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피겨스케이팅’을 정말 사랑했던 스케이터, 전 피겨스케이팅 국가대표 ‘이준형’ 에서 이어집니다.
처음 피겨스케이팅 국가대표 출신이 뮤지컬 배우로 데뷔한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 우려의 목소리가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지금까지 한번도 노래나 연기를 선보인 적 없는 스포츠 선수, 그것도 얼마 전까지 국가대표로 활약하던 선수가 데뷔를 한다니. 쉽게 받아들이기엔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준우는 사람들의 우려가 기우였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성공적으로 공연계에 안착했다.
첫 데뷔 무대에서부터 오히려 신인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안정적인 연기와 가창력을 보여준 이준우는 매 무대 꾸준히 성장하며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 나갔다. 그런 이준우에게 뮤지컬 배우로서, 그가 함께한 작품들과 그간의 경험에 대해 들어보았다.
(이 기사에서는 예명인 ‘이준우’로 표기합니다)
훈련과 병행한 오디션. 그리고 ‘이준우’가 되다.
어느덧 4년 차 배우가 된 이준우의 배우로서 첫 시작점은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의 오디션이었다.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는 선수 시절부터 ‘뮤지컬 덕후’로 유명했던 이준우가 가장 좋아하는 대극장 뮤지컬이라고. 코로나로 피겨스케이팅 훈련이 어려워졌던 시기에 열린 이 오디션에 운명을 느낀 이준우는 지원했던 ‘유다’ 역에는 떨어졌지만 ‘시몬’ 역의 오디션을 제안받게 된다. 시몬 오디션에서도 고배를 마셨지만 스스로 배우로서의 가능성을 엿보게 된 계기였다.
물론 그렇다고 당장에 피겨 스케이팅을 그만둔 것은 아니었기에 한동안 피겨 스케이팅 훈련과 뮤지컬 오디션을 병행하는 시기가 이어진다. 오디션 중에 특별한 기억이 있는지 물어보자 이준우는 ‘스프링 어웨이크닝’의 오디션을 꼽았다.
“스프링 어웨이크닝의 오디션이 두 번째로 봤던 오디션이었어요. 그것도 기억에 많이 남아요. 워크샵도 했었거든요. 1차가 영상이었고, 2차가 현장에서 노래랑 연기를 했고, 3차가 워크샵이었는데 워크샵까지 했었거든요. 2차 콜백에서 ‘안무 감독님이 아무래도 그쪽을 하셨으니까 안무를 더 열심히 춰달라고 하십니다.’라는 전화도 받았었고, 되게 재밌었어요. 그리고 그때 사람들을 굉장히 많이 만났거든요. 황휘 형, 노윤 형도 있었고 민제도 있었고, 지금 생각해 보면 많은 사람들을 그때 만났었더라고요.”
이준우는 그렇게 몇 번의 오디션을 거쳐, 창작뮤지컬 ‘라•레볼뤼시옹’의 오디션에 합격해 뮤지컬 데뷔를 하며 피겨스케이팅 선수를 은퇴하게 된다. ‘이준형’에서 ‘이준우’가 된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코로나로 힘든 시기였기에 연습부터 어려움이 많았다고.
“우리가 코로나가 걸리게 되면 다 피해를 주는 거니까. 다 조심하고 정말 집이랑 연습실만 왔다 갔다 했어요. 당사자가 아니라 한 다리 건너 누군가 걸리면 연습실을 못 오던 때였어서, 그런 것들에 대한 스트레스(도 있었어요.) 그래도 다행히 한 명도 안 걸리고 다 피해 갔거든요. 감사했죠. 지금 생각해 보면.“
코로나 감염에 대한 스트레스 외에도 비전공자로서의 고충도 있었다. 평생을 피겨스케이팅만 해온 이준우에겐 스케이팅이 아닌 대사로 전달하는 연기도, 핀 마이크를 달고 하는 노래도, 난생처음 해보는 것들 투성이었다.
“아무래도 하나부터 열까지 다 힘들었죠. 연기 자체를 처음 해보고 대사라는 걸 처음 해보니까요. 노래도 사실은 혼자서만 해봤지 이렇게 무대에서 해본 게 처음이니까. 그래서 모두가 걱정이 많았을 거예요. 저뿐만 아니라, 사실은 (제작진분들도) 굉장히 많은 위험을 감수하고 저를 (무대에) 세워주신 것이기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해서 정말 지금도 감사하고 있어요.”
