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모차르트는 열이 나는 도중에도 귀족의 살롱에서 귀족들에게 둘러싸여 피아노 연주를 선보인다. 그의 아버지는 귀족들에게 후원금을 부탁한다. 뮤지컬 ‘모차르트’의 한 장면이다. 그로부터 수십 년 뒤, 한 음악가는 자신의 연주를 듣는 대신 항간의 소문을 쑥덕거리는 귀족들에게 비난을 퍼붓고 돌아선다. “왕족은 많지만, 이 세상에 베토벤은 나 하나뿐.”이라면서. 뮤지컬 ‘베토벤’의 한 장면이다.
귀족들 전유물이었던 ‘음악’을 대중들의 ‘음악’으로 만든 악성樂聖 베토벤. 그는 살롱의 배경음악에서 벗어나 ‘음악’만을 중심으로 한 연주회를 개최하고 악보 출판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여 음악의 대중화를 실현했다. 그의 사랑과 인생에 대해 다룬 뮤지컬 ‘베토벤’이 지난 1월 12일 예술의 전당 오페라 하우스에서 개막했다.
‘모차르트’를 시작으로 ‘엘리자벳’, ‘레베카’, ‘마리 앙투와네트’까지, 한국이 사랑한 이 세계적인 뮤지컬은 유럽을 대표하는 두 거장 미하엘 쿤체와 실베스타 르베이의 작품이다. 뮤지컬 ‘베토벤’은 두 사람의 새 합작으로 제작 전부터 많은 기대를 모은 대작이다. 해외 팬들은 왜 이런 대작을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지 불만 섞인 투정을 부릴 정도로 국내외의 많은 관심을 받았다.
박효신과 옥주현을 필두로 한 스타 출연진, 그리고 앞서 열거한 유럽 뮤지컬들을 한국에서 흥행시킨 주역이자, ‘웃는남자’와 ‘마타하리’ 등 굵직한 대형 창작 뮤지컬을 만들어낸 제작사 EMK뮤지컬컴퍼니의 이름은 사람들의 기대를 더욱 뜨겁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뮤지컬 ‘베토벤’의 첫 번째 성적표는 무난한 것 같다. 2주 만에 3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뮤지컬 ‘베토벤’은 순조롭게 순항 중이다. 그렇다면 관객들의 평가는 어떨까? 무난한 성적표와 달리 관객들의 평가는 나뉘고 있는 듯하다. 기대가 큰 만큼 아쉬움도 큰 것일까. 궁금증과 감출 수 없는 기대감을 가지고 뮤지컬 ‘베토벤’을 보고 왔다.
화려한 세트와 실력파 앙상블들의 조화
대극장 뮤지컬을 생각하면 관객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같은 화려한 세트와 무대를 채우는 앙상블일 것이다. 그리고 EMK뮤지컬컴퍼니(이하 EMK)는 이런 대극장 뮤지컬을 제작하는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뮤지컬 제작사다. 뮤지컬 ‘몬테크리스토’를 필두로 한, EMK 작품들은 대부분 화려한 드레스와 웅장한 세트가 등장하는 유럽을 배경으로 한다. 그리고 EMK의 무대 미술은 2018년 초연한 창작뮤지컬 ‘웃는남자’에서 정점을 찍었다. 당시 15만 원이라는 비싼 티켓가격에 볼멘소리가 나왔지만, 그 불만들이 쏙 들어갈 만큼 화려한 세트와 연출에 몇몇 관객들은 ‘내가 지금까지 EMK 작품에 소비한 모든 돈이 이 무대로 완성됐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번 뮤지컬 ‘베토벤’ 역시 제작사의 장점을 십분 활용하고 있다. 뮤지컬 ‘오션스’의 쇼케이스 처럼 움직이는 벽이 되는 LED 대도구와 독일과 체코의 아름다운 풍경을 그리는 대형 LED는 극적인 효과를 더한다.
특히 1막과 2막 사이, 무대의 전환 장면은 관객에게 큰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뮤지컬은 1막 내내 무대의 3분의 2만 활용해 LED 벽으로 막힌 ‘방’ 안에서 자신의 절망과 고뇌에 빠져 있는 베토벤의 현실을 표현한다. 그리고 베토벤이 토니에 대한 사랑과 자신의 변화를 받아들였을 때, 그 벽이 한순간에 사라지며 모든 제한을 벗어난다. 베토벤의 마음의 변화가 무대 위에서 오롯이 표현된 것이다. 이때의 무대 전환은 압도적인 스케일을 자랑한다.
