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피겨스케이팅 남자 싱글 사상 최초의 주니어 그랑프리 메달리스트이자, 최초의 주니어 그랑프리 우승자. 그리고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 첫 출전자. 한국에서 열린 평창 동계 올림픽 출전권을 획득한 국가대표 맏형.
척박했던 한국 피겨스케이팅 남자 싱글 부문에서 뚜렷한 족적을 여럿 남겼던 스케이터는 이제 차갑지만 익숙했던 얼음 위를 떠나, 뜨거운 조명이 쏟아지는 무대 위에서 새롭게 걸음하고 있다. 십 년간 피겨스케이팅 국가대표로 활약했던 이준형의 이야기다.
어느새 ‘뮤지컬 배우 이준우’라는 이름이 익숙해진 그이지만, 여전히 ‘피겨스케이팅 선수 이준형’을 추억하는 이들도 제법 많다. 선수 시절부터 본인의 프로그램을 직접 짜거나, 다른 선수의 프로그램을 만들어 주던 이준형이기에, 피겨 팬들은 선수 생활 은퇴 이후에는 안무가로 그를 계속해서 만날 수 있으리라 예상했었다. 본인이 직접 안무가가 되고 싶다고 언급하기도 했었으니까.
그렇기에 그가 은퇴와 동시에 피겨스케이팅이 아닌 뮤지컬이라는 새로운 분야에 뛰어들었을 때, 많은 이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우려 섞인 시선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그 놀라움과 우려를 깨고 이준형, 아니 ‘이준우’는 지난 3년간 뮤지컬 배우로서 맹활약했다. 뛰어난 가창력과 신인답지 않은 연기력으로 ‘이준우’를 먼저 알게 된 이들은 그가 피겨스케이팅 국가대표 출신인 ‘이준형’이라는 사실에 뒤늦게 놀라기도 한다.
2021년 코로나라는 엄중한 시기 속에, 뮤지컬 데뷔와 동시에 작별 인사 없이 피겨스케이팅을 떠났던 이준형에게 조금 늦게나마 그의 피겨스케이팅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해당 기사에서는 본명인 이준형으로 표기합니다.)
처음 스케이트를 신은 날보다, 처음 방문했던 링크장의 기억이 더 선명했던 어린 시절
‘태어나자마자’라고 표현해도 무방할 정도로, 피겨스케이팅 코치인 어머니 오지연 씨를 따라 자연스럽게 링크장에 드나들었던 이준형. 그의 링크장에서의 첫 기억은 특별했다.
“어릴 때, 아마 스케이트 타기 전이었을 거예요. 전지훈련으로 미국 아이스캐슬을 따라갔을 때였는데 산이랑 산 거의 중턱쯤인가에 집이 있었어요. 그래서 링크장도 그쪽에 있었고. 그래서 그 산을 막 올라갔던 거나 그 집이 기억나요. 링크장 발레 바에 발 올리고 있었던 것도 기억나고 그래요.”
지금은 운영을 종료했으나 미국 LA 근교 레이크 애로우헤드에 있던 아이스캐슬은 미국의 전설적인 피겨스케이터인 미셸 콴의 훈련 장소로 유명했다. 올해 어린이날 미셸 콴과 찍은 사진을 깜짝 공개하기도 했던 이준형에게 그때의 일화를 물어보자 “당시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기억은 안 나지만 엄마를 따라 전지훈련을 하러 갔을 때 그 링크장에 계셨던 걸로 기억해요. 너무 아기 때라 잘 기억은 나지 않아요. 그리고 한 분이 더 계셨는데, 나중에 제가 사대륙 대회에 나갔을 때인가 뵈었어요. (가서 어릴 때 한번 뵀었다고 이야기하셨나요?) 아니요. 그냥 혼자 그분이구나 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처음 스케이트를 신었던 기억은 있을까? 역시나 잘 기억나지 않는다는 답변이 되돌아왔다. 가장 오래된 기억은 초등학교 1, 2학년쯤으로 동천 아이스링크장에서 처음 스케이트를 탔을 거라고. 그것도 사진이 있어서 기억한다고 한다.
