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은 학교에 가고 학원에 가잖아요. 반대로 저는 링크장이 거의 메인이고 지상 훈련이 약간 학원 같은 시스템이라서, 거의 집이 아이스링크라고 할 정도로 링크장에 있는 시간이 좀 더 많은 것 같아요. 운동선수로서의 삶이 사실 좀 힘들기도 하지만, 어쩌면 저의 일상이기도 해서 링크장 생활이 좀 더 편하고 익숙하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윤아선의 하루에는 피겨스케이팅이 가득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음악을 듣는다는 취미 역시, 앞으로 사용할 만한 음악을 찾기 위해서다. 평소에는 프로그램 음악을 들으며 자신만의 해석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지난 시즌 쇼트프로그램 <Circles>에서는 가사의 메시지에 더해, “꽃이 피어나는 느낌, 점점 움직임이 커지는 느낌”을 전달하기 위해 끊임 없이 이미지 트레이닝을 했다고. 스스로를 되돌아보며 보완점을 찾고, 또 생각한다.
아람쥐(아선+다람쥐)라는 귀여운 별명 뒤에 숨어 있는 이 사유의 바탕이 궁금했다. 만 16세, 고등학교 1학년. 강아지 호두를 포함한 두 여동생을 가진 언니.
윤아선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될성부른 떡잎,
윤아선
7살 때 롯데월드에서 처음 스케이트를 신은 윤아선은 금세 운동에 흥미를 붙였다. 2년 뒤 정성일 코치와 함께 본격적으로 선수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더블 악셀까지만 뛰자’던 윤아선은 곧 삼회전 점프를 성공하고, 처음으로 다음 단계를 꿈꾸기 시작한다. 피겨스케이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 꼭 4년 만이었다.
“더블 악셀이라는 2회전 반 점프가 좀 오래 걸렸고, 그 이후로 트리플 점프는 자연스럽게 한 번에 나왔어요. 그러면서 좀 더 목표가 생겼던 것 같아요.“
올림픽이라는 꿈이 생긴 윤아선은 더욱 부지런히 달렸다. 코로나19로 인해 수도권 아이스링크 대부분이 폐쇄된 상황에서도, 열려있는 훈련장을 찾아 포항과 강릉까지 먼 길을 오갔다. 이 인고의 시간을 거친 후, 윤아선은 최고의 시즌을 맞는다. 2021년 2월 마침내 개최된 종합선수권에서 시니어 부문 2위, 3월 회장배 랭킹대회에서 3위에 올랐다. 국제 주니어 무대 데뷔는 무산되었지만, 처음 국가대표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사실 주니어 데뷔를 해야 하는 시즌이었는데, 아쉬움이 좀 크기도 했던 것 같아요. 한편으로 더 단단히 마음가짐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됐던 것 같고, 랭킹 종합을 좀 더 집중해서 잘하면 원하던 목표를 이룰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대회를 준비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세계선수권이나 사대륙선수권이 순위는 됐지만, 나이가 안 돼서 나갈 수 있는 대회가 없었어요. 그래서 오히려 좀 더 마음이 편했던 것 같아요. 저한테 걸린 큰 대회가 없으니까, 마음 편하게 준비했던 거 잘 보여주면 좋은 결과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윤아선이 처음으로 입상한 국가대표 선발 대회였지만, 본인의 은메달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다고. 윤아선이 본인의 수상 소식을 들었을 때는 참가자이자 도전자로서, 관중석에서 ‘언니들’의 경기를 지켜봤을 때였다.
