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증된 성공은 가장 든든한 자산인 동시에, 무거운 짐이 된다. 이미 성공한 콘텐츠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창작은 기존의 강점을 활용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지만, 동시에 전작이 세운 기준과 대중의 기대를 넘어야 한다는 부담을 안게 된다.
하지만 이 위험을 정면으로 돌파한 작품이 있다. 글로벌 조회수 143억 회를 달성한 웹소설 ‘나 혼자만 레벨업’을 원작으로 한 아이스쇼, ‘나 혼자만 레벨업 on ICE’다.
지난 8월 7일 목동실내빙상장에서 막을 올린 ‘나 혼자만 레벨업 on ICE’가 회를 거듭할수록 재관람 행렬을 이어가고 있다. 특정 예매 사이트에서는 개막 직후 예매 순위 5위까지 오르는 등 심상치 않은 반응을 얻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대한민국 피겨스케이팅의 간판, 차준환이 있다.
어린 시절 아역배우로 활동하며 연기에 도움을 얻기 위해 시작했다는 피겨스케이팅. 배우를 꿈꾸던 소년은 어느새 세계적인 스케이터로 성장했고, 이제 다시 연기와 만난 피겨스케이팅으로 무대 위에 섰다. 지금까지 차준환이 걸어온 궤적이 마치 하나의 무대 위에서 응집된 듯한 이번 공연은, 그 자체로 흥미로운 결과물이었다.




강렬한 일렉트릭 바이올린 선율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차준환은 그림자 군주가 된 ‘성진우’로 분해 화려한 코레오로 빙판을 수놓는다. 세계 무대에서도 뛰어난 표현력으로 정평이 난 선수답게, 빠른 속도로 빙판을 가르는 동시에 부드러운 스케이팅과 눈부신 스텝을 선보이며 ‘그림자 군주’ 성진우의 압도적인 힘을 관객에게 단숨에 납득시킨다.
뒤이어 ‘인류 최약병기’라 불리는 E급 헌터 시절의 성진우로 돌아온 차준환은 방금 전 그림자 군주의 강렬한 모습이 잊힐 만큼 유약하고 위태로운 인물로 돌변한다.
이중던전의 시련과 사람들의 배신 속에서 절망하고, 죽음의 문턱에서 만난 ‘시스템’을 통해 ‘플레이어’로 거듭나는 성진우. 차준환은 그 과정에서 변화하는 성진우의 내면을 밀도 있게 그려내는 동시에, 캐릭터의 성장에 맞춰 스케이팅의 속도와 액션에도 점차 힘을 더한다. 마치 게임 속 캐릭터가 레벨을 올리듯 공연이 진행될수록 움직임 자체가 ‘레벨업’하면서, 관객은 성진우가 눈앞에서 실제로 성장하고 있다는 감각을 자연스럽게 공유하게 된다.
특히 기대를 뛰어넘는 연기와 가창은 이미 탄탄한 세계관과 두터운 팬층을 보유한 거대 IP ‘나 혼자만 레벨업’ 속에 차준환만의 ‘성진우’를 이질감 없이 녹여내기에 충분했다.





뮤지컬과 아이스쇼의 아슬아슬한 줄다리기 속에서, 지난 시즌에는 가수와 배우가 주인공 ‘성진우’를 연기했다면 이번 시즌에는 차준환이 합류하며 완전히 다른 무대가 완성됐다. 연기와 가창은 물론 세계 정상급의 피겨스케이팅 퍼포먼스까지 한 무대에서 펼쳐진다. 여기에 차준환은 안무에도 직접 참여하며 공연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데 힘을 보탰다.
지난 시즌 관객들을 사로잡았던 아크로바틱 무대가 대거 빠진 자리에는 차준환이 함께 고안한 강렬한 군무가 들어섰다. 스케이팅 특유의 속도감을 살린 액션과 눈을 뗄 수 없는 피겨 퍼포먼스가 맞물리며 이전 시즌과는 또 다른 몰입감과 짜릿함을 선사한다.
물론 이 공연을 이끌어가는 것은 차준환뿐만이 아니다. 이시형, 김예림, 경재석 등 국가대표로 활약했던 피겨스케이터들이 대거 출연해 함께 호흡을 맞추며 무대의 수준을 ‘레벨업’시켰다.