이런 뛰어난 무대의 완성에는 오필영 무대/영상 디렉터의 역할이 크다. 뮤지컬 ‘데스노트’의 혁신적인 무대로 올해 한국뮤지컬어워즈에서 무대예술상을 받은 오필영 디렉터는 이번에도 자신의 장점을 가감 없이 선보이며 베토벤의 세계를 덧그렸다. 그는 LED를 전면적으로 활용하며 무대에 깊이를 더했다. 거기에 베토벤과 토니가 재회하는 프라하의 카를 대교는 실물과 비슷한 사이즈의 대도구를 사용해, 마치 체코 프라하에서 그들을 직접 목격하고 있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토니와 베토벤이 휴양지에서 만나는 장면에서 등장하는 대형 사이프러스 나무들은 옥에 티라면 옥에 티. 유럽의 아름다운 가로수길이라기엔 그 수가 너무 적다. 차라리 스크린과 조명을 활용하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실력파 앙상블들을 기용하기로 유명한 EMK의 앙상블 캐스팅 능력은 이번에도 빛을 발했다. 오만한 귀족들부터 베토벤에 대해 수군거리는 서민들까지. 쉴 틈 없이 변화하며 무대를 꽉 채우는 앙상블들은 노래와 안무 모두 훌륭히 소화해 베토벤의 무대를 한층 빛냈다.
베토벤 최고의 미스터리, ‘불멸의 연인‘을 전면에 내세운 스토리
만고불변. 가장 인기 있는 이야기는 사랑 이야기일 것이다. 그것도 괴팍하기로 유명했던 그 베토벤이 평생에 걸쳐 그리워했던 연인이라니 모두가 흥미로울 만하다.
무려 ‘불멸의 연인’이라고 이름 붙여진 미지의 여인은 베토벤 사후 편지 속에서 발견되었다. 이 ‘불멸의 연인’은 베토벤이 남긴 최대의 미스터리로 꾸준히 연구됨은 물론 지금까지도 다양한 매체에서 회자되고 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당연 게리 올드만 주연의 영화 ‘불멸의 연인’. 영화 속 불멸의 연인이 베토벤과 평생의 앙숙이었던 제수 요한나였던 뜨악한 결론을 생각하면(이번 뮤지컬 내에서도 베토벤과 요한나의 사이는 썩 좋지 않다. 당연하지만.) 예술을 사랑하며 베토벤을 지지했던 안토니 브렌타노를 불멸의 연인이라 가정한 뮤지컬 ‘베토벤’ 쪽이 고개가 끄덕여진다. 실제로 그녀는 베토벤의 불멸의 연인 후보 중 가장 유력한 사람이다.
그만큼 뮤지컬은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어 진행된다.
오만하고 무례한 귀족들 사이에서 처음으로 자신을 옹호해준 아름다운 귀부인의 상냥함에 호감을 느끼는 베토벤. 그 동요는 동생 카스파가 요한나를 처음으로 소개하는 다음 장면의 앞부분에서도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다. 카이 특유의 부드러움이 그런 베토벤의 변화를 수긍하게 만든다. 공작의 연회에도 넥타이를 매지 않던 그가 토니를 만나러 가는 장면에서 넥타이를 매고 있다. 토니를 향해 기우는 베토벤의 마음이 보이는 것 같아 미소가 지어지는 장면이다.
조정은은 그런 토니를 기품 넘치면서도 격정적으로 표현했다. 맑지만 힘 있는 노래와, ‘선녀’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우아한 그녀의 연기는 토니를 무대 위에서 살아 숨 쉬게 만들고, 관객들이 그녀의 사랑을 쫓아 가게 만든다. 예술을 사랑했던 귀부인 토니는 정략결혼 이후 아름다운 그림처럼 완벽하지만 자유와 사랑이 없는 인생에 지쳐간다. 그녀가 자신의 앞에 나타난 거친 예술가 베토벤에게 빠진 것은 그런 반향일지도 모른다. 두 사람은 운명적인 재회를 거듭하며 사랑에 빠진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에 아쉬움이 남는 것은, 뮤지컬 ‘베토벤’이라는 타이틀 때문일지도 모른다. 쿤체-르베이 콤비의 ‘모차르트’를 떠오르면 더 그럴 수밖에 없다. 한없이 가벼워 보이지만 사실은 누구보다도 음악에 대한 강한 열정과 재능을 가진 ‘모차르트’와 그의 일생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준 뮤지컬 ‘모차르트’와 달리 뮤지컬 ‘베토벤’은 그의 ‘음악’과 ‘일생’에 대해서는 극히 제한적으로 보여준다.