“그건 기억나요. 동천(재활 체육센터) 개관식 때 리본을 제가 잘랐어요. 중간에서.”
아쉽게도 당시의 사진은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한국 남자 싱글 사상 첫 ISU 공인대회 메달리스트
기억도 안 나는 어린 시절부터 스케이트를 탔다 보니 화동(어린 스케이터들이 주로 하며 경기 중 팬들이 던지는 꽃이나 인형 등을 수거해 전달한다.)을 한 적도 있었다. 2008년과 2009년 한국에서 열린 사대륙 선수권과 그랑프리 파이널에 화동으로 참가했던 기억을 물어보자 “허리가 아팠다.”라는 대답이 웃음과 함께 돌아왔다.
“그랑프리 파이널 때 연아 누나가 마지막 순서였잖아요. 그래서 링크장을 꽉 채울 정도로 인형이 떨어져서 정말 난리였습니다. 아직도 기억나요.”
당시의 인형 비(雨)는 전국적으로도 큰 화제였다. 그래서인지 사대륙과 그랑프리 파이널의 기억이 섞여 있을 정도라고.
그리고 3년 뒤, 정신없이 인형을 주웠던 남자 화동은 국가대표가 되어 주니어 그랑프리에 처음으로 출전한다. 그리고 라트비아에서는 4위를, 이탈리아에서 3위에 입상해 동메달을 따내며 한국 남자 싱글 최초로 주니어 그랑프리 메달을 획득했다. 첫 진출에 이루어 낸 쾌거는 이준형 본인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아니요 전혀. 그때가 1차였나 그렇죠. 쇼트 때 3등이었나 4등이었나 그랬었던 것 같은데 그때 되게 놀랐거든요. 사실.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고, 프리 끝나고도 그때 4등인가 그랬는데 내가 이렇게까지 높게 올라갈 거로 생각하지도 못했어요. 그전에 아시안 트로피가 있었지만 서구권 선수들과는 처음 경쟁하는 국제대회였다 보니 전혀 예상도 못 했죠.”
당시에는 북미를 비롯해 유럽권 선수들이 강세였던 시기였다. 첫 주니어 데뷔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이준형은 그다음 해에는 제1회 2012 인스브루크 청소년 동계 올림픽에 출전해 4위를 기록하고, 2013년에는 종합선수권에서 첫 우승을 했다.
그리고 대망의 2014/2015 시즌, 이준형은 한국 남자 싱글 사상 최초로 주니어 그랑프리 대회에서 금메달을 딴다. 뒤 이어 크로아티아에서도 동메달을 획득하며 남자 싱글 사상 최초로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에 진출했다. ISU 피겨스케이팅 그랑프리 시리즈는 주니어, 시니어로 나뉘어 치러지며, 한 시즌에 한 선수당 최대 2개 대회에 출전할 수 있다. 그 중에 상위 성적의 6명만이 진출하는 그랑프리 파이널에 이준형은 4위의 성적으로 당당히 출전한다.
“사실은 프랑스에서 1등 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 했고, 그다음이 크로아티아였는데 그때도 또 메달을 딸 수 있을 거로 생각하지 못했어요. 파이널은 생각도 못 하고 있었는데 파이널 나가게 됐던 거니까. 그때까지만 해도 제 안에 크게 욕심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냥, 그냥 하던 대로 했던 건데 약간 파이널에 나가고 그러다 보니까. 잘해야 되는데 이런 생각이 생겼었던 것 같고 부담이 좀 컸던 해였던 것 같아요.”
부담감만큼이나 그 시즌 이준형의 일정은 속된 말로 ‘빡셌다’. 피겨스케이팅 시즌은 7월부터 시작해 그다음 해 3월에 세계선수권대회로 일정을 마무리하는 총 9개월의 여정이다. 이준형은 이 한 시즌에만 11개의 대회에 출전했다. 시기가 겹치면 한 달에 몇 개의 대회에 나가기도 했다.