그런 상황에서 이준우가 할 수 있는 것은 ‘연습’, 그리고 ‘노력’ 밖에 없었다.
“그만큼 엄청 열심히 했죠. 매일 1시부터 밤 11시까지 혼자 계속 있고 그랬었거든요. 노래도 사실은 힘들었어요. 혼자 노래하며 생긴 안 좋은 습관들을 고쳐 주셨고요. 무엇보다 연기가 제일 힘들었죠.
‘라•레볼뤼시옹’이라는 작품이 연극과 송스루(대사가 없이 노래로만 이루어진 뮤지컬) 뮤지컬을 오가다 보니 많이 힘들었어요. 그렇지만 그런 하드 트레이닝이 있었기 때문에 무대에 설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이준우의 말처럼 그의 데뷔작인 ‘라•레볼뤼시옹’은 조선 갑신정변과, 프랑스 대혁명을 오가는 작품으로, 배우들이 연기해야 하는 캐릭터도 완전히 다른 인물이다. 게다가 조선 말기 배경은 연극으로, 프랑스 대혁명 배경은 노래로만 이야기를 진행하는 독특한 구성의 작품이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이준우를 도운 것은 선수 시절의 경험이었다.
“선수 경력이 도움이 많이 됐어요. 다행히 무대 위가 긴장이 되지는 않았었거든요.”
적게는 수백 명, 많으면 만여 명의 관중이 지켜보는 빙판 위에서 홀로 스케이팅을 했던 경험은 이준우에게 큰 자산이 되었다. 덕분에 막상 무대에 섰을 때는 그렇게 긴장이 되진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 자산을 가지게 해준 선수로서의 경험이 오히려 부담이 되지는 않았을까. 여타 신인들과 달리 완전히 다른 분야에서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진 것에 대한 부담감은 없었는지 질문하자 이준우는 오히려 “똑같았다.”고 대답했다.
“선수 생활을 했다고 그게 더 부담이 되는 건 아니었어요. 그냥, 그냥. 다른 분야에서 온 만큼 큰 기대감이 없었을 테니까. 잘 준비하고, 안 좋은 평가만 듣지 않으면 감사하다는 생각으로 준비를 했던 것 같아요.”
우직하지만 정답이 아닐까. 이준우는 그의 예상보다도 더 좋은 평가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런 이준우의 다음 무대는 이준우에게 큰 사랑을 안겨준 ‘V 에버 애프터’였다.
노래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이 많아서 즐거웠던 ‘V 에버 애프터’
숲속의 뱀파이어 ‘레미’와 공국의 후계자 ‘프란체스’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이 뮤지컬에서 이준우는 숲속의 뱀파이어인 ‘레미’로 분했다. 전작인 ‘라•레볼뤼시옹’과는 극의 분위기나 캐릭터의 성격이 180도 달랐다.
“재밌고. 굉장히 특이했죠. 공연은 정극만 알았는데 이런 (스타일의) 극도 있구나 알게 되었고, 그래서 재밌었어요. 만들 때도 참 재밌었는데 연습실에서 많이 웃었던 기억이 나요. ’라•레볼뤼시옹’과는 창작 과정이 굉장히 다르게 흘러갔었거든요. 이전에는 정극이니까 연출님이 표현하시는 바가 명확했지만, ‘V 에버 에프터’는 배우들의 의견도 굉장히 많았고 다 같이 재미있게 만들었던 것 같아요.”
이준우가 꼽은 ‘V 에버 애프터’의 매력은 ‘음악’이었다.
“일단 음악이 굉장히 좋았어요. 제 취향이에요. 음악이 주는 힘이 굉장히 커서 그것도 재밌었고, 제가 이런 판타지도 굉장히 좋아해서 더 재밌었던 것 같아요.”
그러나 그 매력이 되는 ‘음악’의 음역대는 전작인 ‘라•레볼뤼시옹’과는 상당히 달랐다. ‘라•레볼뤼시옹’에서는 진성에 낮은 목소리로 노래를 했다면, ‘V 에버 애프터’에서는 진성과 가성을 모두 사용해야 했을 뿐 아니라 높은 미성으로 노래해야 했다. 하지만 이준우는 당시에 오히려 긍정적이었다.