제작진이 메인으로 보여주고자 한 것은 베토벤의 ‘사랑’. 그러다 보니 결론에 다다라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것이다.
토니와 카스파가 베토벤의 사랑을 상징하는 존재라면, 베토벤의 음악을 상징하는 존재는 ‘음악의 혼령’ 들이다. 1막과 2막, ‘음악의 혼령’들이 나와 베토벤이 작곡에만 몰두하도록 이끄는 장면들은 기괴하면서도 세련되었지만, 뮤지컬 ‘모차르트’의 ‘아마데’ 처럼 강렬하진 않다. ‘아마데’와 ‘모차르트’의 관계처럼 ‘음악의 혼령’과 ‘베토벤’의 관계가 설득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고난도의 안무를 완벽하게 소화하는 ‘음악의 혼령’을 연기한 배우들의 열연은 훌륭했지만, 이 ‘음악의 혼령’들이 진정한 사랑을 만나 돌진하는 베토벤을 붙잡아 이끌 만한 힘이 있는지는 의구심이 든다.
베토벤은 음악과 사랑 중에 결정을 내렸지만, 창작진은 베토벤의 음악과 사랑 중에 뚜렷한 결정을 내리지 못한 모습이다.
베토벤 종합선물 세트? 베토벤의 음악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넘버들
혹시 클래식은 저작권 문제가 없어서 이렇게까지 활용한 걸까? 잠깐이나마 그런 불손(?)한 생각이 들 정도로 뮤지컬 ‘베토벤’의 넘버들은 베토벤의 악곡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한국인에게 익숙한 ‘비창’과 ‘월광 소나타’ ,’엘리제를 위하여’를 비롯해 소나타와 교향곡까지 모두, 베토벤의 음악은 뮤지컬 넘버로 화려하게 변신했다. 베토벤의 악곡이 쓰이지 않은 넘버가 없을 정도이다.
익숙한 리듬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머릿속을 맴돌고 있는 베토벤의 음악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살아 날뛰는 느낌이었다. 다만 연주곡들을 무리하게 가창 곡으로 변주한 것에서는 어쩔 수 없는 아쉬움이 남았다. 특히 피아노 협주곡 5번을 활용한 토니의 메인 넘버 “괜찮아 난”은 관객이 그녀의 감정에 공감하기에는 클라이맥스가 없어 주춤거리게 만든다. 토니의 시누이인 베티나가 부르는, 엘리제를 위하여를 활용한 ‘비밀의 정원’은 박자가 너무 빨라 노래하는 배우가 걱정될 정도였다.
물론 감탄을 자아내게 만드는 넘버들도 많다. 1막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하는 ‘가버려!’와 ‘너의 운명’, 월광 소나타를 활용한 2막의 토니 솔로곡 ‘매직 문’이 그렇다. 그러나 공연이 끝난 뒤 흥얼거리는 넘버들이 뮤지컬 ‘베토벤’의 넘버인지, ‘베토벤’의 연주곡인지는 잘 모르겠다.
한때 평점이 5점까지 떨어졌던 뮤지컬 ‘베토벤’의 평점은 다시 7점으로 올랐다. SNS를 중심으로 한 관객들의 평가도 서서히 좋아지고 있다. 무난하다. 하지만 무난하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큰 호응을 받고 있지 못하다는 방증이지 않을까.
제작사 EMK는 대형 뮤지컬을 만드는 제작사들 가운데서도 대형 창작뮤지컬을 만드는 것에 가장 공을 들이는 제작사이다. 그런 EMK가 한국 뮤지컬계에 끼치는 영향이나 공로는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관객들의 기대도 높아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그’ 쿤체와 르베이 콤비가 아닌가.
첫 성적표는 다소 아쉽지만, 이제는 관객들의 평가를 겸허히 받아들일 때이다. 세상에서 가장 날카로우면서도 정확한 성적표는 바로 대중, 관객들의 평가다. 월드 프리미어 뮤지컬 ‘베토벤’이 날개를 달아 세계로 뻗어나가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과정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