하루 종일 선수들이랑 같이 붙어 있으니까, 영어 실력도 좀 는 것 같기도 해요. 가서 에어팟이랑 좋아하는 케이스를 잃어버렸지만…, 더 좋은 걸로 샀어요. 내년에 한 번 더 아이스 쇼에 도전할 예정입니다.
아이스 쇼로 재충전을 마친 이해인은 새로운 시즌에 도입한다. ISU 시니어 그랑프리 전, 단단한 사전 준비로 그랑프리 메달과 파이널 진출에 도전할 전망이다. 9월 28일부터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에서 열리는 챌린저 시리즈 네펠라 메모리얼에 출전하고, 10월 3일부터 중국에서 열리는 상하이 트로피에도 초청받았다. 2019년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 당시 시니어 여자 선수들을 관람하며 다짐한 ‘나도 나중에 저 6명 안에 들어가면 좋겠다’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열심히 훈련하고 있다.
“제가 세 번째 시니어 그랑프리인데, 메달을 딴 적이 없어요. 그래서 이번에 그랑프리 메달을 따고, 그랑프리 파이널에서도 메달을 가져오면 좋겠어요.”
새로운 프로그램을 이야기하며, 이해인은 연신 상기된 얼굴이었다. 프로그램에 ‘나만의 이야기’를 담기 때문이었을까. 완벽함을 위해 다시 태어나는 <블랙 스완>. 한국의 한이라는 정서에 자신만의 슬픔을 담은 <오마주 투 코리아>. 폭풍과 싸우는 스토리를 담은 <스톰>. 유령을 떠나지 않고 무도회로 돌아와 다시 춤추는 크리스틴, <오페라의 유령>까지. 신작을 소개하는 예술가처럼, 이해인의 눈빛이 반짝였다.
“팀 트로피 때만 해도 다른 음악을 할 줄 알고 ‘주니어 시절이 떠오를 것’이라고 말씀드렸는데, 바뀌게 되었어요. 쇼트 프로그램은 비밀이에요. 누구도 쓴 적이 없는, 아예 안 쓰던 장르예요. 프리 프로그램은 힌트를 드리자면, ‘집시 같은 느낌’이에요. 색깔로 표현한다면 쇼트는 파란색, 프리는 빨간색.”
이해인이 꼽은,
해시태그로 말하는 나
#제니 집사
10월 4일 태어나 ‘1004(천사)’라는 이해인의 고양이, 제니. ‘츄르 사야지’ 하며 힘을 낸다는, 제니 집사와 주인님의 일상.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도 안 하고 ‘언니 왔어’ 하면서 제니한테 달려가요. 제니가 언니 방에서 맨날 자거든요. 이래요. 너무 쓰다듬어서 머리가 푹 팬 적이 있어요.
제니는 제가 집에 오면 막 ‘냐옹’하면서 와요. 그런데 쓰다듬으려고 하면 도망가요. 그런데 또 안 쓰다듬고 ‘그래 그러고 있어, 나는 소파에 앉아 있을게’ 하면 또 와요. 그런데 만지려고 하면 또 가요. 그리고 캔 주려고 들고 있으면 그때 서야 와서 막 애교 부려요. 그래서 저는 들고서 안 줘요.”
#뿅아리
초등학교 시절, SNS에서 시작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이해인의 별명. 팬들이 부르는 애칭이자, 스스로를 표현하는 키워드 중 하나. 뿅아리 이해인에게 ‘나의 스텝시퀀스의 강점’을 질문했다.
“엣지를 쓰면서 스피드까지 있기 힘들거든요. 그런데 스피드도 있는데 엣지도 정확하고, 레벨을 놓치지 않는 게 장점인 것 같아요. 음악에 딱딱 맞아서 보는 사람에게 쾌감을 주지 않나 싶어요.”
#열심히 하자
항상 가지고 있는 생각이라고. 이런 신념은 초등학생 때부터 꾸준히 써 온 훈련일지가 방증한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된 지금까지 꾸준히 써오고 있는, 소중한 성장의 기록.
“가끔은 쓰기 귀찮거나 피곤한 날이 있어요. 그런 날은 열심히 쓰지는 않아도, 그날 있었던 즐거운 일이라도 적어 놓으려고 해요. 일지를 적으면서 글씨체 공부나 어휘력 공부도 되는 것 같고. 다 쓰고 나면 책 같아서 보관해 놨다고 나중에 읽기도 해요.”
이해인과 ‘긍정’
“피하려고 하면 점점 더 문제가 되더라구요. 그래서 문제를 보고 ‘어떻게 해야겠다, 이래서 안 됐던거야’ 라고 하면 짐을 버리는 것 같이 가벼워져요. 올림픽 선발전 뒤에 넘어지는 순간이 머리에서 계속 반복재생 되길래, 한 번은 안되겠다 싶어서 그 장면을 다시 봤어요. 조금 마음이 아프기는 했는데 그 다음부터는 생각이 잘 안 나더라구요. 현실을 직시하면서, ‘너는 이렇게 해서 넘어진거야’라는 단계로 넘어가게 돼요. 경기 때는 순간적이니까, 왜 넘어졌는지 모르잖아요. 그런데 그 부분을 많이 보면서 ‘아이고, 저러니까 넘어지지’ 그런 생각도 하게 되죠.”
긍정적인 스케이터, 긍정 에너지.
피겨스케이팅 국가대표 이해인에게는 밝게 웃는 미소와 함께 ‘긍정’이라는 수식어가 항상 따랐다.하지만 이해인의 ‘긍정’은 ‘행복, 밝음’이라는 통념적 의미보다, ‘그러하다고 생각하여 옳다고 인정’하는 사전적 의미에 더 가까운 사람이었다.
어려운 상황도 마주하여 바라보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이해인의 긍정. 실수한 자신도, 넘어진 자신도 오롯이 눈 마주치며 은반 위에 새로운 스토리를 담아내는 그녀. 아직 도래하지 않은 ‘이해인의 이야기’의 반짝이는 클라이맥스를 기다리고 있다.
인터뷰 진행 김현진
포토 디렉터 박지민
영상 디렉터 이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