“‘라•레볼뤼시옹’ 때는 제가 톤을 많이 낮춘 거였고, ‘레미’ 쪽이 원래 톤이어서 더 쉽고 편했어요. 게다가 노래를 굉장히 좋아하는 사람이라 제가 노래로서 보여줄 부분들이 더 많아서, 그때 되게 신났던 것 같아요.”
긍정적이었던 만큼 이준우는 ‘레미’로 큰 사랑을 받게 된다. 하지만 의외로 ‘V 에버 애프터’의 재연이 돌아왔을 때, 이준우는 뱀파이어 ‘레미’가 아닌, 상대역인 ‘프란체스’로 돌아온다. 공연계에서 해당 공연을 했던 배우가 다음 시즌에서 다른 역으로 돌아오는 일이야 흔하다면 흔하지만, 이준우는 ‘V 에버 애프터’ 재연 때 두 배역을 동시에 연기했다. 재연 당시, 공연을 상/하반기로 나누어서 다른 캐스팅으로 진행되었는데 이준우는 상반기에는 ‘프란체스’를, 하반기에는 ‘레미’를 하는 보기 드문 플랜을 선택했다. 처음으로 같은 공연의 두 번째 시즌을 맞게 된 신인으로서는 부담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정작 이준우 본인은 담담했다.
“초연 때 크로스로 (프란체스) 넘버 시연을 한번 해봤었는데 굉장히 재밌었고, ‘이것도 나랑 결이 좀 맞을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중에 회사에서 먼저 제안해 주셨고, 저도 재밌을 거 같아서 하게 됐죠.”
결이 맞을 것 같았다는 그의 예상처럼, 이준우는 약 한 달여간 ‘프란체스’ 역할을 훌륭히 해낸 뒤 다시 ‘레미’로 돌아온다. 처음으로 같은 캐릭터를 두 번째 연기해 보는 상황. 과연 어떤 기분이었을까.
“같은 역을 오랜만에 만나서 무척 반가웠어요. 당장 내일 해도 될 만큼 ‘레미’에 대한 기억 온전하게 있었던 상태였어요. 그러다 보니까 연습 과정이나 공연 때 더 발견되는 것들이 많았어요. ‘이런 게 이런 거였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것들도 많았고, 또 새로운 사람들과 작업하다 보니까 새롭게 찾아지는 부분도 있어서 재밌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연습 과정도 제법 순탄했다고 한다. 하지만 예상 외의 난관이 있었다.
“이런 어려움은 있었죠. 무대에서는 한 달 텀을 두고 두 배역을 연기했지만 연습실에서는 두 배역을 동시에 연습해야 됐거든요. 그래서 하루는 ‘레미’로 런 돌고 하루는 ‘프란체스’로 런 돌고… 그게 좀 힘들었었죠. (연기하다가 두 배역이 섞인 다거나?) 그렇진 않았는데, 연습을 혼자 두 배 해야 했어요. 그런 것들이 좀 힘들었죠.”
연습이 배가 되어 힘든 상황이었지만, 이때는 처음으로 두 개의 작품에 동시에 출연하기도 했던 시기였다. 이준우는 뮤지컬 ‘난세’에서 첫 사극에 도전하는 한편, ‘V 에버 애프터’의 연습과 공연을 함께 했다. 힘들지는 않았을까.
“컨디션이 좀 힘들었죠. ‘스톤’을 하면서 목이 한 번 안 좋아졌었는데 회복이 완전히 안 된 상태에서 계속 하다 보니까. ‘난세’할 때도 목이 굉장히 안 좋았는데 ‘V 에버 애프터’ 재연 초반에는 괜찮았다가 나중에 ‘레미’ 할 때 조금 힘들었었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도 목 이외에는 다 괜찮았다며 말하는 모습에서, 그가 거쳐온 시간이 얼핏 보이는 듯했다.
선배 배우들의 도움과 창작진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발전
‘V 에버 애프터’와 공연 기간이 겹치기도 했던 뮤지컬 ‘난세’에서 이준우는 처음으로 사극 연기에 도전한다. 사극을 연기하는 경우 생각보다 많은 배우들이 이른바 ‘사극톤’을 잡기 위해 고전한다. 이준우 역시 사극 대사를 소화하기 위해 시청각 자료와 선배 배우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이에 대해 물어보자 ‘난세’에서는 ‘정도전’ 역의 배우들-주민진, 박유덕, 정동화-의 도움을 받았다고 말한 이준우는, 다음 작품인 ‘미수’에서는 ‘자을산군’ 역의 배우들-양지원, 김지온, 김준영-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도움을 받았다고 대답했다.
