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벼락에도 멍들지 않은 허공과 같다.”
화엄경에 있는 이 구절처럼 피겨스케이팅 국가대표 김예림을 잘 설명하는 문구가 있을까?
김연아 키즈 세대로서 트로이카 3인방으로 불리었던 어린 소녀에서, 국가대표 9년 차 맏언니까지. 한결같은 꾸준함으로 늘 그 자리에서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온 김예림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주어진 상황을 인정하고 눈앞의 목표에 몰입하는 집중력은 어린 시절부터 그녀의 성장 원동력이었다.
2010년 밴쿠버 올림픽, 김연아의 독보적인 활약상을 보고 피겨스케이팅이라는 종목에 관심이 생긴 김예림은, 그녀를 동경하는 마음에 처음 빙상장을 찾았다.
“안양 종합운동장에서 피겨스케이팅을 처음 시작했어요. 그 당시에 집이 군포였는데, 검색했을 때 안양이랑 과천 두 군데가 나오더라고요. 집에서 교통편이 안양이 더 좋았던 걸로 기억해요.”
놀러 다니듯 빙상장을 오가던 그녀는 방학 특강을 시작으로 자연스럽게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피겨스케이팅을 시작한 지 5년 만에 김예림은 합산 점수 2위이자 기술 점수 1위로 처음 국가대표로 발탁된다. 초등학교 5학년이던 어린 김예림은, ‘처음에는 국가대표의 무게를 잘 몰라 실감할 수 없었다’고.
“너무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지금처럼 국가대표의 큰 의미를 잘 몰랐던 것 같아요. 그냥 랭킹 대회랑 종합선수권이라는 대회를 나가야 하니까 준비했고, 내가 해야 할 일을 했고, 그랬더니 국가대표라고 하고. 그랬던 것 같아요.”
주니어 그랑프리 선발전 1위라는 좋은 기록과 아시안 트로피 은메달이라는 좋은 성적으로 시작한 첫 주니어 시즌 (2016-2017). 김예림은 주니어 그랑프리 대회의 자잘한 실수들로 인해 아쉽게 포디움에 오르지는 못했다. 주변 선수들이 국제 대회와 기술 요소에서 많은 성과들을 보였던 시기였다. 이런 또래들의 행보에 불안하거나 답답할 수도 있었지만, 그녀는 꾸준히 자신에게만 집중했다.
“돌이켜서 생각해보면 저는 항상 저 자신에게 포커스가 있었었던 것 같아요. 성향적으로 그런 면이 좀 커서, 어렸을 때도 ‘다른 선수들이 얼마만큼 하는지’ 보다 ‘제가 준비한 걸 얼마만큼 잘했는지’, 혹은 ‘내가 준비를 얼마만큼 잘 하고 있는지’에 집중했어요. 다른 선수가 잘 돼서 생기는 답답함보다는 내가 잘 안되거나 혹은 준비했던 걸 못 보여줬을 때 답답했던 것 같아요.”
자신을 향한 끝없는 성찰로, 김예림은 또 눈부시게 성장한다. 2016-2017시즌 후반부에 들어 점프 테크닉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 많은 관계자들이 ‘감각의 종목’이라고 불리는 피겨스케이팅 특성상, 6년 간 몸에 익은 감각을 바꾸기란 쉽지 않은 과정이었을 터. 하지만 14살의 김예림은 자신의 의지로, 묵묵히 성장했다.
“지금 성공률이 잘 나오는 것도 좋지만 미래를 생각해서 스케일이나 자세 부분을 개선해야 한다는 엄마의 조언을 들었어요. 그런 말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것들을 해내려고 노력했어요.”
그런 그녀의 노력은 종합선수권 2위와 주니어 세계 선수권 출전권 획득으로 보상 받았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주니어 세계 선수권 출전을 10일 앞두고 입은 발가락 골절로 인해 챔피언십 데뷔가 무산된다.
“그때 컨디션이 정말 좋았어요. 그런데 지상 훈련을 하다가 미끄러운 데를 잘못 디뎌 골절됐었던 걸로 기억해요. 너무 순식간에, 또 너무 허무하게 다치면서 내가 열심히 이뤘던 게 무산되어 버리니까 처음에는 안 믿겼던 것 같아요.”라고 김예림은 당시를 회상했다. 김예림의 첫 번째 시련은 그렇게 예상하지 못한 시기에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다가와 기회를 앗아갔다.
“그냥… 이런 상황이 너무 허무하게 느껴졌어요. 그렇지만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잖아요. 그러니까 그냥 받아들였던 것 같아요.”
담담하게 전하는 김예림의 이야기와 달리, 그 부상은 다음 시즌까지 그녀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아무래도 뼈가 부러졌으니, 회복이 오래 걸리더라고요. 뼈 같은 경우는 기본 6주를 깁스해야 해요. 다른 부위면 어느 정도 움직이면서 재활 운동을 할 수 있었을 텐데, 발가락이기도 했고요. 일상생활에서도 다친 부위를 아예 쓰질 못하니 근육이 빠지고 운동 감각이 완전히 사라졌어요.”
골절로 인해 발생한 긴 회복 기간은 그녀에게 많은 변화를 야기했다.
“그리고 훈련을 할 수 없으니,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생활을 하게 된 거예요. 덕분에 그사이에 키가 너무 커서, 한 번에 너무 많은 변화가 생겼어요. 다시 훈련으로 돌아왔을 때. 감각이 완전히 달라졌죠. 분명히 전과 똑같은 타이밍, 똑같은 자세로 (점프 시도를) 했는데 잘 안되니까 너무너무 답답하고 막막했던 것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보다 더한 꾸준함과 성실함으로 그녀는 다시 이전의 페이스를 되찾는다. 김예림은 주니어 선발전 1위로 두 번째 주니어 그랑프리 시즌을 시작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기대 속에 출전한 첫 국제 대회부터 아쉬운 평가를 받게 된다. 이때 어릴 적부터 가진 그녀의 기질이 빛을 발한다. ‘주어진 상황을 인정하고, 차근차근 문제를 해결하는 집중력’이다. 힘든 상황에서도 돌파구를 찾았고, 프로그램 구성 점수를 높이기 위해 결단을 내렸다.
