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메라 앞에 선 허지유가 수줍게 웃으며 입을 가렸다. 화장기 없는 앳된 얼굴, 인터뷰가 낯설어 어색해하는 모습. 만 13세 소녀의 여린 웃음 뒤에는 빙판 위에서 누구보다 단단하게 도약하려는 국가대표의 의지가 숨어 있다.
2025-2026 시즌, 허지유는 주니어 그랑프리 무대에 화려하게 데뷔했다. 데뷔 전이었던 1차 라트비아 리가 대회에서 깜짝 은메달을 목에 걸었고, 이어진 7차 아랍에미리트 대회에서는 12위에 오르며 쓰라린 성장통을 겪었다. 콘크리트 바닥을 뚫고 피어나는 꽃처럼, 매일 성장하고 있는 허지유와 그녀의 어머니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빙판 위를 달리는 즐거움, 그 순수한 시작
평창 올림픽의 열기가 채 식지 않았던 2018년. 압구정의 작은 미니 링크 와이키키에서 허지유의 스케이팅 인생은 시작됐다. 취미를 나누던 유치원 친구들과 우연히 접한 ‘원데이 클래스’가 그 시작이었다. 거창한 목표는 없었다. 그저 얼음을 지치는 속도감이 좋았고, 얼굴을 스치는 바람이 재밌던 소녀는 그곳에서 첫 스승인 송여진 코치와 빙판 위에 서게 됐다.
‘피겨의 해’였던 2018년, 허지유는 평창 올림픽 현장에 있었음에도 피겨 경기는 보지 않았다. 가족들과 스키를 타러 갔다가 우연히 관람한 것은 피겨가 아닌 ‘스키 점프’였을 정도였다. ‘반짝이 옷’도, ‘악셀 점프’도 몰랐다. 그저 스케이트 타는 행위 자체가 좋아 시작한 ‘천생 스케이터’였던 셈이다.
그랬던 꼬마 허지유가 선수라는 꿈을 구체적으로 꾸기 시작한 건, 2020년 2월 목동에서 열린 4대륙 피겨스케이팅 선수권대회부터였다.
“엄마, 나 혼자 볼 수 있어”…
8살 어린이의 홀로 직관기
피겨스케이팅을 시작한 지 얼마되지 않았던 2020년 2월, 허지유는 우연히 얻은 전일권 티켓으로 생애 첫 국제대회 관람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당시 생후 100일이 갓 지난 어린 동생과 일 때문에, 어머니가 장시간 곁을 지키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때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허지유는 뜻밖의 선언을 했다. “나 혼자 들어가서 볼게.”


모(모친 박태윤, 이하 ‘모’) : 그땐 제가 일도 했었어요. 둘째는 2019년생이라 한 100일이고요. 근데 지유가 혼자 보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친구도 없이 혼자 들어가서 6시간, 8시간씩 경기를 봤어요. 혼자 컵라면 사 먹으면서요. 옆자리에 계시던 어떤 할머니께서 기특해 보이셨는지 태극기를 선물로 주시기도 했대요.
문(문화포커스, 이하 ‘문’): 그때 기억 나는 게 있나요?
지유(허지유, 이하 ‘지유’): 유영 선배가 트리플 악셀 뛰던 거 기억나요. 2등하셨잖아요. 키히라 리카 선수도 기억나요. 공책에 볼펜으로 이름 써가면서 응원했어요.
모: 그때 눈이 너무 반짝반짝했던 것 같아요. 언니들 매일 응원한다고. 그때 진짜 신기했던 게, 공책에다 아이스댄스 점수까지 다 적어가면서 보더라고요. 그때까지만 해도 그냥 타는 게 즐거워서 했던 건데, 대회를 보면서 ‘아, 피겨가 이런 거구나’, ‘대회라는 게 이런 거구나’라는 걸 처음 깨달은 거죠.