특히 데뷔작이었던 ‘라•레볼뤼시옹’부터 네 번이나 함께 공연을 했던 김지온과는 ‘브라더스 까라마조프’의 ‘스메르쟈코프’ 캐릭터를 만들 때도 조언을 받았다고 한다. 그동안 창작 초연을 주로 해온 이준우에게, 여러 번 재연을 하며 사랑을 받아온 작품에 참여하게 된 건 ‘브라더스 까라마조프’가 처음이었다. 그것도 무려 네 번째 시즌. 물론 데뷔작인 ‘라•레볼뤼시옹’도 재연작이긴 했으나, 10년 만에 재연이기도 했고 초연과는 상당 부분을 개작한 작품이라 사정이 조금 달랐다.
여러 번 올라온 공연이라는 건 그만큼 많은 배우들이 저마다의 연기와 캐릭터로 호평을 받은 작품이라는 의미기도 했다. 이준우는 이 작품의 출연이 결정되었을 때, 같은 시즌에 출연하지는 않았지만 이전에 ‘브라더스 까라마조프’에 출연했던 김지온에게 의견을 구했고, 소설의 ‘스메르쟈코프’를 살린 이준우만의 ‘스메르쟈코프’가 탄생했다.
“원작을 완벽히 읽지는 못했지만. 원작을 정리한 자료를 많이 찾아봤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지온이 형과 얘기를 한 번 나눈 적이 있어요. 어떻게 하면 좋을지 방향성에 대해서요. 너무 사랑받았던 작품이고 그동안 해왔었던 배우분들이 굉장히 잘 표현하셨으니까 부담이 컸거든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 싶었는데 지온이 형이 ‘원작의 느낌을 살려보는 건 어때?’하고 이야기해 주었어요. 그러면 원작의 스메르자코프와 흡사하게 만들어 볼까?라고 생각했고 ‘계획적으로 움직이는 아이’로 연기했어요.”
그렇게 이준우만의 ‘스메르쟈코프’가 탄생했다. 하지만 캐릭터가 만들어졌다고 연기가 쉬운 것은 아니었다. 원작 특유의 철학적인 대사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데는 제법 고생했다고.
“외우는 게 어렵진 않았어요. 외우는 건 금방 외웠지만, 그게 무슨 말인지 알고 하는 게 중요하잖아요. 그런 것들이 좀 어려웠어요. ‘이게 무슨 의미일까, 얘가 어떤 의도로 이 말을 하는 것일까’에 대해서 답을 찾는 데는 좀 오래 걸렸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전체적인 틀이나 어떤 방향성을 가져야 하는지 정하는 걸 먼저 했었던 것 같아요. ‘이런 방향으로 연기하면 이 아이가 이 대사를 할 수 있겠구나’하고, 방향성을 잡아야 캐릭터의 서사가 더 충실해진다는 걸 공부했던 그런 아이였지 않았나 (싶어요)”
이 외에도 ‘스메르쟈코프’가 이준우와 전혀 다른 성격이기에 스스로의 긍정적인 성격이 묻어나지 않도록 노력하기도 해야 했다.
“스메르쟈코프야말로 공연 전에 일기까지는 아니지만, 제가 쓴 텍스트나 자료를 항상 이렇게 들여다보고 들어갈 정도로 많이 컨트롤하고 들어갔었던 것 같아요. 오세혁 연출님이 주신 시도 읽어보고요. 제가 워낙 긍정적인 사람인데 ‘이 아이를 표현하려면 긍정적이면 안 되는데.’ 이런 생각도 하면서 저를 많이 내려놓으려고 했죠.”
사랑받는 작품에 들어간다는 건 신인배우로서 기회이기도 하지만 큰 부담이었다. 그런 부담을 이겨낼 수 있었던 건 공부, 그리고 창작진들의 도움이었다. 이준우는 인터뷰 내내 ‘창작진의 의견’을 이야기할 때가 많았다. 창작진들의 의견이나 연출의 의도를 최대한 반영하려고 하는지 물어보자 이준우는 그렇다고 수긍하며 “개인적으로 주어진 범위 안에서 제 것을 충실히 소화해 내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라고 덧붙였다.