“주니어 선발전에서 높은 점수로 1등을 하고, 많은 기대를 받고 주니어 그랑프리 나갔는데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성적을 받았어요. 저도 저지만, 부모님도 많이 속상해하셨죠. 하지만 ‘시즌이 초반이니까 후반까지 어떻게 잘 끌고 나갈까’에 집중했어요. 그래서 2주 만에 새로 프로그램을 짜고 익혀서 대회에 나갔어요. 당시 프로그램의 쇼트, 프리가 모두 빠른 음악이었거든요. 프로그램의 호불호가 갈릴 수 있을 것 같았고, 긴장된 상황에서 두 개의 빠른 템포 음악을 모두 소화하기가 힘들겠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그래서 프로그램을 변경하게 되었죠.”라고 대답한 김예림은 “어린 나이이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라며 “지금이라면 어떻게든 원래 것을 살렸을 거 같다”라고 덧붙이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2주 만에 프로그램을 완전히 변경한 그녀의 판단은 옳았다. 뒤이어 열린 주니어 그랑프리 7차 대회에서 개인 최고점을 갱신했고, 시즌 후반부의 랭킹 대회에서 은메달을 획득했다.
2018-2019시즌. 김예림은 마지막 선수 생활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시즌에 임했다. 그리고 차근차근 긴 시간 동안 쌓아온 것들이 드디어 결실을 보는 계절이 되었다.
“계속해서 시합 때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결과가 나오니까, 부모님이 아닌 다른 가족분들이나 주변 분들이 전과 (시선이) 달라지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서 마지막 선수 생활이 될 수 있다는 마음으로 임했던 것 같아요.”
김예림은 큰 다짐을 안고 훈련지를 국내에서 해외로 옮겼다. 미국 콜로라도 스프링스의 탐 자크라섹 코치와 함께 새로운 시즌을 준비한다. 러시아 바람이 유달리 거셌던 이 시즌, 주니어 그랑프리 시리즈 2개 대회에서 은메달을 획득했다. 3차 대회 프리 스케이팅에서 받은 가산점은 당시 주니어 세계 신기록이기도 했다. 또한 상위 6명의 선수만 참여할 수 있는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에 진출한다. 이 대회에서 김예림은 유일하게 러시아인이 아닌 선수였으며, 김연아 이후 이 대회를 출전한 첫 번째 한국 여자 싱글 스케이터였다.
“주니어 그랑프리 3차 대회 쇼트에서 잔 실수가 있었어요. 스스로 속상했던 기억이 나요. 쇼트 끝난 그 밤이 되게 힘들었어요. ‘나는 정말 안 되나?’ 싶었어요. 시합에 나가서 제가 연습했던 걸 다 보여주지 못하고 스스로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게 계속 반복되니까 조금 많이 좌절감을 느꼈죠.”라며 김예림은 대회를 회상했다.
“프리 날 ‘그냥 모르겠다’라고 생각하며 연습한 대로 그냥 해보자 하고 마음을 가볍게 먹고 들어갔어요. 그런데 생각보다 잘 풀렸고 기대한 것 이상의 점수가 나와서 너무너무 놀랐어요.”
주니어에서만 결과가 나온 것이 아니었다. 시니어 대회인 U.S. 인터네셔널 클래식에서도 메달을 획득했다. 해당 시즌 김예림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주니어와 시니어 오가며 한꺼번에 성과를 올렸다.
“한국에서 정말 힘들고 고된 훈련을 하면서 쌓아 놓은 기초가 미국 코치님들의 디테일한 터치와 시너지 효과를 이룬 게 아닐지 하는 생각이 들어요.”라고 동력을 설명했다. 하지만 결국 그 모든 근본에는 그녀의 꾸준함과 성실함이 있었다.
김예림 본인도 그 시기를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훈련했던 시즌”으로 평가했다. 어린 나이임에도, 해외까지 나가서 훈련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신 부모님에게 책임감을 느꼈다. 스스로 열심히 하지 않거나 조금이라도 게을러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고. 마음처럼 따라주지 않는 스케이트와 몸은, 발꿈치 염증으로 뼈에 변형을 일으켜 다음 시즌까지 이어졌다. 첫 시니어 챔피언십이었던 4대륙 선수권은 무사히 마무리했지만, 세계 선수권은 다시 내년을 기약해야 했다.
2019-2020시즌. 고등학생이 된 김예림은 체형이 변하면서 바뀐 몸 상태로 마음고생을 겪는다. 여름에 다른 때와 똑같이 준비했지만, 이전과 다르게 몸의 적응이 늦어졌다. 기대했던 시니어 그랑프리 배정 역시 당혹스러운 결과가 이어졌다. 직전 시즌 우수한 성적을 올린 선수에게 두 개의 시니어 그랑프리를 초청하는 관습에도 불구하고, 김예림은 스케이트 캐나다 대회에만 초청받았다. 공석이 연이어 발생했지만, 그녀는 출전할 수 없었다.
“추가 배정에 대해서는 좀 많이 당황스럽긴 했었는데, 그전에 힘든 일을 많이 겪어서 많이 힘들지는 않았어요. 그 직후에 랭킹대회가 있으니까 ‘랭킹을 잘 준비하라는 뜻인가 보다’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준비했어요.”
관계자와 팬들이 모두 당혹스러워하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또 자신만의 길을 묵묵히 준비했다. 당장에 있는 어려움에 힘들어하기보다는 이다음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그녀는 늘 고민하고 노력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노력은 응답받았다. 12월 김해에서 열린 랭킹대회에서 김예림은 생애 첫 우승을 차지했다. 김해에서 치른 이 대회는 김예림의 피겨스케이팅 인생에 큰 터닝 포인트를 가져왔다.
“시합을 보통 수도권에서 하다가 처음으로 다른 지역에서 경기하게 됐어요. 그러다 보니까 연습이나 훈련 외에 남는 시간이 조금 있더라고요. 주변도 잘 둘러보고 구경도 잘하고 좀 즐기면서 시합했었어요. 그전까지 항상 시합 기간에는 연습/시합 때가 아닌 그 외적인 시간도 대회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이 대회는 제 고정관념이 바뀌게 된 계기가 됐어요.”