“대만 아시안 트로피에 주니어 그랑프리 2개, 파이널, 그리고 국내대회도 랭킹, 종합에 체전도 나갔을 거예요. 막바지에 트리글라브 트로피도 나갔죠. 그만큼 정말 바빴고, 경기 많이 했고, 부담이 컸던 해였어요.”
부담감 때문이었을까. 기대와 달리 이준형은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을 비롯해, 챔피언십 대회에서는 만족스러운 성적을 내지 못한다. 그는 ‘조금 주눅이 들어 있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욕심보다는 사실 ‘내가 이런 사람들이랑 여기 이렇게 있어도 되나.’ 이런 생각이 한 번 들었었던 것 같아요. 그때 선생님(지현정 코치)이 그런 말씀을 해 주셨어요. 그전에 성적도 안 좋고 파이널 때도 되게 못해서 주눅 들어 있고 눈치 보고 이랬었는데, 선생님이 편하게 하라고, ‘아무도 너한테 기대 안 해.’ 그러니까 이게 부정적으로 한 말이 아니라 제 짐을 약간 덜어주시려고. 그런데 그게 되게 좋았었어요. 그러면서 이제 너 충분히 얘네랑 같이 이렇게 경쟁할 수 있는 애라고, 그러면서 좀 내려놓으라고, 그래서 되게 좋았어요.”
그리고, 평창 올림픽.
이 시즌 이준형이 쓴 프로그램은 ‘오페라의 유령’이었다. 긴 선수 생활 중에 본인이 직접 골랐다고 언급한 단 2개의 프로그램 중 하나였다. 처음 영상을 본 뒤 하루에 한 번은 꼭 ‘오페라의 유령’ DVD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봤을 정도로 푹 빠져 있었다고 한다. 경기 중에는 뮤지컬 장면을 생각하며 몰입해서 연기를 했다고. 이때 처음으로 뮤지컬에 대한 이끌림을 느낀 것인가 물어보자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죠. 맞아요. 그게 시작이었던 것 같아요. 제 안에서 ‘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든 건. 그전까지도 보는 것도 되게 좋고, 와 재밌다 이랬지만 ‘내가 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든 건 그때가 처음이지 않았었나(싶어요).”
이때 극 중 ‘유령’이 부르는 노래는 전부 다 따라 불러보았다고 한다. ‘이준형’이 ‘이준우’가 되는 계기를 만들어 준 이 ‘오페라의 유령’에는 재밌는(?) 일화도 있다.
“그 시즌에 선수들이 ‘오페라의 유령’을 엄청 많이 썼어요. 저는 전 시즌이었던 2013/2014 시즌 중반에 프리를 오페라의 유령으로 바꾸고, 계속 사용했던 거였는데 2014/2015 시즌에 오페라의 유령이 유독 많았어요. 한 대회에서는 제 앞의 선수가 ‘오페라의 유령’을 하고, 제가 연달아서 했던 적도 있었어요.”
이준형이 말한 것은 2015년 상하이에서 열린 세계 선수권으로 한 그룹에 세 명이나 되는 선수가 연달아 ‘오페라의 유령’을 사용했다. 무라 타카히토의 오페라의 유령이 끝나고, 다음 차례였던 이준형이 같은 곡으로 연기했고, 뒤이어 나온 마이클 마르티네즈도 같은 곡으로 스케이팅을 탔다. 경기장에 연달아 울려 퍼진 ‘오페라의 유령’ 노래에 관중들도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편곡은 다르지만 같은 음악에 또 연기를 하는 것이 부담되지는 않았냐고 질문하자 “그런 부담은 없었어요.”라고 말하며 덧붙였다. ”그냥 뒤 순서일수록 사람들이 ‘아, 또야?’ 이럴 것 같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부담이 있지는 않았습니다.”
이준형의 표정은 생각보다도 더 무던하고, 단단했다. 그 단단함은 2017년 네벨혼 트로피에 대한 질문에서도 그랬다. 평창 동계 올림픽이 열리는 2017/2018 시즌 당시, 이준형은 올림픽 선발전 1차에서 우승하며 네벨혼 트로피에 출전했다. 네벨혼 트로피는 그랑프리 시리즈보다는 한 단계 낮은 챌린지 시리즈지만, 그 해의 네벨혼 트로피는 그 어떤 경기보다 중요한 경기였다. 바로 올림픽 출전권이 걸려있기 때문.