그날 목동 아이스링크 관중석 한구석에서 컵라면을 먹으며 노트를 끄적이던 꼬마는, 비로소 ‘그냥 스케이트 타는 아이’에서 ‘피겨 꿈나무’를 꿈꾸는 유망주로 다시 태어났다. 처음으로 간 롯데월드 아이스링크에서 밤 늦게 훈련하는 모습에 ‘이렇게 어린 친구들이, 이 밤에 잠을 안 자고 열심히 하는구나’하고 충격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각성과 동시에 예기치 못한 시련이 찾아왔다. 코로나19 팬데믹이었다. 막 꿈을 키우기 시작한 시점에 링크장이 줄줄이 문을 닫는 암흑기가 찾아온 것이다. 이때 어린 허지유를 포기하지 않고 이끈 건 첫 스승 송여진 코치의 남다른 열정이었다.
문: 2020년이면 코로나가 확산되던 시기잖아요. 갓 시작한 선수에게는 치명적이었을 텐데요.
모: 맞아요. 선생님이 지유가 첫 제자기도 하고, 키워보고 싶은 마음이 크셔서 진짜 애를 많이 써주셨어요. 그래서 뭔가 목표가 딱히 없는데도, 방향이 어떤 루트인지도 모르는데 그냥 선생님이 잘 끌고 가 주시니까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지유를 거의 1:1로 전담해서 키우셨는데, 어떻게든 대관 잡아주시고, 계속 훈련을 이어가게 해 주시고. 그래서 (코로나 시기를) 리듬이 끊기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더블 악셀까지는 돼야 무언가를 할 수 있다’라는 얘기들을 들어서 지하 링크장도 가고, 얼음질 안 좋은 지방 링크도 찾아다니면서요.
문: 1:1 레슨이라 훈련이 외롭진 않았나요?
모: 선생님도 그걸 걱정하셔서 홍예슬 선생님 대관에 저희를 게스트로 끼워주셨어요. 덕분에 지유가 언니들이랑 꽁냥꽁냥 놀기도 하고 팀 분위기도 느끼면서 그 힘든 시기를 재미있게 버텼던 것 같아요.
선생님께는 지유가 첫 제자라 정말 애를 많이 써주셨죠. 지유가 점프가 안 돼서 힘들어하면 선생님도 같이 힘들어하실 정도로 진심이셨어요.
문: 개인이 아니라 팀으로 해도 좋은 것도 있겠다를 처음 느꼈겠어요. 이후 지현정 코치 팀으로 옮기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모: ‘외동이 제일 힘들다’고 하잖아요. 사실 코로나가 끝날 때쯤에도 다른 큰 팀을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선생님은 항상 얘만 바라보시잖아요. 선생님께 지유가 자기 혼자 스스로 이겨내는 법을 배워야겠다고 했어요. “큰 물에 가서 묻혀도 보고, 스포트라이트가 아니라 좀 따라가도 보고, 어때 너머로도 배우고…” 그래서 4학년 2학기, 딱 여름방학에 선생님이 본인 선수 시간을 겪어봤을 때, 아이한테 제일 잘 맞을 것 같아서 지현정 코치님께 연결을 해 주셨어요. 진심과 진심이 통했던 것 같아요. 선생님이 너무 애써 주시는데, 선생님을 위해서도, 지유를 위해서도.
그리고 말씀해주신 것처럼 실제로 지코치님, 진서 코치님과 잘 맞았어요. 지유의 스타일이나 성향에 맡게, 긴장을 놓지 않고 열심히 훈련할 수 있도록 많이 도와주세요. 지유를 4학년부터 쭉 봐오셔서 아이의 스타일이나 성향을 제일 잘 알고 계시고, 선수를 잘 이끌어주고 계시거든요.



롤러코스터 같았던 데뷔 시즌, 그리고 깨달음
이번 시즌 허지유의 쇼트 프로그램은 스테판 랑비엘 코치와 함께했다. <Sentimental Journey>와 <I’m Looking Over a Four Leaf Clover>를 리믹스한 곡으로, 넓은 초원 위에서 네잎클로버를 찾는 천진난만한 소녀의 모습을 담았다. “심판에게 윙크도 하고 꽃받침도 하며 최대한 귀여운 매력을 어필하려고 노력한다”는 설명이다.