창작진과 의견이 맞지 않는 경우에는 서로의 생각을 나누며 다시 가닥을 잡는다고 한다. 연출의 의도를 최대한 소화하려고 한 것은 ‘블랙메리포핀스’ 때도 마찬가지였다.
비슷하지만 다른 결을 표현하는 법
뮤지컬 ‘블랙메리포핀스’는 동화이자 뮤지컬 영화로 유명한 ‘메리 포핀스’를 스릴러로 재해석한 작품으로 대학로에서 10년 넘게 사랑을 받아오고 있다. 이준우는 이 작품의 키가 되는 ‘요나스’ 역할로 참여한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로 공황장애와 언어장애를 앓고 있는 역할로 순수한 어린 시절과 공황장애를 겪는 성인 연기를 함께해야 하는 어려운 역할이다. 그렇기에 윤나무, 최성원을 비롯, 그동안 연기력으로 정평이 난 많은 배우들이 ‘요나스’를 도맡았다.
“’블랙메리포핀스’ 같은 경우에는 연출님이 원하는 ‘요나스’의 모습이 있었어요. 순수한, 비 맞은 강아지 같은? 그런 느낌을 굉장히 원하셨어요. 아무것도 모른다는 순수한 느낌이요.”
연출의 의도가 명확했기에, 이준우는 대신 디테일한 부분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자세라든가, 습관 같은 것을 고민했어요. 그리고 저는 항상 캐릭터를 만들 때 제 안에서 많이 찾는 편이거든요. 제 안에서 찾던가 주변 사람들에게서 찾던가. 요나스는 제 안에 있던 경험을 끄집어냈던 것도 있었던 것 같아요.”
요나스에게 담아냈다고 하는 개인적인 경험은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이준우는 말을 여러 번 고르며 말했다.
“제가 선수 때 환청이 들렸던 적이 있었어요. 해외 대회에 나가서 호텔에 누워 있는데 누가 문을 쾅쾅쾅쾅 두드렸죠. 그런데 나가보면 아무도 없고, 다시 누가 쾅쾅쾅쾅 또 두드리고. 이걸 한 10번을 반복했어요. 그러다가 나중에 깨달았어요. ‘이건 환청이구나. 부담과 압박과 경기에 대한 스트레스로 인한, 일종의 공황장애구나’라는 걸. 처음 알았어요. 선수 시절 생활하면서 처음이었던 일이었거든요. 그런 경험이. 그래서 그때 기억을 살려봤어요. 요나스 연기할 때 심장이 엄청 빨리 뛰는 불안함 같은 게 있거든요. 그런 것들을 경험에서 가져왔던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괴로웠을 기억을 배역에 담아내려고 노력했던 모습은 이제는 누가 보아도 온전한 배우의 모습이었다. 그렇게 말을 전하자 이준우는 멋쩍어하며 ‘노력한다’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비슷하지만 달랐던 ‘아가사’의 ‘레이몬드’는 어땠을까. 추리소설의 여왕으로 불리우는 ‘아가사 크리스티’의 실제 실종 사건을 다룬 미스터리 뮤지컬 ‘아가사’에서 이준우가 맡은 ‘레이몬드’는 어린 시절엔 아가사의 실종사건을 쫓는 꼬마 탐정이자, 성인이 되어서는 당시의 기억으로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추리소설가로, ‘요나스’와 같이 어린 시절과 성인을 번갈아 연기해야 했다.
“아가사도 대본이 명확해서 캐릭터를 표현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던 것 같아요. 대신에 아가사는 ‘레이몬드’ 어린 시절의 비중이 굉장히 크기 때문에, 어린 아이의 순수함과 나쁜 어른들 사이에 이런 깨끗한 아이가 하나 딱 들어왔을 때 공기의 변화라든가, 에너지 같은 것들을 표현하려고 했어요. ‘레이몬드’로서 작품을 봤을 때 ‘아가사’는 ‘레이몬드’가 기억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그 기억을 찾아가고, 마지막에 어른의 모습으로 아가사와 다시 ‘붉은 실’ 장면에서 등장했을 때, 바뀌어 있는 ‘레이몬드’의 모습과 ‘아가사’와 관계를 다시 형성한 모습을 보여주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캐릭터의 성격이나 분위기는 전혀 다르지만 뮤지컬 ‘아가사’의 ‘레이몬드’ 역시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로 괴로워하는 역할이다. 겹치는 요소가 있으면서도 전혀 다른 이 두 역을 이준우는 연달아 연기했다.