묵묵히 목표를 향해 걷기만 했던 김예림에게 대회를 즐기는 마음가짐까지 생겼다. 꾸준한 실천력을 가진 사람에게 즐기는 마음가짐까지 더해졌을 때 그 시너지가 어떠할지는 모두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도 잠시, 불운은 늘 행복 뒤에 숨어있다가 예측하지 못한 때에 시련을 가져온다.
큰 깨달음을 얻은 랭킹대회가 끝나고 김예림은 종합선수권에 집중했다. 그때까지 정말 좋은 컨디션으로 대회를 준비할 수 있었다.
“컴비네이션 점프를 연습하다가 발목이 꺾였는데 못 걷겠는 거예요. 멘붕이 왔죠. 병원에 가보니 성장판 있는 복숭아뼈 근처에 피로 골절이 왔어요. 그나마 물렁뼈에 상처를 입었지만, 당장 종합선수권에 나가야 하는데 어떡하지 싶었어요.”
하지만 김예림은 어떻게든 종합선수권을 치러냈고 포디움에 올랐다. 그렇게 4대륙 선수권과 세계 선수권 출전권을 획득했다. 발가락 골절로 주니어 세계 선수권 출전권을 포기한 지 3년 만에 다시 세계 선수권에 출전하게 된 것이었다.
“이번 기회들을 정말 놓치고 싶지 않았어요. 끝까지 관리를 잘해야겠다고 생각했고, 매일매일 훈련할 때 정말 더 이상의 부상이 나오지 않게 집중해서 스케이팅했어요.”
2020년 4대륙 선수권은 3년 만에 한국에서 열리는 큰 피겨스케이팅 국제대회였다. 3년 만에 획득한 세계 선수권 티켓도 소중했지만, 한국에서 열리는 국제 대회도 중요했다. 그렇게 김예림은 4대륙 선수권에 출전했지만, 대회 직전 마지막 공식 연습에서 사람들은 김예림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목동 지하 연습 링크에서 컨디션이 조금 안 좋아지면서 다시 다리를 다쳤어요. 통증도 너무 심하고 세계 선수권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이번 시합에 무리하는 게 맞을까 싶은 생각이 들면서 정말 많은 고뇌를 했죠. 세계 선수권이 중요하지만, 한국에서 열리는 4대륙 선수권도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그냥 ‘일단 해보자, 열심히 준비했으니까 일단 한번 해보자’ 하고 경기했어요.”
다시 얻은 부상을 딛고 김예림은 완벽에 가까운 스케이팅을 선보이며, 처음으로 200점이 넘는 점수를 획득했다.
“너무 신기하게도 관중분들의 에너지나 응원해 주시는 마음이 뭔가 통하는 건지 진짜 너무 좋은 경기를 한 거예요. 그래서 좋은 결과를 또 얻었고 너무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어요.”
코로나가 처음으로 사람들의 지척까지 다가온 시기. 한국 선수들을 응원하는 마음 하나로 경기장에 모인 관객들의 마음이 전해져 김예림은 몸의 고난을 딛고 무사히 경기를 치러낼 수 있었다. 하지만 코로나의 위협은 시시각각 그 강도를 높여갔다.
각종 국제 대회에 참가하는 선수들이 어려움을 겪거나 각종 국제 행사와 대회들이 미뤄지거나 취소되기 시작했다. 도쿄올림픽을 준비하던 탁구 대표팀은 코로나로 인한 대회 개최국의 입국 금지 정책으로 인해 올림픽 출전권이 걸려있던 중요한 국제대회를 포기해야 했다. 유도 대표팀은 대회가 연달아 취소되며 올림픽 본선 진출에 대한 플랜을 새로 계획해야 했다.
“그때 나름대로 준비를 진짜 많이 했거든요. 코로나라는 생각지도 못한 재난이 갑자기 발생했고, 대처를 잘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당시 다른 종목에서 세계 선수권을 나가야 하는데 비행편이 없어져서 비행기를 못 타는 경우가 생겼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그런 일이 생기면 안 되니까 먼저 (세계 선수권이 열리는 캐나다에) 가 있기로 했어요.”
비행기 편이 연달아 축소되기 시작하면서 김예림은 세계 선수권이 열리는 캐나다 퀘벡으로 빠르게 출국했다. 공식 연습이 시작되기 일주일 전인 3월 9일, 캐나다에 도착한 그녀는 퀘벡대학 링크장을 빌려서 연습을 시작했다.
“캐나다에 도착해서 연습하고 있을 때는 ‘이제 별문제는 없을 거다’라고 생각했어요. 일단 내가 캐나다에 와 있으니까. 그런데 연습 링크를 관리해 주시는 분이 ‘너희 대회가 없어질 수도 있대’라는 얘기를 하시는 거예요. 처음에는 안 믿었죠. ‘시합이 없어진다는 게 말이 돼?’ 이러면서요. 그리고 제가 캐나다에 가 있을 때는 코로나 초창기였기 때문에 전이랑 다르게 느껴지는 게 거의 없었거든요. 그래서 전혀 믿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죠.”
3월 10일, 캐나다에서 코로나19로 인한 사망자가 처음 발생했다. 그리고 3월 11일, 캐나다 퀘벡 주 정부는 코로나 감염 확대를 이유로 피겨스케이팅 세계 선수권을 취소했다.
“소식을 들었을 때, 마트에서 장을 보고 나오는 길이었어요. 그냥 웃음 밖에 안 나왔어요. 너무 믿기지도 않고, 너무 황당한 일이니까. 처음에는 화도 안 나고 그 상황이 너무 웃긴 거예요.”라고 그때를 떠올리며 이야기하던 김예림은 다시 생각해도 그 상황이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그냥 다시 한국 가야지 그랬죠.”
하지만 그녀의 귀국길도 결코 쉽지 않았다. 원래 세계 선수권 후, 다음 시즌 프로그램을 만들 예정이었던 터라 이렇게 된 김에 새 프로그램이라도 받아 귀국하기로 한다. 하지만 그때부터 링크장이 하나둘 폐쇄되기 시작했다.