반면 미샤 지 안무가와 작업한 프리 스케이팅 <Flower Through Concrete>는 정반대의 분위기다. 잔잔한 피아노 선율을 배경으로 척박한 콘크리트 바닥을 뚫고 피어나는 꽃의 강인한 생명력을 감동을 전할 수 있도록 움직임으로 표현했다.
그렇게 야심차게 준비한 프로그램으로 2025년 7월, 허지유는 주니어 그랑프리 선발전에서 4위를 차지하며 당당히 두 장의 출전권을 획득했다. 그리고 첫 국제 무대였던 라트비아 대회(1차)에서 총점 186.55점으로 은메달을 획득하며 한국 피겨계를 놀라게 했다.
문: 첫 주니어 그랑프리 데뷔전에서 은메달을 땄어요. 예상했던 결과였나요?
지유: 진짜 메달을 딸 줄은 몰랐어요. 아무것도 없으니까 경험으로 나가보자 해서 갔는데, 현장 분위기가 너무 좋았어요. 한국보다 시원한 날씨도 좋았고, 버스 타고 링크장에 가거나 여권 검사를 하는 과정 하나하나가 다 처음이라 너무 재미있었어요. 프리 경기 날 살짝 떨리긴 했는데, 쇼트 때는 정말 하나도 안 떨렸어요. ‘와, 이건 뭐지?’ 하면서 다니느라 긴장할 시간조차 없었던 것 같아요.
프리에서는 처음에 럿츠 실수(1회전 처리)하고 ‘진짜 망했다. 다른 거 살리지 않으면… 진짜 너 안 돼!’ 이러면서 스핀 같은 것도 진짜 레벨 다 채우려고 노력했고, 점프도 진짜 뭔가 조마조마하면서 뛰었어요.
허지유가 단기간에 국가대표급 선수로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은 타고난 ‘집요함’이었다. 점프를 뛸 때 손의 각도는 어때야 하는지, 어깨는 얼마나 내려야 하는지. 그녀는 스스로 납득할 때까지 파고드는 완벽주의자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번 7차 대회에서 겪은 성장통의 원인 역시 그 ‘지나친 생각’에 있었다.
문: 반면 7차 아부다비 대회(12위)는 조금 아쉬움이 남았을 것 같아요. 1차 대회의 호성적이 부담이 되진 않았나요?
지유: 1차 대회가 끝나고 연습 과정에서부터 뭔가 좀 꼬였던 것 같아요. 대회를 계기로 마음을 바꿨어요.
모: 지유가 생각이 정말 많아요. 선생님이 지적 하나를 하시면 그걸 고치기 위해 끝까지 파고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거든요. 더 잘하고 싶은 마음에, 점프를 더 잘 뛰려고 바꿔보고, 비거리도 신경 써야 되고, 이렇게 파고들어요. 그래서 순조롭게, 그냥 루틴대로 연습이 안 됐던 게 문제였던 것 같아요. 점프 비거리나 자세 하나하나를 완벽하게 만들려다 보니, 정작 중요한 전체적인 훈련 루틴이 깨져버린 거죠. 이제 바꾼 점은 그냥 정말 잘하려고 하지 말고, 완벽한 점프를 원하지 말고. ‘매일 똑같은 걸 밥 먹듯이 하자. 꾸준히.’



“새로운 도전이 좋아요”
스위스 전지훈련부터 왁킹 댄스까지
허지유는 빙판 위에서 단순한 모범생이기를 거부한다. 그녀는 늘 남들과 다른 자신만의 ‘한 끗’을 찾아 헤매는 탐험가다. 안무가가 다섯 가지 곡을 제안하면, 주저 없이 다른 선수들이 사용하지 않은 가장 독특하고 개성 있는 곡을 선택한다.
