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자랑스럽습니다. 너무 멋집니다. 우리 선수들!”
아이스댄스. 이름 그대로 얼음 위에서 춤을 추는 종목.
한국 아이스댄스 사상 첫 올림픽 진출, 아시안 게임 입상. 그리고 아시아 팀 최초 주니어 세계선수권 입상. 자신의 업적 뿐만 아니라 심판이자 해설 위원으로서 감동을 전하며, 대한민국 아이스댄스 역사의 모든 면면에 함께하는 주인공이 있다. 한국 유일의 아이스댄스 테크니컬 스페셜리스트(이하 기술 심판), 양태화 심판이다.
그녀가 걸어온 길은 한국 아이스댄스의 역사와도 같다. 한국 피겨스케이팅 최초로 아시안 게임 메달을 획득했고, 한국 아이스댄스 최초로 올림픽 출전권을 획득해 2002년 솔트레이크 동계 올림픽에 출전했다. 2006년에는 국내 최초로 아이스댄스 국제 기술 심판이 되었으며, 2016년에는 한 단계 높은 ISU 아이스댄스 기술 심판 자격을 취득했다. 그 바로 다음해 2017년 가을, 한국 아이스댄스 팀인 민유라-알렉산더 겜린 팀이 평창 올림픽 출전권을 자력으로 획득했다. 그리고 그 현장에 양태화는 심판으로 함께하며 선수 못지않게 감격했디고.
아이스댄스 심판으로, 프리랜서 코치로. 주 7일, 24시간을 정신없이 보내는 양태화 심판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아이스댄스와의 우연한 만남, 인연
양태화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사업을 하던 어머니를 따라 전학해 온 리라초등학교에서 빙상 수업을 처음 접했다. 유치원 때부터 스케이트를 타던 친구들 사이에서 부족함을 느꼈던 양태화는 어머니에게 개인 레슨을 요청하면서 피겨스케이팅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었다.
“그전까지는 피겨라는 게 있는 줄도 몰랐어요. 전학을 갔는데 빙상 수업이 있었죠. 친구들은 유치원 때부터 (스케이팅을) 하니까 잘 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너무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엄마한테 개인 레슨을 시켜달라고 졸랐죠.”
이후 이인숙 코치의 권유로 아이스 댄스에 입문하게 되었다. 마냥 귀엽게만 보이던 어린 양태화는 화장만 하면 눈꼬리가 올라가며 사람을 매섭게 끌어당겼다.
“정말 솔직히 말하면 아이스댄스는 이인숙 코치님이 ‘너 해봐’ 이래서 하게 됐어요. 다행히 저희 엄마도 ‘그래요. 한번 시켜볼게요’ 하셨죠. 엄마가 선생님의 판단을 믿으셨던 것 같고, 선생님이 엄마를 잘 설득하신 것 같아요. 저는 스케이트가 재밌고, 시키니까 멋모르고 그냥 시작했죠.”
양태화는 선배들의 연습 장면을 보면서 처음 아이스댄스를 접했다. “같은 팀의 박윤희-류종현 선생님이 아이스댄스를 타셨어요. ‘와, 저게 댄스구나. 선배들이 타는구나’라며 봤는데 그걸 제가 하게 될 줄은 그때는 몰랐죠.”라고 당시를 회상하며, “아이스댄스를 시작하기 전까지 아이스댄스라는 종목에 대해서 잘 몰랐다”고 말했다. 두 벌의 경기 의상만 맞추면 되던 싱글과 달리 여덟 벌의 연습/경기 의상을 맞추는 것. 양태화는 ‘이게 좀 다르네’라고 생각하며 아이스댄스를 시작했다고.
아이스댄스 전문 아카데미까지 있는 지금과는 달리, 양태화가 선수로 활동하던 당시는 아이스댄스와 싱글 스케이팅의 훈련 시간을 구분하지 않았다. 한정된 얼음 상황으로 인해 같은 시간, 같은 빙상장에 싱글과 혼성 종목이 동시에 훈련했다. 양태화는 당시 상황에 대해 “근데 그때 당시에는 또 그냥 그렇게 타져요. 사람이 적응의 동물이라고, 그게 불편한지 모르고 탔어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예정된 사건이었다. 곧 큰 사고가 난 뒤, 가끔 빙상장의 대관 시간이 넉넉할 때 한 시간~한 시간 반 정도 아이스댄스 훈련 시간을 별도로 받을 수 있었다.
매년 여름에는 해외 전지훈련을 떠났다. “당시 링크장이 여름에 문을 닫으니까, 여름방학 한 달~두 달 정도 떠나 있었죠. 전지훈련을 하러 가서 안무도 받았어요. 팀마다 장소는 조금 달랐는데, 이인숙 선생님 팀은 러시아로, 신혜숙/오지연/지현정 선생님 팀은 미국으로 갔죠.”라고 말했다. 당시 종목에 따라 별도의 훈련지에서 연습했는데, 싱글은 옥사나 바이울 코치였던 갈리나 즈므에브스카야 팀에, 댄스는 마리나 투마노스카야 팀에서 훈련했다. 3년 정도 러시아에서 훈련한 뒤, 이후에는 미국 델라웨어에서 전지훈련을 했다.