“두 캐릭터가 너무 겹치지 않도록 그런 것들을 최대한 배제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요나스도 8살 어린아이였는데 여기 ‘레이몬드’도 12살이니까. ‘캐릭터가 너무 겹치지 않을까? 표현하는 데 있어서 너무 얘(요나스)가 보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렇게 되지 않도록 신경을 썼고 최대한 다른 아이인 것을 표현하려고 했어요.”
세간의 평판을 들어보면 다행히도 그가 우려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던 것 같다.
리딩부터 함께한 작품의 본공연과 첫 대극장…무대가 가르쳐 준 절제와 성장
2024년 2월, 데뷔 4년 차가 된 이준우는 리딩공연(장면 시연 없이 대사와 노래만으로 공연하는 것으로, 정식 공연을 올리기 전에 시범 공연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에 참여했던 작품이 본공연까지 올라오는, 특별한 경험을 한다. 뮤지컬 ‘이솝이야기’가 그것. 창작 뮤지컬 중에는 리딩 공연을 통해 먼저 선을 보이고 본공연이 올라오는 경우가 많은데, 짧으면 1, 2년 안에 본공연이 올라오기도 하지만, 몇 년에 걸쳐 빌딩 기간을 두거나 본공연이 올라오지 않는 일도 흔하다. 그동안 몇 번의 리딩공연에 참여했던 이준우지만, 본공연까지 올라온 것은 처음이었다. 당시의 감회를 물어보았다.
“리딩할 때도 ‘우리 작품 너무 좋다. 따뜻하다. 이 시대에 필요한 극인 것 같다. 빨리 올라왔으면 좋겠다’ 이랬는데 생각보다 금방 올라와서 좋았죠. 그리고 본 공연도 참여할 수 있어서 되게 좋았어요.”
본공연으로 오면서 역할도 바뀌었다. 리딩 공연에서는 ‘위스퍼’ 중에 ‘바람’ 역할을 맡았지만, 본공연에서 이준우가 맡은 역할은 주인공인 ‘티모스’였다. 둘 중에 어느 역할이 본인에게 더 맞았는지 질문하자 이준우는 큰 망설임 없이 ‘티모스’를 선택했다.
“저랑 ‘티모스’가 결이 맞는 거 같아요. 제가 만든 ‘티모스’니까 제 모습이 많이 투영됐겠지만, 그동안 했던 캐릭터 중에서 가장 저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어요.”
긍정적인 성격의 이준우와 가장 닮았다는 ‘티모스’, 그래서인지 이 ‘티모스’가 나오는 ‘이솝이야기는 굉장히 따뜻한 힐링극으로 정평이 나있다. 이준우는 이 작품에서 가장 좋았던 장면으로 ‘푸르고 푸른 밤’을 꼽았다. 리프트 동작이 등장하는 등, 남녀 주인공의 듀엣 댄스가 굉장히 본격적인 장면이었다.
“리프트만 잘하면 다른 것들은 크게 어렵지 않은 부분이라 리프트를 많이 신경 썼어요. 오래 걸렸던 것 같아요. ‘리프트를 어떻게 하면 우리도 편하고 보시는 분들도 편하게 할 수 있을까.’하면서 안무팀이랑 연구를 굉장히 많이 했어요. 안무팀은 사실 저희를 이해 못했을 수도 있어요. 그들이 하기엔 다 너무 쉬운 리프트였기 때문에(웃음). 그래서 우리가 최대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말씀드리고, 다시 안무팀의 의견을 받고 하면서 그렇게 만들게 됐죠.”
그렇게 모든 창작진이 다 같이 노력해서 완성한 장면이었다고 한다. 리딩공연부터 시작해 본공연까지 올라오는 특별한 경험을 한 이준우는, 그다음 작품에서 뮤지컬 배우로서는 처음으로 대극장 무대에 오르게 된다.