“프로그램을 받지도 못했고, 한국으로 돌아오려고 하니 비행기가 다 없어져서 돌아오는 것도 쉽지 않았어요. 돌아오는 길이 너무 힘들어서, ‘그냥 빨리 집에 갔으면 좋겠다.’라는 생각했던 것 같아요.”
간신히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시즌 중반에 얻은 피로 골절은 더 악화됐다. 1월 초에 다쳤을 때는 작은 스크래치였지만, 계속 다리를 쓰면서 3월 말이 되었을 때는 골절이 좀 더 벌어졌다. 벌어지기 시작한 균열은 뼈의 외곽을 타고 거의 한 바퀴를 돌 지경이었다.
코로나로 인해 어렵게 잡은 세계 선수권 출전의 기회가 날아갔다. 국내에 훈련할 수 있는 장소들은 시시각각 줄어들었다. 여러 가지로 마음을 잡기 힘든 상황이었지만 김예림은 재활에 바로 집중했다.
“성향상 항상 먼 미래보다는 닥친 일에 집중하는 편이어서 그때그때 해야 하는 일에 더 집중한 것 같아요.”
늘 그렇듯 김예림은 꾸준함으로 그 모든 어려움을 이겨냈다. 오히려 그녀는 코로나로 발생한 모든 상황을 기회로 이용했다.
“돌아오자마자 회복에만 집중했어요. (코로나로 인해) 링크장도 탈 곳이 많지 않은 상황이어서, 재활에 더 집중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 보면 저한테 시기가 잘 맞았던 것 같아요. 코로나로 인해 훈련할 때가 많지 않아지면서, 짧은 시간만 집중하면서 타는 상황이었어요. 회복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때 당시 저에게는 좋았던 것 같아요. 그리고 링크에서 못 타는 만큼 반대로 지상에서 재활이나 체력적인 부분의 훈련을 따로 많이 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김예림은 그 힘든 과정을 모두 딛고 온전히 일어섰다. 몸과 마음의 상처를 털어내고 스스로 회복했으며, 국내 대회를 연달아 우승하면서 세계 선수권 출전권을 다시 한번 스스로 쟁취했다. 코로나가 앗아가 버린 세계 선수권 출전 기회를 그녀의 힘으로 다시 찾았다.
“코로나로 인해 좋지 않은 연습 환경에서 제 성향적인 부분이 빛을 많이 발했던 것 같아요. 그냥 지금 눈앞에 있는 일, 내가 해야 하는 일에 집중하는 그런 성향이 그때 가장 많이 도움을 받지 않았나 싶어요.”
그리고 2021년 3월, 코로나라는 대재난 상황이 발생하고 처음 열린 국제대회이자 본인의 첫 세계 선수권에 출전하게 된다. 하지만 코로나 이후 열린 첫 대회는 이전과 참 많은 점이 달라졌다.
“좀 많이 어수선한 분위기가 있었어요. 이전에는 시합장에 갔을 때 바로 체크인하고 호텔에서 내일 컨디션을 위해서 조절하고 이랬다면, 이때는 줄 서서 매일 코로나 검사를 받는 등 이전에는 정말 생각지도 못한 그런 상황들이 벌어졌죠.”
대회의 운영뿐만 아니었다. 선수들의 분위기도 더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올림픽 출전권이 걸려있던 이 세계 선수권은 많은 선수가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밥을 먹거나 할 때 선수들이 모두 예민하게 느껴졌어요. 그런데 충분히 이해되는 상황이긴 했어요. 매일매일 검사를 했었는데, 그때도 확진자가 나오고 그러니까 더 무서운 거예요. (코로나에) 걸리면 시합도 못 나가지만 그 나라의 호텔에 감금되어 있어야 한다는 게… 다들 걱정을 많이 했죠.”
이해인과 함께 출전한 김예림은 11위를 기록하며, 한국 여자 선수들이 가지고 있던 출전권 2장을 지켜낸다.
2021-2022시즌. 김예림은 올림픽 출전 선수를 선발하는 2개의 국내 대회에서 모두 은메달을 획득하면서 자연스럽게 베이징 올림픽 출전권을 획득했다. 늘 꼿꼿한 모습으로 앞을 바라보던 김예림은 베이징 올림픽 출전권을 확정 지은 종합선수권에서 그동안 본 적 없던 눈물을 보였다.
“랭킹 무난히 넘기고 종합 때도 컨디션이 좋았어요. 종합선수권 공식 연습 때, 실수를 한 번도 안 할 정도로 정말 컨디션이 좋았었거든요. 그래서 이번 시합에 어느 정도 자신감이 있었는데, 쇼트 날 아침에 허리가 너무 아픈 거예요. 전에도 많은 부상이 있었고 그 부상을 이겨냈기에 ‘어떤 부상이 생겨도 어떻게든 해낼 수 있다’라는 마인드가 있었어요. 그런데 허리가 아프니까 정말 이건 내 의지와 상관없이 기본 생활도 힘든 거예요. 그래서 말 그대로 멘붕이 왔어요. 당장 오늘 시합을 해야 하고 내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시합일 수도 있는데 ‘어떻게 내 인생 이럴 수가 있지’ 싶었죠.”
단 한 번도 모든 것을 쉽게 쥐어본 적 없던 그녀의 역경은 그토록 꿈꿨던 베이징 올림픽 시즌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세 번째 다가온 큰 시련을 막막한 마음과 눈물로 받아들였다. 병원에 가서 “뭐라도 해주세요”라며 급하게 치료하고 치른 마지막 선발대회인 종합선수권. 꾸준했던 그녀의 노력은 그녀의 바람에 응답했다.
“준비를 잘해서 그랬는지 다행히 클린 경기를 해냈어요. 그냥 벅찼던 것 같아요. 그래서 처음으로 그렇게 시합이 끝나자마자 눈물이 났던 거 같아요.”