당시 한국에서는 아이스댄스의 노하우가 많지 않았던 터라, 안무 위주의 반복 훈련을 주로 했다. “요즘 외국 세미나나 외국 아이스댄스를 가르치는 것을 보면 굉장히 디테일해요. 기본 스케이팅 밀기에서부터 패턴 들어가는 엣지 사용 방법까지요.”라고 이야기를 시작한 양태화는 “당시에는 음악을 계속 맞췄어요. 안무를 받으며 배워온 기술을 어쨌든 최대한 해야 하니까요. 반복 훈련을 했던 것 같아요.”라고 당시의 훈련 방법을 전했다. 눈대중으로 익혀온 것을 반복 수행하며, 부족한 부분은 ISU(국제빙상연맹)의 교육용 비디오테이프를 활용했다. 패턴 댄스별 다이어그램을 비디오테이프로 보며 ‘외운 것이 맞는지’ 비교하여 체크했다.
당시 아이스댄스 훈련의 지향점에 대해 양태화는 “전략이 따로 있던 것이 아니라, 체력을 바탕으로 ‘속도를 내서 밀고 가야 된다’가 당시 생각이었던 것 같아요. 그 당시에 뭘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아는 게 많지 않으니까.”라고 말했다. “예전에는 싱글도 그랬지만 일단 체력 훈련을 많이 했어요. 얼음에서 훈련할 시간이 많지 않으니까, 체력 훈련을 무조건 많이 했죠. 비시즌에는 하루에 10km 달리기를 했어요.”라며 당시 훈련 루틴을 설명한 양태화는 “그때 제일 큰 오빠는 김현철 코치였고 제일 막내가 김연아 선수였어요. 막내가 제일 잘 뛰었어요. 그리고 오빠는 남자니까 당연히 잘 뛰고. 그러면 저는 거기서 또 혼나는 거예요. ‘너는 동생보다 못 뛴다’고 하면서.”라며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파트너? 파트너!
아이스댄스는 두 명이 한 팀을 이루어 호흡을 맞춘다. 팀이기 때문에 상호 힘이 될 수도 있지만, 팀이기 때문에 어려움도 많다. 올림픽 메달을 획득한 상위권 팀이라도, 파트너와의 결별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파트너십, 국적, 기술의 격차, 신체적 문제 등 이유도 다양하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게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라는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처럼, ‘오래가는 아이스댄스 팀은 모두 비슷하게 닮았지만, 결별한 아이스댄스 팀은 저마다의 이유로 결별한다’.
아이스댄스를 시작하고 어려웠던 부분이 뭐였는지 묻는 질문에 양태화는 “혼자 타다가 파트너랑 타니까 맨날 싸워요.”라고 답했다. “맨날 싸우는데, 속상한 건 제 편이 없어요. 왜냐하면 여자가 많고 남자가 귀하다 보니까. 제가 ‘키스앤크라이’에서도 ‘남자가 무조건 깔려야 해요.’라고 한 거는 제 보상 심리 같은 게 있었던 것 같아요. 외국은 ‘레이디 퍼스트’인데 우리나라는 그게 아닌 게 긴 세월 동안 항상 마음 아프고 힘들었던 부분이거든요. 선수 생활 동안 힘들었던 건, 파트너와의 관계에서 내가 을이라는 것. 그게 좀 힘들었던 것 같아요.”라고 쉽지 않았던 팀 활동을 담담히 이야기했다.
반면 양태화의 어머니는 파트너에 대해 전혀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비하인드가 있는데, 저희 엄마는 제 파트너를 사위로 생각하셨어요.”라며 이야기를 시작한 양태화는 “그 당시에 러시아가 제일 아이스댄스를 잘했는데, ‘러시아에서 잘 타는 선수들은 부부다’라는 생각이 있었고 실제로 일부러 결혼을 시키기도 했다는 얘기가 있었나 봐요. ‘결혼을 시켜서 사위로 삼아서 부부 아이스 댄서를 만들어야겠다’라고 생각하셨데요. 지금 생각하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었는지 의문이에요.”라며 양태화는 장난스럽게 웃음 지었다.
양태화의 첫 파트너는 김현철이었다. 현재 울산에서 코치로 활약하고 있는 김현철은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다 빙판으로 넘어왔다고. 신장 차이가 30cm도 더 났던 두 사람은 ‘그냥 밀어, 다리 사이로 들어갔다 나와.’라는 지시 들으며 킬리안 스텝을 처음 배웠다. 하지만 두 사람의 파트너십은 오래 가지 못했다. 두 사람의 나이 차이로 인해 경기 출전에 어려움이 생겼고, 파트너가 된 지 2년도 되지 않아 새로 팀을 구성하게 된다. 양태화는 이천군과, 김현철은 김희진과 팀이 되어 훈련을 이어갔다.
새 파트너와 새롭게 시작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우선, 저희 엄마가 반대하셨어요. ‘아니 지금 이 파트너랑 좋은 길이 있다고 해서 시작했는데, 제대로 해보지도 않고 바꾸라는 건 좀 아니지 않느냐’라고 하셨죠.”라고 당시 상황에 대해 전했다. 양태화는 “저도 그때 막 사춘기니까 또래 남자랑 손을 잡고 타는 게 약간 이상한 것 같고, 근데 (아이스댄스는) 하고 싶고. 그래서 그때 굉장히 힘들었어요.”라고 회상하며 “사춘기 소년, 소녀의 만남이 쉽지는 않아요.”라며 덧붙였다. 결국 양태화는 한 달 정도 방황하다가 다시 아이스댄스를 시작한다.
그리고 그렇게 두 번째 파트너이자 마지막 파트너였던 이천군을 만났다. 양태화는 이천군과의 파트너십에 대해 “저희는 정말 많이 싸웠어요.”라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아이스댄스 말고 다른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아이스댄스를 하려면 얘랑 해야 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결론은 ‘잘해야지, 뭐’로 끝났다고. 대회를 나가고 조금씩 목표가 생기고, 욕심이 생기면서 아이스댄스 선수 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다.