피겨스케이팅은 1994년 릴레함메르 동계 올림픽부터 올림픽 직전 시즌의 세계 선수권 순위에 따라 나라별 출전권을 분배하고 있다. 2014년 소치 동계 올림픽까지는 개최국 선수들은 자동으로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었지만,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부터는 개최국 자동 출전권이 없어졌다. 따라서 한국 피겨스케이팅 선수들은 헬싱키에서 열린 2017년 세계 선수권에서 티켓을 획득해야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나라는 여자 싱글을 제외한 나머지 3개 종목의 출전권을 획득하지 못했다. 하지만 세계 선수권에서 올림픽 출전권을 획득하지 못한 나라에 마지막 기회를 주는데 2017년 네벨혼 트로피가 바로 그 기회였다. 당시 네벨혼 트로피에 배당된 남자 싱글 출전권은 총 6장으로, 이준형은 국가 순위로 6위 안에 들어야 올림픽 티켓을 획득할 수 있었다.
“제가 (올림픽 대표 선발전) 1차에서 우승을 해서 가게 됐는데, 사람들이 축하해 주지만 기대가 딱히 없다는 것들이 약간 느껴졌었어요. 그때 당시에 부담감도 많이 느끼면서 동시에 ‘내가 보여준다.’라는 생각도 좀 들었어요. ‘그래 내가 따 올게. 내가 한다.’ 이런 생각이 더 컸던 것 같아요. 부담도 컸지만 그래서 진짜 열심히 준비했어요.”
이준형은 이 대회에서 5위를 차지하며 올림픽 티켓을 획득했지만 그렇게 따온 올림픽 출전권을 본인이 사용하지는 못했다. 당시 3차까지 치러진 올림픽 대표 선발전에서 이준형은 2차까지 27점이라는 큰 점수 차로 1위를 유지했지만, 마지막 3차에서 극적으로 결과가 뒤집히며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당시에 심정을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이준형의 대답이다.
“스포츠라는 게 그렇게 결과로 보이는 거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아쉬운 건 아쉬운 거고. 그렇지만 그게 결코 ‘내가 갔어야 하는데.’ 이렇게 부정적인 생각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었던 것 같아요. 그냥 아쉬운 건 아쉬운 거고, 이제 나갈 선수를 축복해 주고. 그런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준형은 그의 말처럼 올림픽 출전하게 된 차준환을 진심으로 축하했다. 그리고 해설위원이 되어 경기를 직접 해설하며 한국 선수들을 응원했다.
“사실 해설도 되게 감사한 기회로 하게 됐어요. 평창에 가서 올림픽이라는 걸 경험해 보고 그 현장도 느껴볼 수 있어서 되게 좋은 경험이었죠. 근데 그거와 별개로 경기를 해설하는 거는 좀 어려웠어요.”
의외의 대답이었다. 이준형이 참여한 SBS의 해설은 피겨스케이팅 경기 중 시청률 1위를 기록했을 뿐 아니라 시청자 평가도 긍정적이었다.
“공부도 굉장히 많이 필요하고. 그 공부가 끝이 아니라, 말이 비지 않게 틈이 보이면 내가 들어가야 허고, 이런 타이밍이 방송을 해보지 않은 사람으로서 굉장히 힘들었어요. 지금 하면 아마 훨씬 편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때 당시에는 힘들었던 것 같아요. 지금처럼 외부적인 활동을 하던 시기도 아니었고, 선수만 계속하던 사람이 카메라 앞에서 생방송을 했으니까요.”
첫 방송 경험에 서툴렀을 이준형을 도와준 것은 같이 해설을 진행한 배기완 캐스터와 방상아 해설위원이었다. 두 사람 모두 피겨 해설에서는 관록이 붙은 이들이었다.