특히 화제가 됐던 2023년에 사용한 프리 스케이팅 <카르멘> 역시 정통 오페라가 아니었다. 드라마 <에밀리, 파리에 가다> 속 패션쇼 음악을 차용하며, 의상도 흔한 ‘블랙&레드’ 대신 파스텔톤의 보라색을 택했다. 이 ‘이색 카르멘’을 소화하기 위해 그녀는 링크장 아크릴 펜스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30분 넘게 왁킹 동작만 연습하기도 했다. “동작이 좀 어렵긴 했는데, 그냥 신나니까 계속 연습하다 보니 몸에 익더라고요.”라며 웃었다.
이제는 그녀의 시그니처가 된 ‘한 손 비엘만 스핀’ 역시 이런 치열한 고민과 연습 끝에 탄생한 결과물이다. 자신의 색깔을 찾기 위해 허지유는 프로그램의 원작 미디어도 바쁘게 찾아보고, 피겨스케이팅에서는 종목을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스펀지처럼 흡수한다.
문: 롤모델이나 영감을 주는 선수가 있나요?
지유: 너무 많아요(웃음). 김연아 선배님, (신)지아 언니는 물론이고 일본의 치바 모네, 나카이 아미 선수도 좋아해요. 키히라 리카, 네이선 첸, 하뉴 유즈루, (이)해인 언니… 정말 다 좋아해요!
문: 싱글 선수들뿐만 아니라 다른 종목도 챙겨 본다고요.
지유: 네, 이번에는 진짜 럭키하게 연맹에서 4일권을 주셔서 많이 봤어요. 특히 4대륙 선수권 때 아이스댄스의 매디슨 척 & 에반 베이츠, 그분들의 경기를 직접 보고 완전히 반했거든요. 스위스 캠프에서 뵌 시제롱 선수도 좋아하고, 이번에 복귀하시는 시부타니 남매도 너무 기대돼요.
문: 다른 종목을 보면서 어떤 점을 배우나요?
지유: 싱글 선수들에게서는 점프 기술을 배우지만, 아이스댄스 선수분들은 음악에 대한 표현력이 정말 남다르잖아요. 그런 감정 표현을 배우고 싶어요. 그리고 랑비엘 선생님이 스핀을 정말 잘하시잖아요. 점프, 표현력, 스핀까지 다 잘하고 싶어요.
허지유는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녀는 싱글 스케이터의 점프, 아이스댄서의 섬세한 표현력, 그리고 스승의 독보적인 스핀 기술까지. 장점을 하나하나 수집해 자신만의 퍼즐을 맞춰가고 있었다.
그녀의 이런 도전적인 성향은 어머니의 결단력과도 닮아 있다. 남들이 많이 선택하는 북미 대신 스위스 샴페리로 건너가 스테판 랑비엘 팀에서 훈련한 것은 전적으로 어머니의 과감한 추진력 덕분이었다.
피겨 전문가가 아니었던 어머니는 우연히 스테판 랑비엘 코치의 인터뷰 기사를 읽고 그의 교육 철학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왕 일반 학생들처럼 평범하게 키우지 못할 거라면, 아이가 사랑하는 이 일을 더 행복한 방식으로 발전시켜 주고 싶다.” 그 마음 하나로 어머니는 무작정 랑비엘 팀에 개인 메일을 보냈다. 에이전트도, 지인도 없는 상황에서 오직 ‘아이의 행복한 스케이팅’을 위해 보낸 진심 어린 편지가 스위스 유학의 문을 연 것이다.
문: 2024년 비시즌에 스위스로 처음 전지 훈련 갔던 걸로 알고 있어요. 보통 전지 훈련을 국내 선수들 같은 경우는 북미 쪽으로 가는 경우가 많은데 어떻게 스위스 전지 훈련을 가게 됐는지 궁금해요.