평창 올림픽을 직접 관람했던 꼬마 김예림은 ‘피겨스케이팅이라는 스포츠가 이렇게 큰 경기장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 설 수 있는 스포츠였나’라는 생각했다. 한 번도 그 정도 규모의 경기장을 그 이전에는 체험해 본 적이 없어서 매우 신기했다. 당시 올림픽에 출전한 최다빈, 김하늘, 차준환이 대단해 보였고, ‘나도 열심히 해서 언젠가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자신의 연기를 펼쳤으면 좋겠다.’라고 꿈꾸게 되었다고.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올림픽을 향한 그녀의 원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코로나가 한창이던 베이징 올림픽 경기장은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무관중이어서 제가 평창 때 느꼈던 거랑 많이 다르긴 하더라고요. 경기장은 똑같이 크지만 어쨌든 텅텅 비어 있으니까. 뭔가 굉장히 조용했어요.”
코로나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이슈로 어수선했던 베이징 올림픽에서, 김예림은 어떻게 중심을 잡고 대회를 잘 끌어 나갈 수 있었을까?
“아주 어렸을 때부터 제 포커스는 항상 베이징 올림픽이라는 곳에 있었어요. 그래서 나한테 정말 의미 있는 순간이자 시합인데, 번잡한 분위기에 휘말려서 결과에 영향이 가면 너무너무 두고두고 아쉽고 스스로도 자책할 것 같은 마음이 들었어요. 그래서 자신의 중심을 잡으려고 노력하고 ‘스스로에 집중하겠다’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런 그녀의 노력이 통했던 것일까. 베이징 올림픽에서 김예림은 쇼트와 프리에서 큰 실수 없이 모든 점프를 착지하며 9위를 기록했다. 그뿐만 아니라 선녀 같은 연기와 상반된 털털하고 솔직한 모습으로 ‘피겨 장군’이라는 그녀만의 별명도 획득했다.
“별명은 쇼트 다음날 연습 인터뷰 때 기자님들께 처음 들은 것 같아요. 기자님들이 “‘피겨 장군’이라는 말이 있는데 알고 있냐, 어떻게 생각하냐?”라고 이야기하셔서 그때 처음 알았던 것 같아요. 처음에는 ‘저 기자님이 뭐라고 하시는 걸까? 피겨 장군? 잘못 말씀하신 거 아닐까?’라고 생각했는데 바로 그날 오후부터 ‘피겨 장군’에 대한 수식어가 많이 올라오더라고요.”
처음 그 별명을 들었던 순간을 회상하며 김예림은 장난스럽게 미소 지었다.
“경기가 끝나면 어떻게 했는지 자세히 보려고 바로바로 제 영상을 보거든요. 저도 화제가 되기 전에 (퇴장하는) 그 장면을 봤어요. ‘어 왜 이래, 너무 심했네’라고 생각했죠. 혹시나 ‘안 좋게 보이진 않겠지’라는 걱정을 조금 했는데 오히려 그걸 솔직하게 잘 봐주셔서…”
그렇게 ‘피겨 장군’이 대한민국에 강림했다.
베이징 올림픽이 끝나고, 대학생이 된 김예림은 그 어느 때보다 바쁜 시간을 보냈다. 올림픽 이후 많은 선수가 앓는 정신적인 후유증은 그녀에게 먼 이야기였다. 오히려 김예림은 새로운 걸음을 내딛기로 결심한다.
“베이징 올림픽 전 시즌까지만 해도 항상 베이징 올림픽을 끝으로 생각하고 달려왔어요. 그런데 베이징 시즌을 겪으면서 남은 시간이 짧게 느껴지면서 너무 아쉬웠어요.”
많은 한국 피겨스케이팅 선수들, 특히 여자 싱글 선수들은 입시를 지나 대학생이 되면서 선수 생활 대신 학업에 집중하는 수순이 만연했다. 남자 싱글 스케이터들과 다르게 여자 싱글 스케이터들은 10대 후반을 전성기로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했고, 실제로 신체적으로도 많은 변화를 느끼게 되는 시기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김예림도 체형 관리나 체력 관리에서 이전보다 더 큰 노력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또래인 대학생 스케이터들의 부재로 인한 정신적인 어려움 역시 함께했다.
“20살이 되면서 선수 생활을 그만두는 게 어떻게 보면 약간 당연한 느낌이었죠. 저도 그냥 당연하게 고등학교 3학년에 열리는 베이징 올림픽을 마지막으로 생각하고 달려왔었거든요. 그런데 베이징 올림픽이 다가올수록 너무 아쉬운 거예요. 그래서 더 하고 싶은 마음이 정말 굴뚝 같았지만, 저를 지원해 주신 부모님이나 가족분들한테 선뜻 말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근데 베이징 올림픽에서 좋은 화제도 되고, 또 좋은 모습을 많이 보여드렸고, 가능성이 있는 모습을 보여드려서, 그때 확실하게 말씀드렸던 것 같아요. ‘더 선수 생활을 하고 싶고, 그냥 하는 게 아닌, 지금보다 더 열심히 해서 더 경쟁력 있는 선수가 되고 싶다. 그러니까 좀 더 지원해 달라.’라고 말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피겨스케이팅과의 이별이 아쉬웠던 김예림은, 자신의 가능성을 보여주며 주변의 서포트와 함께 대학생 피겨스케이터로서 새로운 시즌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렇게 시작한 2022-2023시즌. 김예림은 한국 피겨스케이팅 역사상 가장 찬란할 전성기의 포문을 열고 함께했다. 챌린저 시리즈와 그랑프리 시리즈까지, 모든 대회의 포디움에 올랐을 뿐만 아니라 준우승을 했던 2022 그랑프리 드 프랑스 대회를 제외하고 모든 대회에서 우승했다. 특히 일본에서 열린 2022 NHK 트로피는 최초의 한국 선수 우승이었으며, 김연아 이후 16년 만에 그랑프리 금메달이었다. 김연아를 동경하며 피겨스케이팅을 시작한 어린 소녀는, 김연아 이후 13년 만에 한국 여자 선수 중 처음으로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에 진출했고, 4년 뒤에는 김연아 이후 16년 만에 처음으로 그랑프리 파이널에 진출한다. 그 어느 때보다 굳건한 다짐으로 시작했던 시즌이었지만 그녀 본인조차 이런 성과를 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유니버시아드 선발전을 7월에 하게 되면서 이 시즌을 준비했었던 마음이나 열정에 비해 좋지 못한 모습을 보여드렸잖아요. 그게 스스로 너무 화가 나는 거예요. ‘내가 보여주고 싶었던 모습은 이게 아닌데.’라는 마음을 가지고 더 (대회를) 열심히 준비했어요. 마침 그 시기 진천 선수촌을 입촌하게 되면서 환경도 잘 따라줬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정말 힘들게 준비했고, 그런 노력이 결과로 잘 보인 것 같아요. 그래도 그렇게까지 좋은 결과를 얻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어요. 생각보다 정말 좋은 결과를 냈죠.”