“언니들이 어떻게 웜업하는지, 어떻게 프로그램 잘 풀어나가는지, 안무에서 주는 스토리가 어떻게 전해지는지, 이런 거를 보고, 느끼고 있었어요. 준비하는 동안 되게 힘들기도 해서, 클린을 하긴 했지만 준비하는 동안 되게 힘들기도 해서, 그냥 기분 좋은 마음으로 ‘이제 집에 가야겠다. 이제 좀 잠깐 쉴 수 있겠다. 2, 3주 뒤에 랭킹이니까, 또 잘 준비해서 해봐야겠다.’ 했는데 빨리 오라고 하신 거죠. 당황했거든요. 집에 가야지 했는데, 2등을 했다고 소식을 들은 거예요. 잘하는 언니들이 많았고, 위에서 (언니들의 경기를) 보면서 느낀 점도 되게 많았어요. 그런데 마지막에 2위라는 등수에 제 이름이 있는 거죠. 그래서 그때 인터뷰에서도 많이 당황했던 걸로 기억해요. 언니들은 다 예상하고 있었지만, 저는 예상치 못한 순위이기도 해서 인터뷰 질문을 해 주시는데 머리가 멍해지고 그랬던 것 같아요.“
악바리 다람쥐의
첫 국제 대회
오랜 기다림 끝에 나선 2021년 주니어 그랑프리 프랑스 대회는 윤아선의 첫 국제 무대였다. 노비스부터 간헐적으로 국제 무대에 나서며 대회에 익숙해지는 여타 선수들과는 사뭇 달랐다. 더군다나 그의 첫 대회는 해발고도 1,000m 이상의 고산지대로 윤아선은 2개의 대회를 2주에 걸쳐 같은 경기장에서 연달아 치뤄냈다. 기대했던 경기였지만, 목표치에는 이르지 못했다. 어머니 박수진 씨는 당시에 대해 아쉬움을 표했다.
“저희가 고산지대에 대한 정보가 너무 없었어요. 아선이가 처음 얘기했던 게, ‘엄마, 점프 뛰는데 밑에서 누가 끌어가는 것 같아요. 모래주머니를 달고 뛰는 것 같아요.’라고 하는 거예요. 내려오면 호흡이 안 되고. 끝나고는 악플도 받았어요. 헤엄쳐 와라, 이런 메시지요. 너무 놀랐어요. 그때는 갔다 오면 2주 자가격리여서, 당시에는 핸드폰도 좀 자제시키고 완전 패닉이었어요.”
당시 윤아선의 나이는 고작 중학교 2학년, 만 14세. 아쉬움을 뒤로하고 윤아선은 이를 악물었다. 12월 랭킹 대회와 종합선수권을 향해 또다시 구슬땀을 흘렸다. ‘주니어 그랑프리는 끝났지만, 이 운동이 끝나는 것 자체는 아니니까’라는 마인드 셋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우여곡절 끝에 출전하게 된 주니어 세계선수권에서는 쇼트 프로그램 3위에 오르며 직전 시즌에 국제 무대에서 보여주지 못한 아쉬움을 완벽하게 떨쳐냈다. 프리스케이팅에서도 완벽하게 무결점 경기를 펼쳤다.
준비하면서 부상이 좀 많았어요. 주니어 세계선수권에 갔는데, 공식 연습을 하다가 어깨가 살짝 탈골된 거예요. 저한테 좋은 기회여서, 포기하기에는 너무 아쉬웠어요. 또 이런 기회가 많이 없을 것 같으니까. 주니어 그랑프리 이후에 첫 해외 시합이었으니까 더 잘해보고 싶은 마음에 참고 해 봤어요. 그래도 생각보다 좋은 결과가 있어서 만족했던 것 같아요. 약간 부상이 있었음에도 쇼트를 잘 끝내서 스몰 메달을 받고. 프리에서는 최종적으로 메달을 따지 못했지만 그래도 저로서는 최선을 다해서 클린 연기를 보여줄 수 있어서 좋았던 것 같아요.”