첫 대극장 뮤지컬 ‘파가니니’에서 이준우는 주인공 ‘파가니니’의 아들인 ‘아킬레’로 분했다.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라고 불리웠던 ‘니콜로 파가니니’의 사후死後 매장 소송에 대해 다룬 이 뮤지컬은, 아버지가 악마가 아니었음을 증명해, 아버지의 시신을 교회에 매장하고자 하는 아들 ‘아킬레’와 파가니니의 교회 안치를 막고자 하는 교회 간의 법정 공방으로 시작한다. ‘아킬레’는 공연을 시작하는 역할임과 동시에 아버지 ‘파가니니’에 대해 관객들에게 전달하는 해설자 역할이기도 한 것. 첫 대극장 작품에서 맡기에는 부담이 크지 않았을까.
“대본으로 봤을 때 비중이 큰 역할은 아닐 수도 있지만 해보니까 굉장히 중요하고 어렵더라고요. 저희 ‘아킬레’들끼리도 연습하다 보니 ‘우리가 되게 중요하다. 우리가 중심을 잘 잡지 않으면 무대가 진행이 안 되는구나’라는 얘기를 한 번 했었어요.”
그렇다면 중심을 잡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을 했을까. 이준우는 서술자 본연의 역할인 ‘전달’에 집중했다.
“그 이야기를 나눈 다음부터 서술자로서의 역할을 어떻게 잘 수행할 수 있을까 (고민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담백하고 깔끔하게 전달하되 어떻게 하면 더 매력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겉옷을 벗거나 하는 걸로 현재와 과거 회상을 좀 더 명확하게 구분해 보려고 시도도 했었고요. 그리고 ‘절제’하는 것도 많이 배웠던 것 같아요.”
그가 말하는 ‘절제’가 무엇인지, 다음 질문에 대한 대답에서 조금은 엿볼 수 있었다. 이준우가 연기한 ‘아킬레’는 대사나 노래 없이 무대 위를 지나가는 동선으로 지나가는 장면들이 있다. 이때도 단순히 지나가는 것이 아닌, 무언의 연기로 ‘아킬레’만의 감정을 전달해야 했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나름 고전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 대사 없이 연기해야 하는 구간들을 잘 채워보려고 많이 노력했어요. 동기를 찾으려고 노력을 많이 했죠. 그런데 공연장에 올라가기 전까지 해결이 안 됐던 부분도 있어요.”
그런 이준우에게 힘이 되어 준 것은 ‘무대’ 그 자체였다. 연습실에서는 알지 못했던 세트가 가진 힘이 고민을 해결하는 열쇠가 되었다.
“무대가 주는 힘이 있다 보니까 연습실에서 발견하지 못했던 것들을 무대에서 발견하기도 하고, 리허설 도중에 발견하기도 하고, 공연을 하면서 발견하기도 하면서 점점 변해갔던 거 같아요. 아마 ‘스캔들’ 부분이었던 것 같은데 그 부분의 동선이 처음엔 굉장히 힘들었어요. 연습실에서는 몰랐는데, 무대에 올라가 보니까 ‘파가니니’가 제 위에 있더라고요. 그때부터 아버지를 인식하고 동선의 이유를 찾았던 것 같아요.”
‘파가니니’에서는 그 외의 특별한 경험도 있었다. 이준우가 배우의 꿈을 키우는 계기가 되어 주었던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의 ‘유다’ 역을 맡았던 배우 윤형렬과 함께 공연을 한 것. 이준우는 무대 위에서 윤형렬이 맡았던 ‘루치오’와 치열하게 법정 공방을 벌였다.
“형렬이 형에게 이야기하기도 했어요. 저는 그때 그거(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보고 꿈을 키웠다고요. 연습실에서 형이 칭찬을 많이 해주셔서 되게 감사했어요.”
‘이준우’ 전, 그리고 앞으로의 이야기
‘파가니니’를 마친 이준우는 잠시 휴식기를 가지고 있다. 올 7월에는 군입대가 기다리고 있다. 20년간 운동을 하고, 은퇴 직후에 바로 데뷔를 했다 보니 이렇게 길게 쉬는 것은 처음이라고.
“집 정리도 조금 하고, 그동안 정리 못 했던 것들을 정리도 좀 하고, 운동도 하고 싶은 것도 좀 하고. 공연도 많이 보러 다니고.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것 같아요.”
처음으로 보내는 긴 휴식기를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 질문하자 돌아오는 대답이다. 역시나 가만히 있는 것은 영 맞지 않아 보였다.