시즌 후반부에는 5주에 4번의 대회를 출전하는 강행군을 치렀다. 랭킹대회 끝나고 바로 다음 날 그랑프리 파이널 출전을 위해, 종합 선수권을 치르고 다음다음 날은 유니버시아드 출전을 위해 비행길에 올랐다.
“스케줄이 진짜 힘들긴 했어요. 그리고 스케줄 할 때보다 그게 끝났을 때 오는 타격이 되게 크더라고요. 진짜 너무너무 힘들었지만 다 제가 선택한 것들이고 제가 그렇게 하기로 한 것이기 때문에 ‘그냥 최대한 주어진 상황에서 제일 잘해보자’라고 생각한 거 같아요. 그래도 잘 마무리했고 저한테 좋은 경험과 커리어로 남았기 때문에 지금 생각했을 때 후회는 없어요. 그냥 단지 체력적으로 좀 힘들었던, 많이 힘들었던 것뿐.”
그런 강행군 속에서도 대학생들의 올림픽인 동계 유니버시아드에서 동메달을 획득하며, 그 대회 최초로 메달을 획득한 한국 여자 선수가 되었다. 미국 콜로라도 스프링스에서 열린 4대륙 선수권에는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 메달을 획득했다. 하지만 너무나 긴 시즌 때문이었을까, 아쉽게 시즌 종반부의 가장 중요한 대회였던 세계 선수권은 그녀의 노력에 비해 아쉬운 결과로 남았다.
“월드 준비할 때 체력이 좀 많이 바닥 나 있는 상태였어요. 휴식도 해보고 반대로 또 힘들게 운동도 해보고 했는데, 몸이 빨리 회복이 되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연습하는 과정에서도 많은 답답함이 있었고, 시합에 가서 공식 연습을 할 때 평소 연습보다 더 잘 안되더라고요. 보통은 그래도 그런 상황이 됐을 때 좀 더 집중해서 연습했던 것보다 잘 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때는 오히려 더 잘 안되니까 마음이 아주 답답했어요. 경기도 쇼트 프로그램에서 큰 실수가 나온 시합이 거의 없었거든요. 특히 작년 시즌 같은 경우에는. 그런데 세계 선수권 쇼트에서 큰 실수가 나와서 좀 많이 속상하고 충격이 컸던 것 같아요.”
세계 선수권 이후 시즌이 종료되는 여느 시즌과 달리, 한국 상위 선수들은 팀 트로피에 처음으로 출전하게 되었다. 2년마다 한 번씩 개최되는 팀 트로피는 말 그대로 피겨스케이팅 국가 대항전이다. 해당 시즌 ISU 주관 그랑프리 시리즈와 선수권 대회에서 얻은 누적 국가 스탠딩 포인트가 높은 상위 6개국만이 초청되는 경기로, 한국은 국가 순위 4위에 올라 처음으로 참가했다. 김예림을 포함하여 피겨스케이팅 전 종목 선수들의 노력으로 출전권을 획득했다. 하지만 김예림은 마냥 달갑게 팀 트로피 출전을 좋아할 수 없었다.
“처음으로 우리나라가 팀 트로피라는 경기를 나가게 된 건데, 맨 처음에는 사실 그렇게 반갑지만은 않았어요. 왜냐하면 제 상황이 별로 안 좋았고 충격이 컸던 만큼 자신감도 많이 떨어져 있었어요. 또 다른 시합을 준비해서 제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게 그때는 그리 반갑지만은 않은 상황이어서 며칠 힘든 시간이 있었어요.”
하지만 어려움에 넘어지지 않는 오뚜기처럼 김예림은 다시 한번 굳건한 마음으로 링크장에 섰다. 이 소중한 기회를 지금 본인의 감정 때문에 날려버리지 말자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그런 그녀의 곁에는 다른 팀 코리아 선수들이 있었다. 동료이자 라이벌이며, 또 좋은 친구이자 선후배인 대한민국 국가대표 스케이터들.
“같이 나가는 팀 선수들이 너무 열심히 준비하고 있는 거예요. 속으로는 ‘다들 시즌이 거의 끝났으니까, 이벤트성 경기니까, 살살 하고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고 다들 진짜 열심히 준비했어요. 그 모습을 보고 ‘저렇게 열심히 준비하고 있는데 나도 열심히 준비해서 같이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내야겠구나’라는 생각하게 돼서 더 열심히 준비한 거 같아요.”
태릉 빙상경기장에서 함께 훈련하는 그들과 함께 김예림은 경기 외적인 부분에서도 최선을 다했다.
“이벤트성 경기인 만큼 경기 외적인 부분에서도 즐겁게 잘 준비하면서, 영상도 찍고 아이디어 내며 재밌게 잘 준비했던 것 같아요. 저희가 매일 (태릉에서) 만날 수 있는 게 가장 큰 도움이 된 것 같아요. 매일 만나다 보니까 일상적으로 주고받는 농담으로라도 툭툭 뱉다 보면 그게 아이디어가 되기도 하고… 그래서 준비를 잘할 수 있었던 거 같아요.”
그런 김예림과 팀 코리아의 노력은 메달로 돌아왔다. 처음 출전한 팀 트로피 대회에서 한국 대표팀은 종합 순위 2위로 당당히 포디움에 올랐다. 김예림은 세계 선수권의 아픔을 딛고 완벽한 프리 스케이팅을 선보이며, 다시 해낼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고 증명했다.