우여곡절 많은
시니어 막내
파죽지세로 성장하던 윤아선이었지만, 관중의 환호에 대한 면역이 없었다. 2019년 처음 참가한 회장배 랭킹대회에서 박수 소리에 크게 당황했다던 그는, 곧 기나긴 무관중의 시간을 보낸다. 팬데믹이 피크에 달했던 2021년 주니어 그랑프리 선발전은 심판조차 입장하지 못한 완벽한 비대면 시합이었다. 그래서일까, 지난 10월 데뷔한 시니어 그랑프리 대회에 대한 윤아선의 첫인상은 ‘관중’이었다.
“스케이트 아메리카는 어쩌면 저한테는 잊지 못할 대회이기도 해요. 시니어 그랑프리가 달랐던 점은 관중들이 많았던 거였어요. 쇼트 프로그램에서 실수가 있었지만 그래도 프리 때 잘 만회해 보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음악도 더 많이 들으면서 저한테 집중을 좀 더 했던 것 같아요. 관객들의 호응 속에서 많은 사람이 저를 봤을 때 긴장한 모습보다 즐기는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대회에 임했던 것 같고, 실수해도 어쩔 수 없는 거니까 그 순간만큼은 즐기다 오자, 라는 생각이 컸던 것 같아요.”
시니어 1년 차 윤아선에게 지난 한 해는 혹독한 시즌이었다. 고관절 파열로 진천선수촌을 조기 퇴소해야 했다. 시즌 첫 대회였던 네벨혼 트로피에서는 공식 연습 때 타 선수와 부딪혀 뇌진탕 증세를 보였다. 스핀을 하며 구토 증세를 보일 정도였다. 어쩔 수 없이 준비했던 시니어 데뷔를 포기해야 했다. 종합선수권에서는 간발의 차이로 국가대표 자리를 내려놓았다. 쉽지 않은 시즌이었지만, 윤아선은 이 아쉬움을 자양분 삼아 다가오는 시즌을 향한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경기는 해봐야 알지만, 그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번 시즌 안 됐다고 해서 좌절할 필요가 없고, 저는 초심으로 다시 돌아간다고 생각으로 준비하고 있어요. 앞으로도 그런 일이 충분히 있을 수도 있으니까, 경험으로 발판 삼았던 것 같아요. 좀 속상하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는 거고, 좀 실수가 있었던 건 사실이고 또 돌이킬 수 없기도 하니까요. 이제 받아들이고 다음 시즌 다시 잘 준비해서 후회 없는 경기를 하다 보면 언젠가는 다시 그 자리에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일종의 재충전으로, 윤아선은 비시즌 동안 유튜브 웹예능 <하이스코어 시즌2>에 참여했다. 고등학생 대상으로 진행되는 수학여행 콘텐츠로, 팬의 추천으로 우연히 서류를 넣은 것이 시작이었다. 높은 경쟁률을 뚫고 참여한 면접에 합격 문자를 받았다.
“3박 4일 정도 촬영했어요. 캐나다 전지 훈련 이후에 일주일 뒤에 촬영하는 거라 시차 적응이 아직 잘 안됐지만 재밌었어요. 다른 종목에 대해서 좀 더 알게된 것 같고, (같이 출연하는) 언니 오빠들이랑 재밌는 게임을 하면서 친해졌어요. 운동에 관련된 프로그램이다 보니 뜻깊은 경험이었던 것 같아요. 다른 종목에 대해서 몰랐던 걸 알게 된게 많았요. 운동하면서 어떤 힘, 근육이 많이 쓰이는지 같은 거요. 이야기를 나눠 보니까 어떤 부분은 처음 알게 된 것도 많았고, 어떤 점은 종목 관계 없이 공통적이구나 라는 걸 많이 느꼈던 것 같아요.”