아이스댄스 선수로서 우뚝 서다
‘체력으로 미는 것이 곧 전략’이던 척박한 시절. 양태화는 그 당시에도 어려움을 뚫고 가장 다양한 국제 대회에 출전했다. 처음 도입됐던 주니어 그랑프리 시리즈와 사대륙 세계 선수권을 포함, 한국에서 개최된 1997년 주니어 세계 선수권, 1999년 동계 아시안 게임, 2002년 사대륙 선수권 등 다양한 국제 대회에 출전할 기회를 잡기도 했다. 결국 ‘꿈의 전당’인 올림픽 출전권까지 거머쥐었다. 시기가 잘 맞기도 했지만, 양태화-이천군이 꾸준한 성과를 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999년, 양태화-이천군 조는 아시안 게임에서 한국 최초로 피겨스케이팅 메달을 따며 한국 아이스 댄스의 역사를 새롭게 썼다. 쉽게 획득한 메달이 아니었다. 연습 중 턱을 다쳐서 27 바늘을 꿰매야 했지만 도핑을 우려해 마취도 할 수 없었다. “큰 병원이 없어서 근처 병원으로 갔는데, 저희 선생님이 마취는 절대 안 된다고 하셨죠. 지금처럼 도핑 교육이 있던 것도 아니라 무조건 마취는 안 된다고 생각해서 생살을 꿰맸어요. 지금이면 마취제를 쓰고 서류를 제출했으면 됐을 텐데 그때 당시에는 도핑 관련 정보가 전혀 없었어요.”라고 당시 아찔했던 과정을 설명했다.
값진 메달이었지만 기쁨보다는 아쉬움이 컸다. “솔직히 목표는 2등이었어요.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해서 아쉬웠어요. 연습하면서 중국 팀을 이길 수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3등을 해서 좋은데 조금 아쉬웠어요. 2위를 했던 팀은 (미야모토) 겐지네 팀이었는데, 그때 이후로 겐지한테 진 적이 거의 없던 것 같아요. (강릉) 아시안 게임에서는 (이기지 못해) 아쉬웠죠.” 양태화는 그때 선수로서 욕심이 생겼다. 그 욕심은 더 잘해야겠다는 추진력이 됐다.
2000년, 양태화는 파트너인 이천군과 함께 더 큰 성장을 꿈꾸며 해외로 장기 전지훈련을 떠난다. 올림픽이라는 목표가 있었기에 타티아나 타라소바, 나탈리아 두보바, 나탈리아 리니츄크와 같은 유명한 코치와 캠프를 후보로 놓고 고민했다. ‘리니츄크 쪽으로 가자. 그쪽이 이제 신흥 대세다’라고 결론지은 류종현 코치의 감에 따라 미국 델라웨어로 떠났다.
그리슉&플라토프, 크릴로바&오브샨니코프, 돔니나&샤발린 등 많은 올림픽 메달리스트를 키워낸 나탈리아 리니츄크 코치와 한국 코치진의 협력 아래 두 사람은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훈련했다. 당시 리니츄크 캠프에는 이리나 로바초바-일리야 아베부흐로 대표되는 러시아 팀과 미국, 우크라이나, 이스라엘 등 다양한 국가의 선수들이 훈련했다. 양태화는 델라웨어 대학교에 있는 학생 아파트에 살면서 링크와 숙소를 오가는 생활을 했다. 두 사람 사이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도 단 둘이 고립된 생활을 하던 이때였다.
“러시아어만 쓰는 집에 있기는 뭐해서, 따로 살다 보니까 생활을 제가 해야 하는 부분이 많잖아요. 근데 저는 막 성인이 됐고, 파트너는 저보다 겨우 한 살 많았어요. 서로 예민한 나이잖아요.”라며 양태화는 당시를 떠올렸다. 양태화는 “누군가가 옆에서 날 좀 다독여줬으면 내가 조금 더 열심히 했을 텐데. 내 딴에는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항상 혼나고, 결과는 좋지 않고, 어디다 풀어놓을 데는 없고, 사는 건 진짜 너무 힘들고. 그래서 파트너랑 사이가 그때 제일 나빴어요. 그래서 여름에 코넥티컷으로 전지훈련 간 선생님들이 저희를 잡으러 델라웨어에 왔었어요. 안 한다고 해서. 얘네만 놔두면 무슨 일 나겠다 해서. 코넥티컷에는 아이스댄스 팀이 없는데, 저희를 데리고 가서 거기서 잠깐 훈련도 했죠.”라고 덧붙였다. 꿈꾸던 올림픽은 성큼 다가왔지만, 선수로서의 양태화는 어름거렸다.
2001년 세계 선수권에서 출전권 획득에 실패한 후, 두 사람은 출전권 추가 획득의 마지막 기회인 골든 스핀 오브 자그레브 대회에 출전한다. “저는 왜 이렇게 중요한 시합 때마다 다칠까요?”라고 안타까운 표정으로 이야기를 시작한 양태화는 “프리댄스 웜업이었어요. 로테이셔널 리프트를 하는데 중국 선수랑 동선이 겹친 거예요. 파트너가 가던 길이 있는데 앞에서 비키지 않으니, 방향을 틀다가 중심이 무너져서 넘어졌어요. 그때 무릎으로 넘어지며 부상을 입었죠. 진짜 너무 아팠어요.”라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불행 중 다행히 양태화-이천군의 순서는 그 그룹의 마지막이었다. 무릎이 부어올랐지만, ‘어쨌든 이거는 이 악물고라도 나가야 한다’라는 코치의 말을 듣고 경기에 나섰다.