세계적인 수준의 스케이터들이 소설 속 S급 헌터로 변신해 트리플 점프를 뛰고 빠른 속도로 빙판을 가르는 순간에는 초월적인 능력을 지닌 S급 헌터들이 눈앞에 나타난 듯한 착각마저 든다.
그중에서도 차준환과 함께 베이징 올림픽에 출전하며 국가대표 남자 싱글의 맏형으로 활약했던 이시형의 존재감이 돋보인다. ‘핏빛의 이그리트’로 분한 그는 온몸을 감싸는 갑옷과 투구를 착용하고 거대한 칼까지 든 채 차준환에게 밀리지 않는 강렬한 퍼포먼스를 펼친다. 공연 사이사이 다른 헌터로 모습을 바꾸는 그를 찾아보는 것도 또 하나의 재미다.
베이징 올림피언이자 세계선수권 동메달리스트인 김예림은 한국 유일의 여성 S급 헌터 ‘차해인’으로 분해 등장과 동시에 무대를 압도한다. 차준환이 새롭게 고안한 그녀의 검무는 ‘무희’라는 별명을 지닌 차해인의 이미지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절제된 움직임 사이로 드러나는 특유의 우아함은 마치 소설 속 차해인이 그대로 빙판 위에 나타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2막 초반, 헌터들과 전투를 지휘하며 펼치는 에어리얼 실크 연기도 백미다. 붉은 실크에 몸을 맡긴 채 빙판 위로 날아오르는 모습에서는 치열한 전투 속에서도 시민들을 구하고자 하는 차해인의 비장함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스케이터들이 화려한 움직임으로 시선을 사로잡는다면, 이야기에 힘을 불어넣는 것은 배우들이다. 전문 스케이터들의 속도에 뒤처지지 않는 준수한 스케이팅을 보여주면서도 캐릭터와 서사를 전달하는 본연의 역할을 놓치지 않는다.
‘킹키부츠’ 등 다양한 뮤지컬에서 활약해온 신석수는 ‘유진호’로 분해 내레이터로서 관객들을 ‘나 혼자만 레벨업’의 세계로 이끈다. 이야기를 이끌 때는 무게감을 더하고, 유진호로 돌아오면 감초 역할을 맡아 무대의 긴장을 유쾌하게 환기한다. 2막부터는 걸그룹 ‘다이아’ 출신 권채원이 연기하는 ‘성진아’와 함께 뛰어난 가창력과 전달력으로 성진우의 변화를 관객에게 전달한다.
이번 공연으로 데뷔한 에이미는 뜻밖의 발견이다. 성진우를 지켜보는 B급 힐러 ‘이주희’를 맡은 에이미는 수백만 팔로워를 지닌 화려한 인플루언서라는 본래의 모습을 잊게 할 만큼 캐릭터에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15세까지 피겨 선수로 활동했다는 이력답게 스핀과 스파이럴 등 난도 높은 피겨 안무도 안정적으로 소화하며 공연의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한다.



스케이팅과 안무만으로 미처 표현해내지 못한 판타지 소설의 세계관은 초대형 LED 화면을 통해 자연스럽게 녹여낸다. 이중던전의 마수는 물론 성진우에게만 보이는 ‘시스템 창’까지 무대 위에 자연스럽게 구현했다. 특히 출연자의 모습을 대형 LED에 실시간으로 송출하고 그 위에 시스템 인터페이스를 겹쳐 보여주는 연출은 마치 관객이 성진우의 시야를 함께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제작사 라이브 아레나가 ‘G-Show’ 시리즈를 제작하며 축적해온 무대 연출의 노하우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나 혼자만 레벨업’이라는 거대한 글로벌 IP를 사용하면서도 원작에 지나치게 의존하거나 욕심내지 않은 각색과 연출 역시 탁월하다. 방대한 원작 가운데 성진우가 ‘그림자 군주’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을 영리하게 취해 주요 장면을 충실히 보여주면서도, 하나의 공연으로서 깔끔하게 완결될 수 있도록 균형을 잡았다.
강렬한 록 사운드를 기반으로 한 음악 역시 공연의 격을 끌어올리는 중요한 요소다. 특히 결정적인 순간마다 모습을 드러내는 ‘설계자’의 일렉트릭 바이올린 연주는 공연장의 공기를 순식간에 뒤바꾼다.


그러나 이번 시즌에서 무엇보다 새롭게 다가온 것은 괴수 ‘카사카’를 비롯한 스케이터들의 싱크로나이즈드 안무다.(싱크로나이즈드 스케이팅은 최대 16명의 스케이터가 함께 단체 연기를 펼치는 피겨스케이팅 종목으로, 2030 알프스 동계올림픽부터 9명의 스케이터가 한 팀을 이루는 새로운 경기 방식인 ‘Synchro9’이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다.)
‘카사카’와 ‘케르베로스’ 등 성진우를 위협하는 던전의 보스들을 깃발과 부채 등의 소품을 활용해 표현하는 장면에서 스케이터들은 마치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가 된 것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여러 명의 스케이터가 각자의 움직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움직임이 모여 하나의 몬스터를 만들어낸다.
지난 시즌보다 훨씬 본격적으로 도입된 싱크로나이즈드 안무는 얼핏 단순해 보이지만 참여하는 스케이터들의 기본적인 기량과 정확한 호흡 없이는 만들어낼 수 없는 장면이다. 개인의 점프와 스핀에 시선이 집중되기 쉬운 피겨스케이팅을 ‘집단의 움직임’으로 확장하면서, 원작 속 거대한 몬스터를 얼음 위에서 구현하는 효과적인 무대 언어가 됐다.
그리고 어쩌면 이 장면이야말로 이번 공연이 보여주는 가장 인상적인 성취일지도 모른다.



한때 ‘피겨 불모지’라 불렸던 대한민국에서 이제는 세계 정상급의 남녀 싱글 스케이터들이 한 무대에 서고, 그 뒤를 받치는 수많은 스케이터가 높은 수준의 군무를 완성한다. 몇몇 스타 선수의 존재만으로는 결코 만들어낼 수 없는 장면이다.
빙판 위에서 하나의 거대한 몬스터가 완성되는 순간, 그곳에는 지난 수십 년간 한국 피겨스케이팅이 차곡차곡 쌓아 올린 시간과 성장이 함께 겹쳐 보인다. 그리고 그 성장은 이제 개인의 성취를 넘어, 수많은 스케이터가 함께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무대의 가능성으로 이어지고 있다.
‘나 혼자만 레벨업’이라는 검증된 IP에서 출발했지만, 이번 무대를 완성한 것은 결국 그 위에 새로운 가능성을 더한 사람들의 힘이었다. 원작의 성공을 재현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피겨스케이팅이라는 새로운 언어로 다시 만들어낸 ‘나 혼자만 레벨업 on ICE’. 어쩌면 이번 공연에서 가장 인상적인 ‘레벨업’은 성진우가 아니라, 한 단계 더 진화한 공연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한편, ‘나 혼자만 레벨업 on ICE’는 오는 17일까지 목동실내빙상장에서 공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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