새로운 시즌 프로그램은
LaLa Land와 퀸즈갬빗
윤아선은 다가오는 7월 22일 열리는 주니어 그랑프리 선발전을 출전하기 위해 부지런히 땀방울을 흘리고 있다. 지난 주니어 그랑프리의 아쉬움을 이겨내고, 2023년 강원 동계 청소년올림픽을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이번 시즌은 주니어로 다시 뛰어볼 것 같아요. 플립-토 점프도 연습하고 있어요. 주니어 그랑프리의 아쉬웠던 기억을 잘 이겨내 보고 싶어서 지금 주니어 선발전을 준비하고 있어요. 사실 내년 유스 올림픽이 제일 큰 목표라, 유스 올림픽 선발전 전에 주니어로 뛰어볼 수 있는 대회에서 제가 부족한 점을 채워 나가보고 싶어요. 주니어 그랑프리에서 후회 없는 경기 하고 오는 것과, 유스 올림픽을 출전하는 것, 다시 국가대표가 되는 것까지 이번 시즌 목표로 삼고 있어요.”
윤아선은 비시즌 동안 2018평창기념재단이 지원한 플레이 윈터 특별전지훈련에 참여했다. 2018평창기념재단의 지원으로 캐나다 토론토로 전지 훈련을 떠났다. 재단에서는 단순히 물질적인 후원을 넘어, 완벽한 피겨스케이팅 전용 링크장과 선수를 연결해 줬고 현지에서도 의사소통에 있어 윤활유 역할을 해줬다. 캐나다에서 프로그램의 완성도를 높이고 비점프 요소를 채워나갈 수 있었다는 소회를 전했다. 윤아선은 현지에서 안무가 제프리 버틀과 함께 직접 선택한 쇼트 프로그램 <라라랜드 OST>를 작업했다.
“예전부터 팬분들이 많이 추천 해주셨던 건데, <라라랜드 OST>를 선택했어요. 밝은 이미지랑 잘 어울릴 것 같아요. 제가 자랑하고 싶은 포인트는 스텝 시퀀스에요. 이번 쇼트 프로그램은 관중들과 심판 선생님들에게 제 프로그램 이야기를 좀 더 잘 전달 하겠다는 느낌으로 준비하고 있어요. 포인트 동작도 많이 넣었어요.”
긍정의 아이콘
윤아선이 꼽은 선수로서 자신의 가장 큰 장점은 회복 탄력성이다. 실수해도 다시 마음을 가다듬는 것을 장점으로 꼽았다. 앞으로 선수로 성장하며 이루고 싶은 궁극적인 목표 역시 같은 곳에 있었다.
“힘들었을 때 잘 극복했던 선수로 남고 싶어요. 언제나 잘할 수는 없지만, 많이 노력하면서 노력했던 것만큼 경기를 잘해가면 되게 멋있게 끝나잖아요. 그런 모습을 좀 더 기억에 남기고 싶어요. 제가 노력했던 것만큼 안무에서, 또 대회에서 보여주는 거.”
어머니 박수진 씨가 바라는 선수 윤아선, 인간 윤아선 역시 궤를 같이하고 있었다.
“아선이가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누군가에게는 용기도 주고, 누군가는 아선이를 롤모델 삼아 희망도 줄 수 있는 그런 긍정의 아이콘이 됐으면 좋겠어요. 또 선수로서 차근차근 성장하는 것도 좋지만, 잘 만들어 간 후에 내려올 때 실패라고 느끼지 말고 과정이라고 느꼈으면 좋겠어요. 인생 전체로 봤을 때, 쉼표도 괜찮고 꼭 그 과정이 마침표는 아니니까요. 그러니까 잘 마무리하는 것도 여정인 것 같아요.”
약자에게 따뜻하고 밝은 윤아선. 단단한 마음가짐과 좋은 선수가 되기 위한 사유는 ‘마침표가 아닌 쉼표’에도 항상 함께하는 어머니가 있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더 큰 도약을 위해 꿈꾸는 그를 응원하며, 윤아선이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긍정의 아이콘이 되기를 기원한다.
인터뷰 진행 김현진
포토 디렉터 박지민
영상 디렉터 이민정