쉬는 동안 열심히 공연을 보고 있다고 하는 그에게 데뷔 이후에 공연을 보는 시선이 바뀌었는지를 물어보자 “공부하는 것이 더 추가됐다.”라고 말하는 이준우. 그럼에도 공연을 즐기는 것은 바뀌지 않았다고 한다.
“아무래도 공부하면서 보게 돼요. ‘내가 저 역할을 하면 어떻게 할까’ 이런 것도 많이 생각하게 돼요. 그렇지만 즐길 부분은 또 즐기면서 공연을 보는 것 같아요. 그동안 즐기면서 보던 것들에 공부가 조금 더 추가된 것 같네요.”
관극과 공부는 군입대 이후에도 계속 이어질 전망이다. 사회복무요원으로 군복무를 하게 된 이준우는 그 기간 동안에도 공부를 놓지 않을 거라고.
“(무대와) 멀어지지 않게 공연도 많이 보러 다니고, 노래도 꾸준히 하려고요. 기회가 되는 대로 연습할 수 있으면 연습도 하고 공부도 많이 할 예정이에요. 전공자가 아니니까 노래든 연기든 공부를 많이 하고 싶어요. 멀어지면 감을 잃어버릴 수도 있으니까, 감을 잃지 않게끔 많이 노력해서 돌아올 예정입니다.”
가능하다면 노래 레슨도 꾸준히 받을 예정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배우 이준우’의 목표는 무엇일까. 어떤 배우가 되고 싶냐는 질문에 이준우는, 천천히 말을 고르면서도 의욕적인 모습은 숨기지 않았다.
“어떻게 표현해야 될까요. ‘올라운더’? 이게 맞는 표현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연극도 하고 싶고, 기회가 되면 카메라 연기도 해보고 싶고. 하고 싶은 게 좀 많아요. 욕심이겠죠. 욕심인 걸 알지만 다 잘할 수 있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도전을 많이 해보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부탁했다.
“제가 3년 정도 활동을 했는데 이렇게 많이 사랑받을 줄은 사실 몰랐어요. 정말 감사하고 너무너무 감사해요. 편지에 그런 말씀을 많이 적어주셨더라고요. 제가 예전에 ‘제가 뭐라고 이렇게 사랑을 해 주십니까’이랬는데 그런 표현하지 말라고요. 그래서 그런 표현은 이제 안 하기로 했어요. 그냥 감사하고, 저한테 해주시는 응원에 보답할 수 있게 항상 열심히 해서 믿고 볼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열심히 잘 쌓아서 돌아올 테니까요, 언젠가 또 무대에서 뵀으면 좋겠습니다. 그때까지 재밌는 거 많이 보러 다니시고, 건강하게 지내시다가 다시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마지막까지 팬들의 공연 관람까지 배려하는 것이 ‘뮤지컬 덕후’ 이준우답다면 다웠다.
인터뷰에 앞서, 이준우에게 ‘이준우’라는 이름이 익숙해졌는지를 물어보자 이젠 원래 이름이 더 어색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름을 바꾸고, 새로운 세계에 뛰어든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어린 시절부터 익숙했던 장소와 사람들을 떠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불안하고 두려운 일이다. 그것도 ‘그곳’에서 확고한 커리어를 쌓았다면 더.
다른 세계를 동경하는 마음은 누구나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직접 그 세계에 뛰어들어, 꿈을 이루고자 하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이다. 이준우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해, 그동안 자신이 쌓아 두었던 커리어를 뒤로하고 거침없이 꿈의 세계에 뛰어들었다.
이제는 잠시 멀어지겠지만, 그가 다시 돌아와 지금처럼 자신만의 자리를 만들어 나갈 것이란 데에는 의구심이 들지는 않는다. 그건 지난 3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가 보여준 진실함과 진정성 때문일 것이다. 피겨 스케이팅 선수일 때도, 그리고 뮤지컬 배우가 되어서도. 그 중심에는 ‘노력’과 ‘진심’이 있다. 투박하지만, 이만큼 빛나는 단어가 또 있을까. 그 ‘노력’과 ‘진심’이 그가 다시 이 자리로 돌아올 때, 여전히 그를 빛나게 해줄 가장 큰 힘이 되어줄 것이다.
기획 김현진, 이민정
인터뷰 진행 김현진, 이민정
촬영 및 사진 편집 김혜경, 김현진
촬영 및 영상 편집 이민정
검수 김혜경, 김현진, 박지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