양태화는 “프리 댄스 음악이 빨라지다가 느려지다가, 마지막 1분에 다시 빨라졌는데, 빨라지는 음악을 시작할 때 너무 아파서 ‘악’하고 소리를 질렀어요.”라고 부상을 입고 출전한 경기를 상세히 이야기했다. 하지만 부상 투혼에도 불구하고 한 등수 차이로 출전권 획득에 실패한다. 양태화는 ‘아픈데 그때 하지 말걸, 어차피 안 되는데’라는 속상한 마음을 품다가도 이내 ‘아파도 포기 안 하고 했네. 그럼 됐지’라는 생각을 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하지만 간절함이 닿았던 것인지, 한 장의 올림픽 티켓이 결국 양태화-이천군에게 돌아왔다. 올림픽을 한 달여 앞두고 올림픽 출전권 2장을 획득한 독일이 자국 선수의 국적 문제로 출전권 1장을 포기한 것이다. 출전 예비 후보 1순위에 있던 양태화-이천군은 자연스럽게 올림픽 출전권을 획득했다.
그렇게 양태화-이천군은 2002년 한국 아이스댄스 최초로 동계 올림픽에 출전한다. 올림픽 준비 과정에서의 부상과 어려움을 극복하며, 자신의 한계를 끊임없이 도전한 결과였다. 올림픽에 대해 기억나는 것을 묻자, 양태화는 “오리지널 댄스할 때 제 날이 파트너 바지에 걸린 게 기억 나요. 그 옷을 입고 시합을 되게 많이 했었는데, 올림픽에서 하필 그런 일이 생겼죠. 어떻게 움직여도 날이 빠지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냥 힘 있게 당겼거든요. 바지가 찢어졌어요. 근데 둘 다 아무렇지도 않게 시합을 끝냈죠.”라며 아찔했던 당시 상황을 담담하게 말했다. 아쉬움이 남았던 올림픽을 뒤로 한 채, 양태화는 다음을 준비하고자 했다.
은퇴, 아이스댄스와의 잠시간의 이별
올림픽 전후로 양태화의 상태는 그리 좋지 않았다. 본인 커리어의 제일 정점이던 시기, 그녀의 심신 건강은 가장 바닥이었다.
신체적으로는 골든 스핀 오브 자그레브에서 입었던 무릎 부상이 계속 그녀를 괴롭혔다. 양태화는 당시 부상에 대해 “부상을 입고 한국에 들어와서 제대로 치료하지 못한 채, 다시 미국에 가서 훈련했어요. 그런데 거기서 치료하는 게 별것 없잖아요. 너무 비싸기도 하고 주변에서 챙겨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좀 쉬고 괜찮으면 다시 훈련하기를 반복했어요. 그러다 보니 관리가 제대로 안 됐죠. 그게 끝까지 괴롭혔어요.”라고 말했다.
마음도 질풍노도의 시기를 건너고 있었다. “지금 얘기하면 너무 창피한데요, 올림픽에 대한 준비보다는 그 상황들이 너무 힘들어서 ‘나 올림픽이고 뭐고 다 필요 없다’라고 그랬죠.”라고 이야기를 시작한 양태화는 “지금 생각하면 참 바보 같은 짓이라고 그럴거에요. 얘기하기에 너무 창피하지만, 그때는 그랬어요.”라며 당시 본인에 대해 부끄럽고 솔직한 마음을 내보였다. 한편으로, 양태화는 “그런데 그렇다고 ‘다시 그때로 돌아가면 잘할 수 있을 거 같아?’라고 하면 또 똑같을 것 같아요. 그때의 나고, 그때의 상황이 그랬죠. 만약에 그때로 돌아가면 내가 조언은 해줄 수 있겠지만, 주변 상황들을 봤을 때 ‘그만두지 않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것 만으로도 너는 다 했다’ 싶어요.”라고 그 당시의 상황을 담담히 전했다.
올림픽을 앞두고 양태화를 지지하고 응원해주던 어머니가 뇌출혈로 쓰러졌다. “올림픽 전 전주 4대륙 선수권 때, 엄마가 쓰러지셨어요. 대회 때 제가 신경을 쓸까 봐, 아무도 저한테 그 얘기를 안 해주셨죠.”라고 당시 상황을 조용히 이야기했다. 어머니는 딸인 양태화가 올림픽을 가는 것도 알지 못했다. 올림픽이 끝났고, 어머니는 깨어났지만, 일상적인 대화가 제대로 되는 상황은 아니었다.
파트너와의 관계도 점점 더 악화되었다. 올림픽과 일본에서 열린 세계 선수권 대회가 끝나고, 두 사람의 상황을 알던 류종현 코치는 ‘아시안 게임 때까지만 일단은 하라’며 두 사람을 어르고 달랬다. 그 시즌 아시아에서 가장 좋은 성적을 내고 있었기에, 다음 아시안 게임의 금메달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시즌이 끝나고 두 달여의 휴식기를 갖고 다시 운동에 복귀하리라 생각했지만, 그 휴식이 마지막이 될 줄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양태화의 선수 생활의 종점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어느 날 갑자기 같은 학교(한양대학교)에 다니던 파트너가 종적을 감췄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은퇴라는 거는 생각도 해보지 않았는데 그렇게 됐어요.”라고 이야기를 시작한 양태화는 “저는 기회가 또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제 파트너가 다른 파트너를 찾는다는 건 꿈에도 생각을 못 하고, 아시안 게임에 한 번 더 나가서 금메달을 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올림픽도 한 번 더 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은연 중에 했던 것 같아요.”라며 당시의 심경을 전했다. 뒤이어 양태화는 “그 입장에서는 제가 마음에 들지 않았겠죠. 서로 상처를 주는 말이 오가고, 저도 반발심이 생겼어요. 서로 쌍방이었던 것 같아요. 20살, 21살 아이들이 별거 아닌 자존심으로 그랬던 것 같아요.”라며 서로의 감정에 대해 덧붙였다.
