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국가대표 최연소, 세계선수권 프리스케이팅 3위, 22/23 시즌 한국 여자 선수 국제대회 점수 평균 1위.
강아지 집사, 수리고등학교 2학년, 아직 만 16세, ISFJ.
“피겨스케이팅 국가대표 김채연입니다.”라고 말하는 얼굴에 수줍음이 가득했다. 선수로서는 당차지만, 빙판 밖에서는 여리기만 한 상반되는 키워드의 주인공. 혜성같이 부상한 스케이터 김채연을 만났다.
비결은… Just Do It!
“4학년 겨울에 학교에서 스케이트장으로 단체 강습을 갔다가 재밌어서 취미로 시작했어요. 취미로 좀 하던 중에 가르쳐주신 선생님께서 조금 선수 해보면 어떻겠냐고 하셔서, 선수 반은 5학년 때쯤 시작했어요.”
피겨스케이팅 선수는 만 12세에 국제빙상연맹(International Skating Union, 이하 ‘ISU’) 주관 국제 주니어 데뷔 자격이 주어진다. 일반적으로 만 5세에서 7세 사이에 선수 생활을 시작하는, 연령대가 낮은 종목이다. 만 10세에 시작한 김채연이 무서운 신예인 이유는 바로 놀라운 기본기다. 늦은 입문에도 불구하고 김채연은 국제적으로도 러츠와 플립을 정확하게 구분해서 뛰는 손에 꼽히는 선수이다. ‘교과서’로 불리는 점프뿐만 아니라 우수한 스케이팅 스킬, 유연한 스핀까지 갖춘 ‘정육각형’ 선수이다. 그녀가 밝힌 점프와 비점프 요소 간 밸런스의 비결은 ‘그냥, 될 때까지’ 하는 꾸준함과 노력이었다.
“어릴 때 그냥 놀면서 탔어요. 거의 매일 가서 계속 밀고 다녔더니 그런 것 같아요.”
중학교 1학년, 김채연에게 처음 찾아온 부상 역시 이런 꾸준함으로 극복했다. 어머니께서 피겨스케이팅을 그만두는 것을 권유했고, 점프가 잘 풀리지 않을 때는 자신도 ‘이번엔 진짜 그만둔다’며 장문의 문자를 보내기까지 했다. 하지만 김채연은 ‘될 때까지’의 정신으로 다섯 종류의 트리플 점프를 마스터했다.
“발목 인대가 많이 늘어나서, 점프 뛸 때 아팠어요. 점프를 조금 무서워하게 됐는데, 그때 엄마가 ‘점프가 무서우면 안 하는 게 낫지 않겠냐?’고 했어요. 그래서 진짜 그만둘까 했는데 막상 그만두면 너무 미련이 남을 것 같아서…. 한번 ‘안 무섭게, 극복할 수 있게 해보자!’ 했어요. ‘이거 지금 안 뛰고 그냥 가면 그만둔다.’, 이런 마음으로요.”
김채연은 피겨스케이팅을 시작한 지 4년이 된 2021년 3월에 국가대표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가히 괄목할 만한 성과였다. 본인에게도 놀라웠다는 국가대표 선발. 김채연에게 국가대표가 갖는 의미와 발탁 당시 소감에 관해 물었다.
“처음에 국가대표 됐을 때 안 믿겼던 것 같아요. 아예 생각을 안 하고 대회를 해서, ‘진짜 국가대표라고?’ 약간 이랬던 것 같아요. 처음 태릉에서 훈련했을 때도, 처음에 시작했을 때 보던 언니들이랑 같이 타서 좀 많이 떨렸던 것 같아요. 저에게 국가대표란 아무래도 이루고 싶었던 첫 목표였어요. 다음 목표는 올림픽 출전입니다.”
첫 국제 무대, 첫 시니어 데뷔
김채연은 2006년 12월 8일생으로, 2020/2021 시즌부터 ISU 주관 주니어 대회에 출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전 세계 주니어 대회가 무산된 상황. 아쉬움을 뒤로하고 맞은 2021/2022 시즌, 김채연은 첫 주니어 데뷔에서 당당하게 단상에 오른다. 완벽한 연기로 191.46점을 받아 은메달을 획득했고, 당시 부상으로 받은 와인 디캔터는 화병으로 쓰고 있다는 후일담도 전했다.
“솔직히 그때도 안 믿기긴 했는데 그래도 기분은 되게 좋았어요. 처음 쇼트 (프로그램) 때 아침 공식 연습을 하는데, 다들 너무 잘하는 거예요. 그래서 ‘연습했던 대로만 했으면 좋겠다.’ 하고 들어가서 점프를 다 뛰었는데 생각보다 좋은 결과가 좋은 점수가 나와서 놀랐어요. ‘앞으로 더 열심히 해서 더 많이 올라갔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했어요.”