모: 제가 피겨 전문가는 아니지만, 랑비엘 선생님의 골든 스케이트(외신) 인터뷰를 읽는데 마음이 움직이더라고요. 아이를 어떻게 키우고 싶은지, 어떤 자극을 주고 싶은지에 대한 철학이 너무 좋았거든요. 피겨를 정말 좋아해서 시작했는데, 코로나 시기를 겪으면서 너무 점프 성공이나 루틴한 일상에만 갇혀 사는 것 같았어요. 그때 마침 승급 심사나 대회가 없는 해였거든요. 그래서 성적이나 기술을 떠나서, ‘피겨를 진짜 즐겁게 타는 법’을 배우게 하고 싶었어요. “누가 갔는데 좋더라” 하는 후기 하나 없었지만, 그냥 아이가 오래도록 즐겁게 스케이트를 탔으면 하는 마음으로 직접 메일을 보내서 가게 된 거죠. 기술적으로도 너무 많이 배우고 왔어요. 피겨가 이렇게 넓은 영역이구나를 아이가 스스로 많이 배웠더라고요.
문: 스위스 랑비엘 캠프 훈련은 어땠나요? 언어 소통이나 생활이 어렵진 않았나요?
지유: 처음에는 낯설어서 라커룸 들어가는 것도 부끄러워했는데, 이제는 친구들과 친해져서 같이 카드 게임도 하고 춤도 추며 놀아요. 2주 정도 있었는데, 거기서는 지슬란 선생님이 점프를 가르쳐주세요. 트리플이라든지 쿼토(4회전 토루프)라든지. 그런 거 좀 많이 배웠고, 그리고 다른 선생님들은 한 네 분 정도가 계세요. 안젤로 선생님, 겔리스 선생님, 줄리아 선생님, 아리아나 선생님… 점프랑 스케이팅 둘 다 가르쳐 주시는 분도 있고, 스케이팅을 좀 더 중심적으로 안무나 점프를 하시는 분들이 계셨어요.
스위스 전지훈련을 처음에 갔을 때 스케이팅이 엄청 늘었던 것 같아요. 거기서는 1시간 대관을 한 두 번 정도밖에 안 타는데 거기서 양은 한 대관당 반 이상이 스케이팅이고 점프는 한 20분, 30분 해가지고 스케이팅만 계속 하니까. 1:1이나 1:2로 해가지고. 속도를 내고 막 활주하는 그게 아니고, 엣지 쓰는 것을 많이 해요.
모: 몸이 커지고 점프 감각을 잃어도, 엣지를 쓸 수 있으면 점프를 뛸 수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무작정 떠난 스위스행은 뜻밖의 인연으로도 이어졌다. 애초에 안무를 받을 생각조차 없었던 모녀에게 ‘피겨 전설’ 스테판 랑비엘이 직접 손을 내민 것이다. 그 과정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문: 랑비엘 선생님께 안무를 받은 것도 미리 계획된 게 아니었나요?
모: 저희가 누구 소개로 간 게 아니니까 상상도 못 했죠. 그런데 훈련 중에 링크장 뒷문에서 우연히 랑비엘 선생님과 마주쳤어요. 그때 용기를 내서 여쭤봤죠. “(랑비엘 선생님이 아니더라도) 우리 여기 있는 동안 다른 선생님한테 안무라도 받아 갈 수 있을까요?” 그런데 선생님이 흔쾌히 “같이 해보자”고 하시는 거예요. 본인이 직접 해주시겠다고 “오케이”를 하신 거죠!
그렇게 우연과 행운이 겹쳐 탄생한 프로그램은 허지유에게 무엇보다 특별한 자산이 되었다. 지난 시즌(2024-25) 프리 스케이팅 프로그램 <Tirol Concerto for Piano and Orchestra: Movement II>는 시니어 무대에서 다시 선보일 날을 기다리고 있다.
허지유에게 랑비엘의 ‘스케이팅 스쿨’은 기술을 넘어 예술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낯선 기술과 독특한 안무. 외국인 안무가인 랑비엘과 첫 작업은 그녀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문: 해외 안무가와의 작업은 처음이었잖아요. 기억에 남는 과정이 있나요?