마치 영화의 페이드 아웃과 같았다. 찬란했던 2002년, 그녀의 선수 생활도 스르륵 스러졌다.
아이스댄스도 그녀의 삶에서 자취를 감추는 듯했다. 2003년 월드가 끝나고 2010년 밴쿠버 올림픽이 끝나기까지, 편한 마음으로 아이스 댄스를 볼 수 없었다. “가끔 1~2등 한 선수들을 보면 ‘예쁘네, 잘하네.’ 하거나 ‘얘네가 올라왔네’ 정도였어요. 열심히 봐야겠다는 생각을 못 했죠.”
다시 아이스댄스, 심판을 위한 힘든 여정
은퇴한 그해 여름, 양태화는 대학생으로서 방학과 학기를 보내며 서브 코치로서 조심스럽게 얼음을 다시 밟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한국빙상연맹 직원으로부터 연락을 받는다. 아이스댄스 테크니컬 스페셜리스트(기술 심판)를 권하는 전화였다. 이때 양태화는 아이스댄스와 새로 만난다. 양태화는 국제 기술 심판 자격을 획득할 수 있는 최연소 나이인 24세에 시험을 통과하며 국제 심판을 획득했다. 심판이라는 관점에서 아이스댄스를 보게 된 것이다.
2002년 솔트레이크 동계 올림픽의 피겨스케이팅 판정 스캔들 이후, 피겨스케이팅에는 새로운 채점제가 도입된다. 기존의 기술/연기를 통틀어 채점하는 방식에서, 기술 점수와 연기 점수를 분리하는 방식으로 변경됐다. 기술 점수는 선수들이 선보인 기술 요소를 하나하나 나누어 레벨과 가산점을 메기는 방식으로 채점되었다. 이와 함께 ‘테크니컬 스페셜리스트’라고 일컬어지는 기술 심판이 탄생했는데 기술 심판은 선수들이 연기한 기술 요소의 정/합을 판단할 뿐만 아니라 난도를 평가한다. 기술 요소의 난도가 점수에 큰 영향을 끼치는 만큼, 판정에서 기술 심판의 중요도는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또 피겨스케이팅 심판은 담당할 수 있는 경기에 따라 국제 심판과 ISU 심판으로 나뉜다. 기술 심판의 경우 ISU 심판 자격을 획득해야 그랑프리 시리즈를 포함한 주요 국제 대회에 참여할 수 있다. ISU 심판은 국제 심판이 시험을 통해 그 자격을 획득할 수 있는데, 이때 일정한 심판 경력을 요구한다. 시험은 통과했지만, 문제는 경력이었다. 당시 한국 아이스댄스 팀이 전무하여 국내 대회가 열리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양태화는 심판 경력을 쌓을 수 없었다.
양태화는 “국내에 아이스댄스 시합이 없어서 공부하고 까먹고, 공부하고 까먹고 그랬어요. 꽤 긴 시간이었죠.”라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긴 시간 동안 아시안 게임만 참여하며 심판 자격을 유지하는 게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하지만 2012년 김레베카-키릴 미노프를 시작으로 이호정-감강인, 민유라-알렉산더 겜린 등 한국 아이스댄스 팀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양태화의 심판으로서의 커리어도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2013년부터는 국제 대회 경력을 쌓았고, 2015년에는 ISU 국제 기술 심판 자격을 획득했다. ISU 기술 심판이 되며 양태화는 올림픽과 세계 선수권을 비롯한 주요 피겨스케이팅 대회의 심판으로 활동하게 된다.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 2020년 사대륙 선수권, 2022년 유럽 선수권, 2023년 세계 선수권과 같은 굵직한 대회에서 참여하며 많은 경기의 기술 판정을 내렸다.
“매년 7월 1일, 독일에서 심판 세미나를 하며 룰을 정리하죠. 여러 룰이 실제 적용되면 어떨지, 어떤 경우의 수들이 있을지를 논의해요. 이때 시험을 보고 새로 기술 심판이 된 사람들은 이때, 그리고 기존 심판들은 시즌이 끝나면 ISU로부터 대회 리스트를 받아 출석 가능한 대회를 제출해요. 7월 중순~8월이 되면 각 심판들에게 어떤 대회를 가게 되는지 안내가 오게 됩니다.”