9년 차 국가대표인 김예림은 이제 국가대표 맏언니가 됐다. 피겨 종목 특성상 여자 싱글의 경우에 빨리 은퇴하는 경우가 매우 많았지만, 김예림은 뿌리 깊은 나무처럼 늘 그 자리에서 꾸준한 모습을 보여줬다. 대학교 진학 이후 현역을 지속하는 소수의 한국 여자 피겨스케이팅 선수로서, 김예림이 고심하고 있는 숙제는 많았다.
“‘이미 난 다 컸다.’ 생각했는데 고3과 대학생은 차원이 다르더라고요. 신체적인 부분도 정신적인 부분도 더 많은 어려움이 있더라고요. 우선은 체형 관리도 이전보다 많이 힘들어서 ‘예전에 언니들이 많이 힘들었겠구나!’라는 생각했어요. 그런데 가장 어려운 것은 정신적인 부분이에요. 위에 누군가 없다는 게 좀 많이 외롭고 힘들 때가 있는 것 같아요. 지금은 (최)다빈이 언니가 있긴 하지만 대학생 여자 선수가 많이 없어서 주변 시선이 좀 힘들 때가 있는 것 같아요.”
보통 사람들이 여자 싱글 스케이터의 최전성기라고 하는 10대 후반이 지난 스케이터를 더 이상 현역 스케이터로 보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은퇴가 얼마 남지 않은 스케이터, 이미 현역에서 한발 물러난 스케이터로 보는 주변의 인식들은 김예림에게 정신적으로 피로함을 가져오곤 했다.
“건너 건너 주변에 피겨스케이팅 선수가 있어 피겨스케이팅을 조금 아시는 분들은 저에 대해 ‘그러면 이제 (선수 생활이) 얼마 안 남았겠네’라는 식으로 말하는 경우가 있어요. 보통 이렇게 얘기하는 애들이 저랑 비슷한 나이 또래 애들이 많아요. 그런 얘기를 가끔 듣는데, 그러면 저는 ‘그건 네 생각이고, 분명히 앞으로는 그렇지 않을 거다. 이미 지금도 해외에는 나보다 더 나이 많은 선수들이 더 잘 탄다.’라는 얘기를 해주고 있기는 해요. 그럴 때 ‘그건 네가 본 애들이고. 나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고, 앞으로 (한국 선수들은) 그렇지 않을 거다.’라고 생각하거든요.”
남이 정해 놓은 한계선을 넘어 김예림은 ‘계속 성장하는 선수’라는 것을 보여주고 증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제가 하는 계획이나 훈련 또는 목표가 어느 정도 기대치를 내려놓고 하는 것이 아니에요. 지금 성장하고 있는 어린 선수들과 같은 마음으로 이 운동에 임하고 있어요. 같은 시선으로 봐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지금은 좀 힘들지만 앞으로 저를 비롯한 많은 선수가 20살이 되고 대학생이 될 때까지 선수 생활을 많이 많이 이어가서, ‘10년 뒤에는 대학생이 돼도 선수 생활을 이어 나가는 게 당연하다는 시선이 생기고 당연하다는 인식이 되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해요. 조금만 힘들거나 잘 안되면 ‘그래, 쟤도 안 되겠지’라는 시선들이 느껴져서 좀 화날 때가 있지만, 그럴 때마다 오히려 더 그렇지 않다는 걸 보여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실제로 해외에는 김예림보다 연장자인 여자 싱글 스케이터들이 좋은 성적과 기량을 유지하며 꾸준히 대회에 출전하고 있다. 2년 연속 세계 선수권 챔피언을 차지한 사카모토 카오리(23, 일본)는 2000년생으로 얼마 전 고베가쿠인 대학을 졸업한 일반부 스케이터다. 그녀는 현역 스케이터로 2026년 밀라노 올림픽을 목표로 훈련에 전진하고 있다. 2023년 유럽선수권 챔피언인 아나스타샤 구바노바(20, 조지아)나 2023년 세계 선수권 동메달리스트인 루나 헨드릭스(23, 벨기에) 모두 김예림보다 나이가 많다.
시간이 지날수록 쌓이는 기술과 노하우는 분명히 존재한다. 경기를 치르는 노련함, 프로그램을 연기하는 성숙한 표현력 등. ‘여자 선수들도 오래 탈 수 있다’는 인식을 바꾸기 위해 많은 선수가 본인의 자리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다.
시즌이 끝나자마자 김예림은 부상과 컨디션 회복에 집중했다. 올림픽 시즌부터 고질병이 된 허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허리 시술을 강행했다. 지난 시즌 내내 불편하던 허리는, 지난 4월 시술 이후 관리도 더 열심히 하며 이제는 거의 문제가 되지 않고 있다고.
이후에는 캐나다 전지훈련을 떠났다. 예술성, 스케이팅 부분에 많은 신경을 쓰며 훈련했다. 그뿐만 아니라 데이비드 윌슨과 제프리 버틀을 만나 이번 시즌을 위한 새 프로그램을 구상했다.
“데이비드 윌슨이 만든 프리 프로그램 ‘Je suis malade’를 먼저 이야기해야 할 것 같아요. 프리 음악은 데이비드 윌슨 지난 시즌 중반부터 추천했다고 해요. 제가 시즌 중이니까 저에게 직접적으로 이야기는 못 하고 제 주변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대요. 저는 음악을 들었을 때 ‘조금 지루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고 다운된 분위기가 걱정돼서 윌슨에게 솔직하게 얘기했어요. 그러니까 윌슨이 이미 생각한 것이 있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자작곡이 깔릴 거고, 중간에는 아예 통으로 새로운 부분을 넣어서 네가 말하는 그런 느낌이 없게끔 할 거다’라고 이야기하시더라고요. ‘안무가가 이 정도의 확신이 있다면 믿고 따라가는 게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서 선택하게 됐어요. 그런데 개인적으로 진짜 마음에 드는 프로그램이 나왔어요.”
프리 프로그램을 안무한 데이비드 윌슨과 쇼트 프로그램을 안무한 제프리 버틀은 같은 곳에서 일을 했고, 이런 사실은 생각 외의 시너지 효과를 가져왔다.