“보통은 해설자 한 분 그리고 캐스터 한 분 이렇게 해서 두 분이 진행하는데, 우리는 3명이 진행했잖아요. 그렇다 보니까 더 (말할) 기회가 없었어요. 하지만 또 감사하게 해설하시는 선생님들께서 많이 양보를 해주셨어요. 제가 말을 많이 하라고 많이 푸시를 해주셔서 제가 많이 들어갈 수 있었고 뻔한 얘기라도 한마디라도 더 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었죠. 나름대로 고충은 있었지만, 많이 응원 해주시고, 방송사에서도 톤이 너무 좋다, 목소리가 너무 좋다. 자신감 있게 해라. 그렇게 말해 주시니까 열심히 했었죠.”
그러면서도 잘 모르겠다며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사실 이준형이 배우로 전향했던 시기에는 방송사에서도 피겨스케이팅 해설위원이 세대가 교체되는 시기였다. 그렇다면 배우가 아닌 해설로도 전향할 수 있지 않았을까 물어보자, 이준형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아마 제가 조금 더 적극적인 의사를 보였으면 좋은 기회가 있었을 것 같아요. 근데 한번 해보고 저는 좀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제가 몸으로 행동하는 걸 좀 좋아하는 사람인 것 같아요.”
안무가 ‘이준형’
선수 시절 표현력에 있어서 특히 정평이 나 있던 이준형은 선수 시절 막바지에는 자신이 탈 프로그램의 안무를 직접 만들었다. 다른 이들의 안무를 짜준 것도 이쯤이다. 작년에 은퇴한 남자 싱글 국가대표 경재석이 마지막까지 사용했던 쇼트 프로그램(Dive)이 이준형이 만든 안무였다.
이제는 얼음 위를 떠난 이준형이지만, 여전히 이준형의 안무를 기억하는 선수들로부터 안무 요청은 이어지고 있다. 지난 시즌 위서영 선수가 경기용 안무를 부탁하기도 했고, 김예림 선수의 갈라용 안무를 만들기도 했다. 김예림 선수의 갈라 안무를 칭찬하자 이준형은 익숙하지 않은 듯한 표정이었다.
“그런가요? 저는 다른 분들이 어떻게 보시는지 모르니까. 그랬다면 다행입니다.”
계속 안무를 만들 생각이 있는지. 물어보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었다.
“사실 저도 버려두고 싶지 않아요, 그 길을. 스케이팅을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고, 지금도 가끔 링크장에 가서 스케이트를 타니까요. 그래서 기회가 있다면 꾸준히 잡고 있어 볼 생각입니다.
저도 재밌고요. 다만 경기용 안무를 맡기는 조금 힘들지 않을까(싶어요). 공부도 많이 필요하고. 매 시즌 바뀌는 룰이나 트렌드를 잘 모르니까. 하지만 갈라 (프로그램) 정도는 마음 편하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 이준형이 아직까지 공개하지 못한 마지막 프로그램이 있다. 이준형 본인의 마지막 시즌인 2020/2021 시즌 프로그램들. 당시 코로나로 인해 경기에 출전하지 않았기에 공개되지 못한 프로그램들이다. 같이 연습했던 국가대표 선수 중에는 프로그램이 너무 좋았기 때문에 공개되지 못한 게 아쉽다는 코멘트도 있었다. 그것을 전달하자 이준형도 수긍했다.
“그렇죠. 아쉬웠어요. 맞아요. 쇼트랑 프리 두 개 다 저랑 안무 선생님-피겨 안무가 선생님이 아닌 다른 선생님-이랑 같이 이렇게 만들었는데 저는 너무 좋았거든요. 개인적으로 제가 되게 좋아했는데 아쉬웠죠.”
당시 경기를 더 출전하지 못하고 은퇴했던 상황에 관해 묻자, ‘이유는 크게 없었다’고 했지만 대답은 사뭇 달랐다.