양태화의 심판 커리어는 여타와는 달랐다. 가장 큰 국제 대회인 올림픽을 시작으로 거슬러 내려오는 커리어를 갖게 되었다. 가장 최근에 참여한 챔피언십 대회는 주니어 세계 선수권으로, 사실상 대부분의 굵직한 대회에 심판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양태화는 “이제 모든 챔피언십에 나가 봐서 더 이상 챔피언십에서 부르지 않으면 어떡하나, 하는 약간의 불안이 있다”라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ISU 기술 심판이 된 지 8년이 됐고, 많은 국제 대회에 참여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대회는 2017년 네벨혼 트로피를 꼽았다. 한국 아이스댄스 대표였던 민유라-알렉산더 겜린이 2018년 평창 올림픽 티켓을 획득한 대회였다. 2002년 양태화-이천군에 이어 한국 아이스댄스 사상 두 번째 일이었고, 16년 만의 올림픽 출전이었다. 당시 기술 심판으로 대회에 참여한 양태화는 “점수가 나올 때쯤 되니까 울컥울컥하는데 티는 내면 안 되잖아요. 점수가 나오고 (민)유라가 너무 좋아서 기뻐하는데, 저도 기쁜데 티는 못 내고 그랬던 게 제일 기억에 남아요. ‘진짜 잘했다, 장하다’ 이런 기분이었어요.”라며, 7년이 지났음에도 벅차오르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양태화는 심판으로서 얻은 지식을 후배 아이스댄스 팀들에 나누고자 노력했다. 그녀는 후배 선수들에 대해 “저는 너무 고마웠어요. 이 선수들이 있기 때문에 심판을 할 수 있게 되었어요.”라고 감사함의 마음을 전하며 “그래서 제가 이 선수들 덕에 심판으로 얻은 지식을 다시 이 선수들에게 준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피드백 줬어요. 심판이 힘들게 되기는 했지만 그래서 더 보람도 있었어요.”라고 선배로서 가졌던 마음가짐을 말했다. 양태화는 심판이기 때문에 아이스댄스 팀에 대해 직접적인 지도나 레슨을 할 수는 없었지만, 본인이 직접 들어갔던 시합에 대해서는 많은 피드백을 해주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다.
뿐만 아니라 양태화는 아이스댄스로 습득한 스케이팅 기술을 싱글 피겨스케이팅을 타는 후배들에게도 전수하고 있다. 아이스댄스 심판으로 다양한 패턴 댄스를 계속 보다 보니 본인에게만 특화된 코칭 분야가 생겼고, 프리랜서 코치로 많은 선수들의 스텝과 스케이팅 스킬을 지도하고 있다. 그녀는 국가대표 선수부터 초급 선수들까지 많은 팀들을 돌아다니면서 주 7일을 바쁘게 보내고 있다.
“시즌이 새로 시작되면 안무가 나오잖아요. 거기서 스텝 시퀀스와 연결되는 상체 움직임 등을 같이 점검해 주고 있어요. 똑같은 턴이어도 선수들이 조금 더 편하게 들어갈 수 있는 방향들이 있거든요. 그런 턴들을 선수들이 편안하게 탈 수 있도록 봐주기도 해요. 그러다 보면 가끔 스텝의 모양이나 패턴이 바뀌는 경우도 있죠. 놓치기 쉬운 몸의 움직임도 같이 체크해요.”
양태화는 스텝 시퀀스를 전체적으로 코칭해주는 것 뿐만 아니라 부족하거나 어려워하는 스텝 요소들에 대해서 따로 연습하고 지도한다. 아이스댄스 심판이기 때문에 싱글과는 분명히 다를 수 있다며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한 양태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을 믿어주는 선수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넌지시 내비쳤다.
“싱글과 댄스의 룰이 다르기는 하지만, 턴은 아이스댄스에서 더 정확하게 보는 편이잖아요. 제가 아이스댄스 기술 심판이라 봐줄 수 있는 부분인 것 같아요. 제가 봐주고 국제 대회에 갔을 때 좋은 레벨을 받아오니까, 선수들도 거기에 수긍하고 ‘선생님 저 이거 잘한 것 같아요. 근데 레벨이 왜 안 나왔을까요?’라든가 ‘선생님 이게 좀 안 되는데 봐주세요’하는 부분도 생겨요. 그래서 이제 대표 선수들은 거의 체크를 해주고 있어요.”라는 양태화의 말처럼 실제 코칭을 받는 한 국가대표 선수는 ‘양태화 코치님에게 지도를 받으며 스텝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라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
한국 아이스댄스의 부흥을 꿈꾸며
한국에는 아직 아이스댄스 팀이 많지 않다. 시니어에 1팀, 주니어에는 2~3팀 정도가 전부다. 그나마도 결성된 팀의 유지 기간이 길지 않은 편이다. 과거 평창 올림픽을 대비하여 대한빙상경기연맹 주최로 2번의 아이스댄스 육성 테스트도 진행했으나 해당 테스트에 참여한 팀 중 평창 동계 올림픽까지 유지된 팀은 단 한 팀도 없었다. 한국에서 특히 아이스댄스 팀 유지가 어려운 것인지 묻는 말에 대해 양태화는 “전 세계적으로도 팀 유지는 어려운데, 우리나라는 시스템적으로도 어려워요.”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양태화는 “아이스댄스를 키우기 위해서, 필요한 거는 첫째로 팀이 있어야 하고, 아이스댄스 코치/안무가를 비롯한 전문가들이 있어야 하고, 얼음이 있어야 하고, 동료가 있어야 하거든요. 그런데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다 보니까 팀을 키우기가 쉽지 않아요.”라고 설명하며, “한 번 아이스댄스를 맛보면 재밌고 신나고, 너무 좋은 걸 아는데, 그게 안 되니까 아쉬워요. 아이스댄스를 보면 빠질 수밖에 없어요. 그다음에 직접 해보면 또 다르죠. 파트너와 홀드를 하면 또 다른 세계가 열려요. 매력이 참 많은 종목인데, 어떻게 설명이 어렵고 그거를 퍼뜨리질 못하니까 너무 속상하더라고요.”라고 덧붙였다.
그런 아쉬움 때문인지, 양태화는 한국에서 아이스댄스와 관련된 여러 가지 일들을 시도했고 계속 시도하고 있다.