지유: 모든 게 새로웠어요. 처음 시작할 때 바닥에 손을 짚고 한 바퀴 도는 안무가 있었는데, 그런 동작 자체가 너무 신기하면서도 어렵더라고요. 턴도 제가 편한 방향이 아니라 반대쪽으로 도는 어려운 기술들이 많아서 처음엔 계속 실수하고 연습을 엄청 많이 했어요.
문: 가르치는 방식도 한국과는 좀 달랐을 것 같아요.
지유: 네, 기술적인 것도 있지만 ‘느낌’을 더 강조하세요. 음악이랑 타이밍을 어떻게 맞춰야 하는지, 어떤 감정을 실어야 하는지요.
모: 랑비엘 선생님이 워낙 감성이 풍부한 분이시잖아요. 지난 시즌 프리 스케이팅은 랑비엘 선생님 바로 그 전 주에 파리에서 발레 공연을 보시고 이 음악에 너무 빠지셔서 주신 안무예요. 그래서 그런 현대무용, 현대 발레 식으로 표현했던 것 같아요.
이번 쇼트 프로그램을 짤 때도 지유한테 계속 “해피!”를 외치셨어요. 아이가 정말 기분 좋게 탈 수 있도록 감정을 계속 이끌어 내주시더라고요.
아름다운 풍경과 행복한 훈련 환경, 그리고 세계적인 코칭 스태프까지. 스위스에서 계속 훈련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법도 했지만, 허지유와 어머니는 의외로 냉철한 결론을 내렸다. 자유만큼이나 긴장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문: 현지 훈련 만족도가 높은데, 아예 해외로 거점을 옮겨서 훈련해볼 생각은 안 해봤나요?
지유: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거기는 좀 너무 자유로운 느낌이에요. 그래도 한국에 와서 다시 긴장감이 필요한 것 같아요.
모: 둘 다 필요한 것 같아요. 스위스는 너무 좋은데, 1년 내내 거기 있으면 아이가 정말 마냥 ‘행복’해지기만 할 것 같더라고요(웃음). 아직은 분위기에 휩쓸리기 쉬운 나이라, 한국의 루틴하고 잡아주는 분위기도 반드시 필요해요. 아무래도 지유에게 지현정 코치님과 김진서 코치님의 역할이 크거든요.



링크장 밖에서도 계속되는 ‘자신만의 길’
허지유의 남다른 행보는 링크장 밖에서도 이어진다. 보통의 선수들이 훈련을 위해 학업을 최소화하는 것과 달리, 허지유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학업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처음에는 SSI 국제중학교에 진학했다. “미국 학교처럼 개인 사물함이 있고, 교과서 들고 교실을 이동하는 방식이 신기했다”는 허지유는 1년 뒤, 과감하게 Laurel Springs School(미국 커리큘럼)로 전학을 택했다. 국가대표로 선발되면서 오전에 잡힌 공식 훈련 스케줄을 소화하기 위해서였다.
문: 일반 학교 대신 온라인 학교를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모: 지팀은 그래도 오후랑 저녁에 수업이 훈련이 많아서 학교를 조금 갈 수는 있었는데, 국가대표가 되면서 훈련 시간이 오전으로 바뀌었어요. 학교에 아예 못 가는 상황이 된 거죠. 지금은 이제 온라인 학교로 바꿨고요. 결론적으로 그래도 수업을 조금이라도 들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그랬어요. 대표팀 선수들은 학교에 안 가도 출석 인정이 되긴 하지만, 그러면 사실상 공부를 놓게 되잖아요. 저는 아이가 나중에 무슨 일을 하든 수학이랑 영어 정도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지유: 국제중 다닐 때는 수업 시간이 길어서 2교시만 하고 밥 먹고 바로 대관 타러 가야 했거든요. 지금은 공부는 다른 학생들이랑 똑같이 하고 있어요.
문: 온라인 학교면 수업은 어떻게 듣나요?
모: 미국에 있는 학교예요. 운동 선수들이 많이 다니더라고요. 스위스에 있든 한국에 있든, 장소 구애받지 않고 수업 듣고 과제를 제출하면 돼요. 물론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공부가 조금은 되고 있는 것 같아요.