“코로나로 인해서 연습을 하기가 굉장히 힘들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의욕도 많이 떨어졌고, ‘또다시 올림픽을 향해 몇 년을 내가 더 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도 많이 들었죠. ‘내가 기술적으로 더 올라갈 수가 있을까?’ 이런 생각도 들었던 것 같아요. 저를 지원해 주시던 분들께, 이제는 내가 이거 좋다고 더 하겠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을지 그런 생각도 들었고요. 그리고 동시에 감사하게 뮤지컬이라는 길이 열렸어요. 제가 욕심이 좀 났고, 이래서 자연스럽게 넘어가게 됐던 것 같아요,”
선수 이준형의 마지막 시즌은 코로나가 시작해 전 세계적으로 위험하던 시기였다. 그렇기에 십 년이나 국가대표로 활약해 온 이준형이지만 마땅한 은퇴식 없어 얼음 위를 떠나야 했다. 그에 대해 아쉬움은 없느냐는 질문에 “딱히 없다.”면서도 “혹시라도 기회가 된다면 나중에 국내대회가 열리는 링크장에서 정식으로 은퇴해도 좋겠다고 생각해요.”라고 말했다.
이준형을 기억하는 사람들이라면 설렐 수밖에 없는 코멘트였다.
정말 사랑했던 피겨스케이팅. 그렇기에 아쉬움은 없어
마지막으로 선수 시절의 자신을 돌아본다면 어떨까. 우선 선수로서의 장단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했는지 물어보자 이준형은 진중하게 대답했다. 부드럽고 빠른 것으로 유명했던 스케이팅 스킬이나, 안무 표현력 등. 사람들이 뽑는 이준형의 장점은 많았지만, 예상했던 대답은 아니었다.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뭔가 저만의 느낌은 있었던 것 같아요.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저만의 어떤 느낌’이요. 기술적인 요소 외의 것들에도 많이 신경 쓰려고 노력했었어요. 제가 좋아하기도 했고.”
그럼에도 자부할 수 있는 것은 피겨스케이팅에 대한 애정이었다.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이 운동을 진짜 좋아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이 매우 컸어요. 그건 자부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피겨스케이팅에 대한 애정이 오롯이, 그리고 강하게 느껴졌다. 그런 이준형이 뽑은 자신의 단점은 무엇일까.
“그리고 좀 부족했던 부분은 욕심이 좀 없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랬던 것 같아요. 그냥 좋아서 사랑해서 했었던 거죠. 지금 생각해 보면 1등을 하고자 하는 욕심이 남들보다 좀 떨어졌던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자신의 선수 시절에 대한 총평을 부탁했다. 이준형은 담담하지만 망설임이 없었다.
“그래도 참 열심히 했다. 그래도 후회 없다. 후회 없다는 표현이 맞는 것 같아요. 후회 없이 했다. ‘거기서 좀 이렇게 더 해볼걸’ 이런 생각이 크게 안 드는 것 같아요. 아예 안 든다면 거짓말이지만. 크게 (후회는) 안 되는 것 같아요. 후회 없이 할 만큼 했다. 그래서 이렇게 아쉬움이 없는 걸 수도 있어요.”
일말의 아쉬움이 없는 얼굴이, 오히려 진심으로 모든 것을 쏟아부었기에 가능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억도 나지 않는 까마득한 어린 시절부터 스케이트를 타고, 중학생이라는 어린 나이에 국가대표가 되어 수많은 대회에 나섰다. 오랜 시간 동안 국가대표의 맏형으로 많은 후배 선수들과 울고 웃었던 스케이터는 이제 얼음을 떠나, 무대라는 새로운 분야에서 그 빛을 발하고 있다.
더 이상 피겨스케이터 이준형을 볼 수 없음은 애석하지만, 뮤지컬 배우 이준우의 미래를 응원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지나온 길에 남겨진 노력과 진심 때문이 아닐까.
이제는 뮤지컬 배우 이준우의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한다.
[인터뷰] 익숙한 곳을 떠나 새로운 세계에서의 성장기, 뮤지컬 배우 ‘이준우’로 이어집니다.
기획 김현진, 이민정
인터뷰 진행 김현진, 이민정
촬영 및 사진 편집 김혜경, 김현진
촬영 및 영상 편집 이민정
검수 김혜경, 김현진, 박지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