2011년 SBS에서 방영된 예능 ‘김연아의 키스앤크라이’에도 참여했다. 해당 프로그램에서는 피겨스케이팅 코치/선수와 연예인이 팀을 이뤄, 피겨스케이팅 기술을 배우고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선보이며 경연을 펼친다. 일부 페어스케이팅을 하는 팀이 있었지만, 대부분 팀은 다양한 아이스댄스 스킬을 선보이며 아이스댄스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양태화는 디렉터로 참여하며 출연자들에게 스케이팅을 가르치고 안무를 만들었다. 프로그램 기획부터 함께한 것은 아니었지만 고성희 심판의 추천으로 기획이 완료된 후 함께 하게 되었다. 양태화는 프로그램을 통해 “피겨스케이팅을 김연아가 널리 알렸지만, 혼성팀은 아직 모르니까 알리고 싶었어요.”라는 목표를 가졌다. 하지만 스케이터-연예인-작가들의 삼각관계 속에 기본적인 것만 수행하기에도 너무 바쁜 시간을 보냈다. ‘무사히 잘 끝내자’로 목표를 수정하고 무사히 프로그램을 마치기까지 위해 노력했다. 마지막에는 김병만의 요청으로 함께 아이스쇼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양태화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아이스댄스 동호회를 지도하고 있다. 네이버 카페에서 시작된 ‘아이스댄싱 클럽’은 2012년 6월 창단하여 50-60여 명의 회원을 보유하고 있는 국내 유일의 아이스댄싱 동호회다. 처음에는 류종현 코치가 함께했으나 몇 년 전부터 양태화 코치가 함께하고 있다. 양태화는 ‘아이스댄스를 어떻게든 퍼뜨리겠다’는 나름의 사명감으로 동호회를 지도하고 있다. “한국 시스템상 선수를 키울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니, 우리 동호인들한테 내가 가지고 있는 거, 알려줄 수 있는 거 다 알려주고 이들한테 댄스를 퍼뜨리게끔 서로 한번 해보자”라고 생각한 양태화는 아이스댄스 동호회를 체계적으로 운영하고자 했다. 아이스링크 대관도 정기적으로 운영하고, 아이스댄스만의 승급 테스트도 도입했다. 클럽 내에서 운영되는 이 승급 제도는, ISU 심판을 초빙해 운영하고 있다. 또한 일본이나 독일에서 열리는 성인 국제 시합에 대한 출전을 목표로 훈련하고 있다. 양태화는 “회원들이랑 계속 이야기하는 게 있어요. 우리가 나이 먹어서도 (아이스댄스를) 편안하게 즐기고, 우리 자손들도 아이스댄스를 좀 할 수 있게 하자고요. 그러다가 선수가 나오면 너무 좋고요.”라며 아이스댄스 동호회를 통해 여기저기 뿌리고 있는 한국에서의 아이스댄스 전파를 위한 작은 씨앗들을 즐겁게 이야기했다.
양태화는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아이스댄스의 저변 확대 뿐만 아니라, 국제 대회에 출전 중인 한국 아이스댄스 팀들에 대해 많은 관심을 두고 있다. 그녀는 현재 시니어 무대에서 유일하게 활동 중인 임해나&예콴 조에 대해 많은 장점을 칭찬했다. “해나랑 콴 선수 시합이 끝나면요, 문자를 항상 받아요. 누군가의 외국 심판으로부터 ‘너희 나라에 이렇게 괜찮은 팀이 있더라. 정말 잘하더라’라고. 그럼 전 너무 뿌듯하고 그 얘기를 (해나와 예콴에게) 꼭 해주죠. 너무 잘하고 있어요.”라고 시작한 칭찬은 “해나 선수는 머리카락 끝부터 발가락 끝까지 타고난 느낌이에요. 죽음의 무도를 할 때는 죽음의 여신 같았고, 쉘부르의 우산 안에서는 비련의 여주인공 같았죠. 근데 해나 선수가 그렇게 잘할 수 있는 건 예콴 선수가 든든하게 받쳐주는 거라서, 그 둘의 호흡이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건 서로에 대한 믿음에서부터 비롯된다고 생각해요.”라고 이어졌다. 그러는 한편, “앞으로 시즌이 가면 갈수록 힘든 일이 많을 거예요. 단시간에 높은 자리까지 올라왔거든요. 그런데 시니어는 또 다른 무대라, 매년 같은 크기만큼 올라갈 수 없어요. 만약 올해 10계단을 올라왔다 치면 그다음 해에는 10계단을 올라갈 수 없어요. 한 계단이라도 올라갈 수 있으면 성공인 건데, 그게 본인들이 만족하지 못할 수도 있고 팬들도 만족하지 못할 수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미 너무 잘해주고 있기 때문에 그 마음으로 꾸준히만 해줬으면 좋겠어요. 깨지지만 않으면 돼요. 슬럼프가 와도 깨지지만 않으면 극복할 수 있을 거예요.”라며 긴 시간을 둔 관심을 당부하며 응원의 마음을 전했다.
아이스댄스의 미래, Back to Basic
아이스댄스에 관심이 생긴 사람들에게 추천해 주고 싶은 팀이나 프로그램을 묻자, 양태화는 다양한 팀과 프로그램을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전설적인 프로그램 ‘볼레로’를 선보인 토빌&딘부터 클리모바&포노마렌코, 아니시나&페제라 들로벨&쉔펠더, 돔니나&샤발린 등 다양한 팀들을 꼽았다. 전체적으로 북미 팀보다는 유럽/러시아 팀들을 선호하는 것 같다고 이야기 하자 “제가 그렇게 배워서 그런 걸 수도 있기는 해요. 북미 팀들의 쇼적인 재미가 있는 아이스댄스가 보는 재미가 확실히 있어요. 그렇지만 제가 생각하는 ‘아이스댄스야’라는 느낌은 덜한 것 같아요. 물론 대중적으로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들도 좋아해요. 하지만 제가 구시대 사람이라 그런 거일 수도 있지만, 아이스댄스에 깊이 빠져들어서 보다 보면 아무래도 정통성을 따라가려고 하는 쪽이 눈에 더 띄지 않나 그런 생각이 있어요. 엣지의 깊이나 스케이팅의 미끄러짐 정도 같은 거요.”라고 답했다.