지유: 예전에는 다 혼자 해야 해서 힘들었는데, 지금은 엄마가 옆에서 도와주셔서 어려운 것도 좀 더 수월하게 할 수 있어요.
학업과 훈련, 두 마리 토끼를 잡으며 숨 가쁘게 달려온 허지유는 이번 시즌 처음으로 국가대표 타이틀을 거머쥐며 태릉에 입성했다. TV에서만 보던 국가대표 언니들과 함께 땀 흘리는 매일이 허지유에게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문: 국가대표가 되고 나서 가장 달라진 점은 무엇인가요?
지유: 대관 시간이나 환경이 많이 좋아졌어요. 무엇보다 하루 종일 태릉에 있으니까 언니들이랑 같이 밥도 먹고, 쉬는 시간에 카드 게임도 하면서 훈련하는 게 너무 좋아요. 물리치료 선생님들도 계시고, 진짜 필요한 것들이 다 갖춰져 있어서 운동에만 집중할 수 있어서 좋아요.
훈련에만 매진할 수 있는 태릉선수촌에서도 허지유의 하루하루는 바쁘다. 매일 오전 1시간씩 온아이스에서 표현력과 스케이팅 스킬을 다듬고, 3시간은 오로지 점프 훈련에 쏟아붓는다. 하지만 그녀의 일과는 얼음 위에서 끝나지 않는다. 빙판 밖에서 흘리는 땀방울이 오히려 더 굵다. 곧바로 이어지는 강도 높은 지상 훈련이 그녀를 기다린다.
문: 하루에 온아이스 훈련만 4시간이면 운동량이 상당하네요.
지유: 사실 다른 선수들에 비하면 제가 그렇게 (온아이스 훈련이) 많은 편은 아니에요. 대신 저는 오프아이스(지상 훈련)가 좀 더 많은 편이에요.
모: 오프아이스를 정말 많이 해요.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다니는 재활 트레이닝 센터가 있는데, 지금도 일주일에 세 번 정도 가서 한 번에 5~6시간씩 운동해요. 집 근처라 꾸준히 다니고 있는데, 거기서 몸 만들기를 다 하는 것 같아요. 컨디션이 좋으면 근력 강화 트레이닝을 하고, 안 좋으면 재활이나 치료를 받고요. 부상 방지에 굉장히 비중을 많이 두고 있어서, 복근 운동부터 케어까지 꼼꼼하게 다지는 시간이죠.
화려한 기술 이전에 “다치지 않는 몸”을 만드는 것이 먼저라는 철학. 2학년 때부터 묵묵히 쌓아온 그 기초 체력 덕분에 허지유는 4년째 쿼드러플(4회전) 점프라는 고난도 기술을 부상 없이 꾸준히 시도할 수 있었다.
문: 쿼드러플(4회전) 토룹 점프를 연습해왔다고 들었어요.
지유: 네, 연습 시작한 지는 거의 4년 넘은 것 같은데… 아직도 못 뛰고 있긴 하지만요(웃음). 팀 대관 때는 하네스(보조 장치) 선생님이 계시지만, 태릉에서는 없어서 저 혼자 계속 부딪혀보고 있어요.
문: 현재 완성도는 어느 정도인가요?
지유: 아직 한 발로 착지하는 랜딩이 잘 안 나와요. 회전은 어느 정도 도는데, 딱 맞아떨어지는 타이밍을 아직 못 찾은 것 같아요. 그 ‘감’만 찾으면 될 것 같아서 포기하지 않고 계속 시도하고 있어요.
문: 어린 선수에게 4회전 점프는 부상 위험도 있어서 조심스러울 것 같아요.
모: 맞아요. 그래서 아이 몸 상태를 보면서 조절해요. 집중적으로 연습하다가도 조금이라도 아프거나 무리가 오면 확 줄이고요. 대신 그 감각은 잃지 않게 유지하려고 해요. 지금 당장 무리해서 성공하기보다, 아이의 몸이 완전히 준비되었을 때를 기다리며 그 끈을 놓지 않는 거죠.