김채연의 바람은 이루어졌다. 2022/2023 시즌은 훨씬 더 많이 포디움에 오른 것이다. 주니어 그랑프리 선발전을 시작으로 12번의 대회에 출전하며, 10개의 메달을 획득했다. 챔피언십 스몰 메달을 합치면, 참가한 모든 대회에서 메달을 획득한 셈이다.
김채연의 정신력과 체력이 특히 돋보인 것은 주니어 그랑프리와 시니어 무대를 오가던 9월 말부터 10월 초. 3주 동안 주니어 그랑프리 5차와 7차, 그 사이 챌린저 시리즈를 연달아 참가하여 주니어와 시니어를 오갔다. 첫 시니어 무대였던 2022 ISU 챌린저 시리즈 핀란디아 트로피에서는 처음으로 총점 200점을 돌파했다. 이에 대해 “전략적인 것은 아니었다”라고 밝혔다.
“아무래도 잘하는 일본 선수들을 피해 가려고 조금 늦게 갔던 것도 있고…. 챌린저 대회도 하나 나갔어요. 그 기간을 맞추느라 대회를 후반에 배치한 것도 있었어요. 프리 스케이팅은 코레오그래픽 시퀀스나 스텝시퀀스의 차이는 있지만, 점프 중간에 없고 둘 다 마지막에 있어서 그나마 조금 덜 헷갈렸던 것 같긴 해요. 가끔 연습하다가 코레오 해야 하는데 스텝 하는 경우도 있고(웃음).”
“100점 만점에 50점”
김채연에게 지난 시즌은 유독 길었다. 7월 말에 막을 올리고, 4월까지 8월을 제외한 모든 달에 한 회 이상의 대회에 참가했다. 12번의 대회 중 실수는 단 세 번. 놀라운 안정감에 관해 묻자 “들어가기 전까지 되게 긴장한다”라며 웃었다. 웜업 후에는 긴장을 덜지만, 아직 큰 대회에서는 조금 떨린다고. 그래서인지 긴장을 했던 2023 사대륙선수권 대회에 대해서는 자신에게 ‘한 50점’이라는 엄격한 점수를 주기도 했다.
“아무래도 쇼트 프로그램 때는 그냥 하던 거 하려고 해서 결과가 좋았어요. 프리 스케이팅 때 좀 욕심도 내고 좀 긴장도 해서 실수가 있었던 것 같아서.”
앞서 김채연은 시즌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대회로 이 대회를 꼽기도 했다. 이유는 ‘아쉬워서’. 김채연의 욕심과 투지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그 대회를 발판으로 김채연은 더욱 스케이트 날을 날카롭게 갈았다. 사대륙선수권과 동계체육대회, 그리고 세계선수권 사이 새로운 프리 스케이팅 안무를 준비하기도 했다. 아쉽게도 쇼트 프로그램 때 자신 있던 콤비네이션 점프에서 실수가 나오자, 최후 반 트리플 플립에 트리플 토루프를 붙이는 근성까지 보였다. 김채연의 놀라운 기지와 순발력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솔직히 사대륙 끝나고, 그 프로그램을 짜주신 신예지 선생님께서 조금 힘들어 보인다고 하나를 더 짜주셨어요. 두 개 다 연습해 보고 조금 더 괜찮은 걸로 하면 된다고. 하나 더 짜주신 게 체력적으로 조금 덜 힘들었던 것 같아서, 그걸로 하게 됐어요. 그러다 보니까 마지막에 갑자기 시간이 너무 많이 남는 거예요. 마지막 동작은 즉석에서 (만들었어요.)”
새로운 시즌, 새로운 시도
김채연의 어머니는 김채연은 “규칙적이고 자기 루틴이 있는 아이”라고 칭했다. 4월 초, 종별선수권이 끝난 직후 김채연은 새로운 계획에 도입했다. 자신의 주요 작품을 만든 안무가 신예지와 쇼트 프로그램을, 세계적인 안무가 브누와 리쇼 함께 프리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쇼트 프로그램은 약간 현대무용 같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던 장르예요. 아무래도 아직 많이 부족한데, 그래도 예지 선생님께서 좋게 짜주셔서 열심히 해서 꼭 소화해 냈으면 좋겠어요.
프리 프로그램은, 안무가 선생님 SNS에 올라온 음악은 아니고, 프랑스 영화 OST예요. 처음엔 서정적인 줄 알았지만, 서정적까지는 아니고. 다크한 것 같아요. 오셔서 보여주시는데 되게 크시고 빠르셔서, 최대한 크게 하려고 노력을 더 해야 할 것 같아요. 아무래도 영어로 계속 설명해 주셔서 머리가 조금 아팠던 것 같아요(웃음).”