“쇼트 프로그램은 제프리 버틀이 안무한 영화 ‘라벤더의 연인들’ OST에요. 프리 프로그램을 만들고 쇼트 프로그램을 만들었는데, 제프리가 “네가 프리 프로그램을 타는 걸 다 봤는데, 쇼트 프로그램의 스토리가 이어졌으면 좋겠어”라고 의견을 줬어요. 디테일하게 상황을 설정하고 윌슨이랑 같이 이야기하면서 저에게 어떤 느낌인지 전달했죠.
쇼트에서는 정말 행복하고 사랑에 빠진 사람만이 나올 수 있는 그런 연기를 보여줘요. 그리고 그날 밤에 무슨 일이 일어나죠, 전화가 온 거에요. 그래서 쇼트 다음날인 프리에서, 제가 사랑했을 때와 완전히 상반된 모습으로 절망하고 슬프고 아픈 연기를 보여주자고 해서 하나의 긴 스토리가 연결되었어요.”
김예림의 갈라 프로그램은 영화 ‘트와일라잇’ OST인 ‘A Thousand Years”로, 9월 초 하버드 대학교 자선 갈라쇼에서 처음 선보였다. 전 피겨스케이팅 국가대표이자 현 뮤지컬 배우인 이준우(본명 이준형)가 만든 이 프로그램의 음악은 김예림이 직접 선곡했다.
“쇼트와 프리 두 프로그램과 이어서 생각했던 것은 아니고 제가 좋아하는 곡이어서 선곡했어요. 작년에 갈라 프로그램으로 The Good Part와 A Thousand Years를 두고 고민했어요. 둘 다 하고 싶은데 뭘 하지 이러다가 The Good Part 같은 느낌의 프로그램을 보여준 적이 없는 것 같아서 이걸 보여주자 했었죠. 올해에는 어떤 갈라 프로그램을 연기할지 고민하다가, ‘작년에 하고 싶었는데 못했으니까 A Thousand Years를 올해 하자’ 싶어서 하게 됐어요.”
그렇게 이번 시즌 김예림의 모든 프로그램의 주제가 ‘사랑’이 되었다. 그녀가 각 프로그램을 통해 전달하려는 사랑은 어떤 것일지 질문했다.
“‘사랑’에 대해 저도 생각해 보기는 했거든요. 그런데 상대를 이성으로 생각해도 똑같고, 제가 하는 직업/일이라고 생각해도 비슷하게 와닿더라고요. 쇼트는 사랑을 함으로써 생기는 행복들에 대한 것. 프리는 사랑이 주는 절망과 아픔. 갈라는 사랑이 가져온 평화 아닐지 싶어요.”
전지훈련 후, 한국에 돌아온 김예림은 새로운 팀에 적응하면서 기술적인 부분을 집중해 훈련했다. 이미 기술적으로 성숙하여 있는 선수임에도 새롭게 훈련할 것들이 많이 있을까 싶었는데, 그녀는 본인만이 느낄 수 있는 점프 퀄리티를 향상하기 위해 노력했단다.
“저만 느낄 수 있는 부분일 수도 있는데, 작년에 부상도 있었고 너무 많은 시합을 하면서 컨디션에 영향을 끼쳐 자세나 퀄리티가 흐트러졌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앞으로 다음 올림픽을 생각했을 때 그런 부분을 잘 잡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쉽게 말하면 퀄리티에 되게 많이 신경을 써서 연습했던 것 같아요.
지금 새로 계신 코치 선생님들이 영상을 많이 찍어서 보여주시는 방식으로 훈련하고 있거든요. 그게 지금 저한테 굉장히 필요한 부분이어서 집중해서 훈련하고 있어요. 어렸을 때는 잘 모르니까 코치님이 직접적으로 알려주는 게 더 쉽게 느껴졌었는데, 지금은 그 누구보다 내 자세를 내가 제일 잘 아니까 제가 직접 보고 느끼는 게 가장 효과적인 것 같아요.”
이번 시즌 그녀의 목표는 시즌 후반부 대회를 잘 치르는 것. 더 정확히 말하면 후반에 최상의 컨디션이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이번 시즌에는 그랑프리 시즌 전까지 한 개의 챌린저 대회에만 출전할 예정이다. 작년의 경험을 잘 활용해서 후반 시합에 조금 더 집중하고 싶다는 그녀의 바람이 꼭 이루어지길 기원한다.
단 한 시즌도 김예림에게 쉬운 시즌은 없었다. 계속해서 밀어닥치는 역경 속에서도 늘 성실함으로 자신의 길을 헤쳐 나갔다.
“제 스케이터로서의 강점은 ‘꾸준함’과 ‘성실함’ 같아요. 어렸을 때는 화려한 것들에 항상 가려지다 보니까 그것들이 소중한 줄 몰랐어요. 한해 한해 지나면서, 특히나 성인이 되고부터는 ‘노력도 재능이다’라는 말이 많이 와닿았어요. 노력은 재능이라고 생각하지 않잖아요. ‘노력은 노력이고, 재능은 재능이다’라고 생각하는데, 멘탈 선생님이 “노력도 재능이고 너는 제일 큰 재능을 가지고 있다”라고 말씀해 주셨어요. 선수 생활을 돌이켜서 생각해 봤을 때 노력이 제 가장 큰 무기였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오랫동안 선수 생활을 이어 나갈 수 있던 데는 노력이 가장 컸던 거죠.”
‘그냥 묵묵히 자기 길을 걸어 나간 선수’로 기억되고 싶다는 김예림.
“시간이 지나고 많은 분이 나중에 다시 생각해 보셨을 때, 그때 존경할 수 있는 선수가 됐으면 좋겠어요. 현재보다도 나중에 ‘그 선수 진짜 대단했구나’라고 기억에 남는 선수요.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느껴지는 그 가치가 진짜 더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게 기억되고 싶어요.”
바다는 비에 젖지 않는다(어니스트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 中). 성공과 실패, 칭찬과 비난,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김예림은 구속되지 않고 자유로웠다(화엄경 中). 김예림은, 벼락에도 멍들지 않는 허공과 같다.
기획 김현진 박지민
인터뷰 진행 박지민
촬영 및 사진 편집 박지민
영상 편집 이민정
검수 박지민 이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