화려한 기술 이전에 기본기와 몸의 성장을 먼저 생각하는 기다림. 허지유는 그렇게 서두르지 않고, 하지만 멈추지도 않고 착실히 자신만의 속도로 ‘4회전의 벽’을 두드리고 있다.


콘크리트를 뚫고 피어날 그날을 위해
“단순히 ‘주니어에서 성적을 내야지’라고 생각하기보다, ‘시니어로 가기 위한 과정을 밟는다’고 생각하고 싶어요. 시니어를 바라보면서 주니어를 보내는 거죠. 많은 대회를 경험하면서 쌓아가고 싶어요.”
이제 겨우 13살. 하지만 허지유의 시선은 단순히 눈앞의 메달 색깔에 머물러 있지 않다. 그녀는 주니어라는 틀을 넘어 더 먼 미래를 그리고 있다.
이런 의젓한 태도는 어머니의 교육 철학에서 기인한 것을, 한 시간의 대화에서 알 수 있었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뒤, 묵묵히 훈련하며 자신을 갈고닦는 시간이 훨씬 길고 고독하다는 것을 알기에 어머니는 딸에게 항상 “결과보다 과정”을 강조한다.
모: 아이에게 항상 말해요. 세계적인 선수가 된다 해도 그것 역시 긴 인생의 과정일 뿐이라고요. 대표가 되고, 그랑프리에 나가고… 항상 ‘그다음’이 있잖아요. 결과에만 매몰되면 나중에 허무해지기 쉬워요. 그래서 ‘이 어려운 걸 혼자 하라는 게 아니라 엄마랑 같이 하자’고, ‘우리는 과정을 이겨나가는 중’이라고 이야기해 줘요.
어머니의 든든한 동행 덕분일까. 허지유는 스스로를 믿는 법을 터득하고 있다. “아직 멘탈이 그렇게 강한 편은 아닌 것 같다”며 수줍게 웃던 그녀는 항상 경기 전 ‘난 할 수 있어’를 다섯 번 외치고 들어간다며, 자신만의 주문을 공개했다.
그녀가 주문을 걸며 도달하고자 하는 경지는 명확하다. 관객이 보기에 ‘와’ 소리가 절로 나오는 연기. 허지유는 그 비결을 이미 알고 있었다.
지유: 이번에 아미 나카이 선수의 프리(프랑스 그랑프리)나, 네이선 첸 선수의 베이징 올림픽 프리, 그리고 지아 언니의 <안녕, 헤이즐>을 보면서 느꼈어요. 뭔가 ‘와’ 소리가 나오는 연기를 보면 다들 얼굴에서부터 즐기고 타는 게 보이더라고요.
문: 즐기면서 타는 게 최고의 연기를 만든다는 거군요. 먼 훗날, 시니어 1년 차의 허지유는 어떤 선수일까요? 또, 어떤 선수로 기억되고 싶나요?
지유: ‘즐기는 선수’요. 또 완벽하진 않더라도, 최대한 노력해서 항상 아주 조금이라도 발전하는 선수, 그리고 무엇보다 피겨를 온전히 즐기는 선수로 기억되고 싶어요. 피겨는 제 인생의 절반을 쏟아부은,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니까요.
아부다비 대회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허지유는 이제 더 높은 곳을 바라본다. 이번 시즌에는 안될 지도 모르지만 2026년 주니어 세계선수권 출전이라는 구체적인 목표를 갖고 연습하고 있다. 목표가 있어야 더 힘내서 달릴 수 있다며 전의를 다지고 있다.
순수한 열정으로 시작해, 이제는 단단한 목표와 루틴으로 자신을 채워가는 허지유. 콘크리트 같은 차가운 빙판 위에서 그녀가 피워낼 꽃은 어떤 색깔일지, 그녀의 ‘Sentimental Journey(감성적인 여정)’이 이제 막 시작되었다.
기획 김현진 박지민 이민정
인터뷰 진행 김현진
촬영 및 사진 편집 박지민 김현진
영상 편집 이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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