아이스댄스는 싱글보다 더 많이 룰이 개정된 종목이다. 예전에는 경기에서 컴퍼서리 댄스를 2개 소화해야 했지만 1개로 줄어들더니 아예 종목이 폐지되었다. 대신 패턴 댄스가 리듬 댄스로 포함되었는데, 프로그램 내에 그 비중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상황이다. 전반적으로 스케이팅 스킬과 엣지 활용, 심지어 파트너와 함께 손을 잡고 움직이는 홀드 비중도 굉장히 많이 줄어들고 있다. 현재의 채점 트렌드는 양태화가 이야기하는 정통성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대중에게 어필 할 수 있는 ‘쇼 적인 컨셉’과 ‘연기’, 트위즐/리프트/스핀 등 ‘주요 기술’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듯 보인다. 이에 관해 묻자 “맞아요. 하지만 심판들끼리 얘기를 하면 가끔 그런 이야기를 해요. ‘스피드가 중요하긴 한데 스피드가 다가 아니잖아, 댄스를 안 하잖아.’라고요. 이번에 주니어 월드에 가서도 저희끼리 이야기를 했어요. ‘어떤 팀은 어려운 홀드도 하고 어려운 턴도 잘했는데 왜 이 점수 밖에 안 나왔을까?’라는 이야기요.”라며 “점점 관중 친화적으로 점수의 방향이 바뀌고 있지만. 그것에 회의를 느끼는 심판과 코치들도 많은 것 같아요. 그래서 ‘언젠가는 다시 (이전으로) 돌아오지 않을까?’라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 아이스댄스라는 종목이 없어질지 모른다는 루머가 있어서 위축되는 부분들이 있기도 해요.”라고 솔직한 심정을 전했다. 하지만 양태화는 그렇기 때문에 ‘더 옛날로 돌아가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예전의 방식으로도 충분히 종목의 매력을 뽐낼 수 있다고 믿고 있다.
한편으로, ISU에 신설된 솔로 댄스에 대해서는 좋은 방향이라며 동의했다. 스케이트는 좋아하지만 치열한 경쟁이나 부상 때문에 점프를 못 뛰는 선수들이 은퇴하지 않고 선수 생활을 더 길게 할 수 있고, 아이스댄스를 해보고 싶지만 파트너가 없어서 시도도 할 수 없는 선수들이 도전해 볼 수도 있을 거라고. 양태화는 솔로 댄스가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흘러갈지는 잘 모르겠지만, 피겨스케이팅 종목의 발전을 위한 방향으로 흘러가길 바란다며, “너네는 싱글이니까, 너네는 댄스니까 하며 나누지 말고 피겨스케이팅 발전에 기여하고 선수들이 스케이트를 관두지 않고 꾸준히 탈 수 있고, 팀을 이루고 싶은 선수들은 파트너를 찾을 수 있는 이런 방향으로 갈 수 있으면 좋겠어요.”라며 작은 바람을 표했다.
2007년 3월, 김연아가 시니어 세계선수권에 혜성처럼 등장한다. 그녀는 2014년 은퇴하기까지 전 세계 무대를 제패하며 피겨 여왕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녀의 모든 발자취는 기록이 되었다. 국외로는 한국 피겨스케이팅의 위상을 드높였고, 국내로는 피겨스케이팅의 입지를 넓혔다. 많은 소녀/소년들이 김연아 키즈를 꿈꾸며 빙상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김연아로 인해 관심을 받기 시작하며 ‘봄’을 맞이한 피겨스케이팅 싱글 종목과 달리, 혼성 종목은 여전히 ‘겨울’이었다.
한국 아이스댄스는 1960년대부터 그 명맥이 이어졌으나, 2000년대 중반부터 10여 년 간 공백 상태였다.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을 앞두고서야, 하나둘 아이스댄스 팀이 결성될 정도였다. 여러 팀들이 결성되고 사라지는 동안, 간신히 살아난 한국 아이스댄스의 불씨가 꺼지지 않도록 불철주야 힘쓴 것이 바로 양태화였다. 긴 시간 양태화와 아이스댄스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그녀가 아이스댄스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아이스댄스 그 자체에 완벽히 매료되어 보였다. 한편으로, 그 좋은 것들을 여러 사람에게 나누고 싶어 하는 전도사이기도 했다.
“나중에 누군가 날 기억해 줬을 때, ‘쟤 진짜 스케이트 좋아하는 애야. 아이스댄스 진짜 좋아하는 애야’라고 기억해 주면, 제 삶은 성공한 삶이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해요.”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웃는 양태화를 보며, 이미 그녀의 삶은 성공하지 않았나는 생각이 들었다. 올해 초 스케이트와 삶을 분리하자는 계획을 세운 이유조차, 삶이 스케이트 빼고는 없어서였다. 그렇지만 “억지로 분리하려고 하니까 더 안되는 것 같다”라며 “그냥 이게 내 삶이면 나는 이게(아이스댄스) 좋은 내 삶을 살아야죠. 열심히.”라며 웃음 짓는 양태화. 그녀가 삶이라는 숙명으로 곳곳에 뿌린 씨앗이 꽃으로 만개할 날을 고대한다.
기획 김현진 박지민 이민정
인터뷰 진행 김현진 박지민
촬영 및 사진 편집 박지민
영상 편집 이민정
검수 박지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