김채연에게 해외 안무가는 이번이 두 번째다. 2021/2022 시즌 직후 김연아의 선수 시절 안무가였던 데이비드 윌슨과 함께한 바 있다. 하지만 당시 코로나19로 국경을 넘지 못해 화상회의로 안무를 전달받았다. 해당 프로그램은 올림픽 챔피언 타라 리핀스키도 사용했던 <The Rainbow>. 단 한 번의 시연 후 신예지 안무가와 함께한 저스티스 리그 OST <Everybody Knows>로 교체했다. 함께하는 지현정 코치의 조언이었다. “짜주신 거에 비해 약간 안 나왔다”라는 의견이었다. 이해인 등 국제적으로 성공한 국가대표를 배출한 지현정 코치는 의상과 같이 세심한 부분에도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고 김채연 선수의 어머니는 전했다.
“(의상은) 지현정 선생님의 컨펌이에요. 반쯤은 지현정 코치님이 ‘이랬으면 좋겠어.’라고 의견을 주시면 그렇게 하고 있어요.”
김채연의 어머니는 직접 딸을 위해 의상을 만들고 있다. “관련 직종은 아니다.”며 손사래 치면서도, 갓 시작한 초급 때를 제외하면 모든 의상을 가내수공업으로 만든다. 가정용 재봉틀로 재봉하고, 직접 단 비즈 한 땀 한 땀에 딸에 대한 사랑을 가득 담았다. 직접 치수를 재고, 불편한 점이 있을 때는 바로 수선한다. 김채연은 엄마표 의상에 대해 “독창적이고, 예뻐 보여서 좋아요”라며 웃었다.
새로운 장르, 새로운 안무가와 함께 김채연의 다음 시즌이 기대되는 또 다른 이유는 바로 기술이다. 여자 싱글, 남자 싱글 할 것 없이 4회전 점프와 3회전 악셀을 시도하고 있다. 김채연은 바야흐로 도래한 ‘고난도 시대’에 발맞춰 새로운 기술을 연마하고 있다. 지난 2022년 4월, 하네스로 4회전 점프를 연습하는 영상이 SNS에 게재되기도 했다. 3월 세계선수권 귀국 인터뷰에서도 고난도 점프에 대한 의지를 밝혔다.
“지금 하네스로 트리플 악셀이랑 쿼드러플 토루프를 연습하고 있어요. 아직 토루프에 비해 더블 악셀을 좀 못 뛰어서…. 더블 악셀 높이를 조금 더 만들려고 해요. 더블 악셀을 조금 더 잘 뛰어야 조금 쉽게 (다음 단계로)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뚱했던 그녀에게 찾아온 새로운 우주
김채연에게는 뚱이와 우주라는 두 반려견이 있다. “엄마 아빠랑 남동생 한 명 있고, 그리고 강아지 두 마리.”라고 가족 구성원을 밝히는 얼굴에 웃음기가 가득했다. 반려견을 위한 인스타그램 계정을 운영하고, 명랑하게 이야기하는 모습이 영락없는 고등학생이었다. 김채연에게 뚱이와 우주는 엘리트 체육을 시작한 이후 생긴 학교생활 공백의 아쉬움을 메워주는, 친구이자 가족이었다.
“뚱이랑은 중학교 때, 좀 힘들 때 만났어요. 우주는 지현정 코치님께 받았어요. 코치님네 강아지가 낳은 네 마리 중의 막내였는데요. 우주가 아직 어려서 조금 천방지축이에요. 아무래도 좀 속상할 때 와서 꼬리 쳐주고, 핥아주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아요. 산책하러 가고, 공도 던져주고.”
작은 키, 큰 꿈
김채연은 지난 1년간 크게 성장했다. 정량적인 점수뿐만이 아니다. 키도, 시니어 선수로서 마음가짐도 지금까지 선수 생활 중 가장 많이 성숙해졌다. ‘지금은 부족하지만, 언젠가 성숙해졌을 때 <쉰들러 리스트> 같은 유명 영화 OST를 하고 싶다’라고 눈을 반짝이는 김채연에게서, 그가 그리고 있는 무궁무진하고 유망한 미래를 볼 수 있었다.
다른 선수보다 느리게 피겨스케이팅과 만났지만, 차근차근 성장하고 있는 김채연. 이번 시즌 눈부신 성적의 원동력은 마음가짐이었다. 부상에 이어진 슬럼프 이후 “앞으로는 행복하게 스케이트를 타고 싶다”라는 마음으로 임했다고. 즐기는 사람은 이길 수 없다고 했던가. 즐기는 마음에 노력까지 곁들인 김채연의 행복한 스케이팅이 계속되기를, 마음을 담아 응원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