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위에는 수첩을 넘기는 노년의 여인이 등장한다. 그녀의 이름은 ‘향안’. 이 노작가는 조용히 수첩을 펼치고, 기억의 한 페이지를 따라 거꾸로 시간을 여행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뮤지컬 <라흐헤스트>는 한 예술가의 인생을, 그가 사랑했던 사람들과의 순간을 따라 천천히 되짚는다.

이 작품은 시인 ‘이상’의 연인이자 후일 ‘김환기’ 화백의 아내로 알려진 실존 인물 ‘변동림’의 삶에서 영감을 받았다. 하지만 단순히 실화를 재현하는 것이 아닌, 그녀가 남긴 예술적 흔적과 내면의 감정을 섬세하게 조명하며 한 여성 예술가의 서사를 그려낸다. 제목 <라흐헤스트>는 프랑스어로 “사람은 가도, 예술은 남는다”는 뜻을 품고 있다. 작품은 이 문장을 중심축 삼아, 향안이란 인물이 겪어온 고통과 선택, 사랑과 창작의 시간을 따라간다.
시간은 2004년에서 시작해, 1970년대 환기와 함께했던 뉴욕 시절을 지나, 다시 1930년대의 서울, 그리고 경성의 낙랑파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시공간 속에서 향안은 젊은 시절의 자신, 즉 ‘동림’으로 돌아간다. 무대는 두 명의 배우가 함께 같은 인물을 연기하며, 과거와 현재를 끊임없이 넘나든다. 관객은 노년의 향안이 기억 속에서 동림의 순간들을 들여다보는 듯한 시선으로 이야기를 따라가게 된다.

동림은 젊은 시절 시인 이상과 사랑에 빠진다. 예술가로서도, 여성으로서도 벅찰 만큼 뜨겁고도 고통스러운 사랑이다. 이상과의 시간은 감정의 폭풍처럼 휘몰아치지만, 그 속에서 동림은 예술과 삶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과 마주한다. 이후, 김환기와의 만남을 통해 또 다른 예술의 길로 나아가며, 그는 점차 자신의 내면을 향해 깊숙이 다가선다.
<라흐헤스트>는 드라마뿐 아니라 음악과 무대미술, 조명, 배우의 섬세한 연기를 통해 감정선을 깊이 있게 전한다. 특히 향안과 동림이 서로를 마주하는 장면에서는 마치 거울을 보는 듯한 연출로 관객의 몰입을 돕는다. 사랑이 전부였던 과거의 자신과, 모든 것을 지나온 현재의 자신이 같은 공간에 머무는 이 순간은 작품 전체의 정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향안은 결국 깨닫는다. 지나온 시간들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누군가의 연인이자 아내로만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바로 ‘예술’이었음을. 그리고 그 예술은 시간이 흘러도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을 것임을.
뮤지컬 <라흐헤스트>는 유명 인물의 삶을 따라가면서도, 누군가의 아내, 연인, 혹은 동료로만 설명되지 않는 ‘한 사람의 인생’을 조명한다.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결국 스스로를 증명해내고 싶은 한 인간의 이야기를 담담하지만 깊은 울림으로 전한다.
사람은 언젠가 떠나지만, 그가 남긴 예술은,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진심은 오래도록 남는다. 향안의 마지막 장면이 눈물겹게 아름다운 이유는, 그녀가 스스로를 빛이었다고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그것을 이미 느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